해적의 세계사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46
모모이 지로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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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커뮤니케이션즈의 책을 여러 번 접해보았지만 트라비아 시리즈는 처음입니다. 간간이 올라오는 신간 소식을 보면서도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소수의 특정층을 겨냥한 것 같은 제목에 저는 그 대상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보병 장비>,<세계의 군복>, <도해 첩보, 정찰 장비> 같은 책들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죠. (<영국 집사의 일상>이라거나 스페셜의 <중 2병 사전> 같은 건 조금 호기심이 생겼었지만요.)
책날개의 트라비아 시리즈 소개를 보면, 트라비아란(Travia) 잡동사니 정보나 잡학적 지식을 말한다고 합니다. 흔히 오타쿠라는 통칭으로 불리는 이들을 중심으로 생산/소비되는 서브 컬처적 지식 같은 걸 말한다고 하는데요. AK커뮤니케이션즈에서 발행하는 트라비아 시리즈는 비주류이지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에 무게를 두고 출판한다고 합니다. 궁금한 주제에 대해 나무위키나 유투브등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전문가가 저술한 책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지적 호기심의 맛은 다를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읽어보기 전엔 느낄 수 없습니다. 워낙 주제가 다양하니 입맛에 맞는 책을 골라 읽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을 거예요. 저도 이 책 <해적의 세계사>를 읽기 전에는 이곳이 맛 집인 걸 몰랐거든요.
<해적의 세계사>는 매끄러운 번역과 도해로 아주 쉽게 세계사를 접할 수 있게 편집되어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지리나 세계사 과목의 점수는 좋지 않았지만 지도를 보는 것만은 좋아했는데요. 그 지도를 눈으로 좇으며 따라 그려보는 것도 좋아했기에 이 책에 수록된 지도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해적의 세계사>는 고대 그리스의 해적부터 시작하여 현대 소말리아의 해적에 이르기까지 바다를 누비던 - 나아가 육지까지 점령한 해적의 역사를 시간의 흐름 순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 웃긴 글에서 읽었던 짧은 글이 생각납니다. 몇 년간 유니세프 같은 곳을 통해 정기 후원을 했던 소말리아 어린이가 자라서 직장을 구했다고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인데요. 그 직장이 소말리아 해적이었다나. 우스개였으면 좋겠는데 실화일지도 모릅니다. 슬픈 이야기죠.
해적은 예로부터 전 세계 곳곳에 있어왔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서양의 해적만을 다룹니다. 그리스의 해적, 고대 로마 해적, 무슬림 해적 등... 서두에서 동양의 해적을 다루지 않았음에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 때 짐과 실버가 활약하는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실버의 매력에 퐁당 빠졌었는데요. 지금은 왜 그랬을까 이해가 잘 안됩니다. 해적은 엄연히 범죄자이거늘. 반해서 어쩌자는 건가요. 어려서 뭘 몰라 나쁜 남자가 좋았나 봅니다. 해적은 범죄자, 약탈자, 파괴자입니다..... 분명 그러한 거였는데, 맞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해적은 약탈자 일 수도 있고, 위대한 정복자 일 수도 있습니다. 


(붙잡힌 해적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 끌려왔다) 대왕이 해적에게 '어찌하여 바다를 어지럽히는가'라고 묻자 해적은 겁먹은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폐하가 전 세계를 어지럽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작은 배 한 척으로 그런 일을 하는 까닭에 도적이라 불리고 폐하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그런 일을 하는 까닭에 황제라 불리는 것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신국론]중에서) 
-p.19



초반에 놓인 이 인용구를 읽고 갑자기 뭔가가 깨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을을 약탈하고 노예를 취하여 내다 팔았던 해적은 범죄자이고, 함대를 몰고 가서 타국을 침략한 이들은 정복자라고 생각한 내 생각이 잘 못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런 것을 깨달은 후 책을 읽기 시작하니 여러 가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악명 높았던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마젤란 이후 세계를 두 번째로 일주한 사나이가 되고, 영국 여왕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는 이유로 교수형은커녕 기사 작위까지 내립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하려면 크게 해야 하나 봅니다. 
책의 초반에선 해적질이 상당히 나쁜 것이라는 쪽과 그래도 바이킹- 노르만의 이동을 생각해보면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부분이 아니었나 하는 쪽, 심지어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는 쪽의 생각이 뒤엉켜 좀 답답했습니다만,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러니 읽고 알아두자, 다만 지금은 없어져야 할 악이다...라고 결론 내리고 나니 후반부는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실은 윌리엄 키드라거나 멋진 여성 해적 - 마치 영화나 소설 같은 인생이 매력적이었기에 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파나마의 뉴프로비던스(영국령)에 버커니어(해적)들이 모여들어 거래도 하고 쉬었다 가기도 하는 장면에서는 캐러비안 해적이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당시가 카리브 해적의 황금기였다고 하고요. 

해적이 등장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즐기는 독자라면 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간의 호기심만을 지녔던 제가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걸 보면요. 바닷가의 커피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보며 읽었더니 더 즐거웠습니다. 여름휴가지에 함께 할 책으로 추천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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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다운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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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슥한 숲길, 동물뿐만 아니라 악한이 덤벼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 길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밤, 남편의 당부를 가볍게 여기고 숲속의 지름길로 차를 몰고 돌아오던 캐시는 앞의 차량이 멈춰 서는 바람에 오만 생각을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걸까? 고장 난 걸까? 보험회사나 상대방의 남편이(운전자가 여자라면) 오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휴대폰 불통지역인 걸. 그렇다고 자신의 차에서 내려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 보기도 두렵습니다. 이런 식으로 운전자를 낚아서 공격하는 강도가 있다는 말도 들었었기에 함부로 내리기도 그렇습니다. 결국 캐시는 그 차를 지나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차의 운전자- 여자는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만일, 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도왔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솟아나기 시작하는데, 심지어 피해자는 이제 막 사귀었지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캐시가 아는 여자였습니다. 캐시의 죄책감은 자신을 먹어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보통은 자신이 지나온 길에서 살인이나 사건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보면, 범행 대상자가 자기 자신이 되었을지 모른다며, 피해자는 참 안되었지만 그게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더라도 - 할 텐데요. 캐시는 심각할 정도로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런 생각은 공포로 변해가는데요. 집 주변에 나타나는 낯선 사람, 갑자기 방문한 보안 업체 사람, 뿐만 아니라 막상 받아보면 아무 말 없이 끊는,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걸려오는 집 전화, 가장 심각한 것은 그녀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조기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엄마의 유전적인 영향인지, 캐시 역시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늘 조작하던 세탁기나 커피 메이커 같은 가전제품의 사용법도 잊습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게 맞는 건지 불분명한 가운데 환각을 보거나 환청도 듣습니다. 분명 주방에서 커다란 칼을 보았는데, 남편을 불러서 다시 가 보니 조그만 과도로 변해있질 않나, 어딘가 창문이 열려있는 걸 봤는데, 닫혀있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보안업체를 통해 방범 시스템을 달았는데 - 그녀는 계약서에 사인한 기억도 없지만 - 비밀번호를 잊고 패닉에 빠지기도 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 레이철도 사랑하는 남편 매튜도 그녀를 이해하고 다독이지만 스스로의 공포는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을 먹어도 그때뿐, 마음은 편하지만 몸이 지나치게 늘어집니다. 점점 사라지는 기억, 그리고 잡히지 않은 살인범에 대한 공포. 다른 건 잊어버리면서 왜 그 사건만은 캐시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

그러고 보면 제목을 참 잘 지었습니다. 브레이크 다운(break down).
보통은 고장 나다, 망가지다의 뜻으로 사용되죠. 그래서 숲에서 고장 나서 멈춰버린 피해자의 자동차를 떠올렸습니다. 표지에도 차 한 대가 서 있고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의 인생 역시 붕괴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밝힐 수 없는 어떤 것들도 브레이크 다운되고 있어요. 게다가 'nervous break down'이라고 하면, 신경쇠약이니 이보다 적절할 수 없죠. 중의적인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마지막 50페이지를 향해 내달립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말이에요. 

이 소설에서는 캐시가 겪는 심리의 불균형과 불안함이 제법 잘 그려졌습니다. 읽다 보면 뭔가 감이 잡히는 부분이 있기에 내 생각이 맞는지 어쩐지 궁금해 좀 더 빨리 달립니다. 뜻밖의 사실을 만나 전복되기 전까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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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얼티
스콧 버그스트롬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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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개봉한 플라이트 플랜에서는 카일 플랫(조디 포스터)이 운행 중인 비행기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딸을 찾는 시련을 겪습니다. 2008년 이후 테이큰의 브라이언 밀스(리암 니슨)은 납치된 딸을 찾는 사투를 벌입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누군가가 납치한다면 세상 어떤 부모라도 조디 포스터나 리암 니슨이 되는 걸 꺼리지 않을 겁니다. 김명민은 하루(2017)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몇 번이고 같은 시간을 살지 않나요.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위험에 처한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달려가는 청소년이라니. 고작해야 집 안에서 울고만 있을 것 같은 - 조금 더 강한 아이라면 경찰 같은 기관에 하루빨리 구해 주길 당부하며 신께 간절히 기도할 것 같은데요. 

스콧 버그스트롬의 <크루얼티>에 등장하는 그웬돌린은 그런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아니,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보통의 청소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의에 굴하지는 않지만 세련되게 대응하는 법은 잘 모르는 평범한 소녀였죠. 군인이었던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일곱 살 이후로 아빠와 단둘이 살아왔던 소녀에게 그림자가 없다면 이상한 일일 테지만,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빠와의 사랑으로 심지 굳은 소녀로서 잘 커나가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재혼상대였기에 그웬돌린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였어도 누구보다도 강한 부녀의 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이였습니다. 외교 행정관으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불편이 있음에도 큰 불평하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덕분에 외국어만큼은 현지인처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었겠죠. 
그러던 어느 날, 파리로 출장 간 아빠가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아빠는 사실 외교 행정관이 아니라 CIA 요원이었던 겁니다. 파리에서 작전 중 갑자기 연락을 끊고 사라져버렸는데요. CIA 측에서는 해외 비밀 계좌를 가지고 있던 그가 잠적했다고 생각하는데, 그웬돌린은 믿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사라져버릴 아빠가 아니었거든요. 잠적이 아니라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겁니다. CIA에서는 그가 납치되었을 가능성을 버립니다. 어른들이 찾으려 하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웬돌린은 썸남 테런스의 도움과 이웃 할아버지이지만 알고 보면 왕년의 스파이 벨라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파리로 날아갑니다. - 이모는 아이가 실종되었다고 생각하고 신고하는 바람에 그 동네에선 난리가 났지만요. - 파리에서 벨라 할아버지의 지인 야엘을 만나고, 야엘을 통해 두려움 없는 강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무슨 히어로 개조물이나 일본 만화처럼 그냥 뚝딱뚝딱, 우와 원래 이렇게 잠재된 능력이 있었던 건가! 하는 식으로 변화되는 건 아닙니다. 그웬돌린이 가지고 있던 건 균형 감각과 아빠를 되찾아야 한다는 강인한 마음 뿐이었거든요. 아무리 강한 마음을 먹는다 하더라도, 나였다면 그런 액션은 불가했겠지만, 그웬돌린은 됩니다. 왜냐. 주인공이니까요. 그리고 적어도 DNA의 반은 군인이었던 엄마의 것이니까요. 야엘을 통해 소피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국적의 여권을 얻은 그웬돌린은 파리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야엘과 헤어지고, 그때부터 진짜 주인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액션, 스릴, 서스펜스, 위기, 해결, 다시 위기, 그리고 대 위기.

아빠와 딸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전반적으로 테이큰 같은 추격 액션 스릴러 미스터리... 그런 느낌이려니 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제 예상보다는 좀 더 강했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아웃사이더였던 그웬돌린이 아빠를 찾아야 한다는 목표 하나로 얼마나 강해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성장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스릴러로서의 큰 줄기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요. 
아름다운 도시, 낭만의 도시라고 생각했던 '파리','프라하','베를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생각했던 그것과는 많이 다름을 느낍니다. 소설이라 어느 정도의 과장이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 속의 그곳은 무척 어둡고 더러웠습니다. 마약과 폭력, 그리고 인신매매까지. 그런 흉한 곳에서 그웬돌린은 많은 소녀들을 만납니다. 구할 수 있는 소녀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소녀도 있었습니다. 슈퍼 히어로가 아니니 자신과 아빠만 구하면 되지 않나 싶은 장면도 꽤 많았습니다. 무언가 그웬돌린 안에서 흔들리고 변화한 게 분명합니다. 

<크루얼티>는 <캐리비안의 해적>의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을 맡아 영화화한다고 합니다. 과연 누가 주연을 맡을까 기대됩니다. 스칼렛 요한슨 느낌의 배우였으면 좋겠는데요. 영화도 기대되지만, <크루얼티>의 후속작이 더 궁금합니다. 그렇잖아도 책을 덮으면서 후속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크루얼티> 책 정보를 살펴보니 <그리드>라는 후속이 있더군요. 걸크러시의 그녀, 말 그대로 반해버렸어요. 다시 한 번 꼭 만나고 싶습니다. 영화에서도, 소설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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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카르테 1 - 이상한 의사 아르테 오리지널 6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채숙향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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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학 만화를 좋아합니다. 물론 요리만화라거나 추리 만화 같은 것도 무척 좋아하는데요. 의학 만화에서는 다른 만화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생명의 소중함이라거나 삶의 의미 같은 것이 담겨있어 참 좋습니다. <신의 카르테>는 당연히 만화가 아닙니다만, 읽다 보니 과거에 읽었던 여러 의학 만화들이 생각나더군요. 
<신의 카르테>는 의학 만화로 치면 데츠카 오사무의 <블랙잭>이나 마후네 카즈오의 <닥터 K> 같은 액션물도 아니고, 노기자카 타로의 <의룡>같은 의국 내 암투와 문제점이 드러난, 약간의 정치코드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요. 야마다 타카토시의 <Dr. 고토 진료소> 같은 분위기에 가깝겠군요. 

주인공인 구리하라 이치토는 의사로서의 능력은 괜찮은 편이라 대학 병원에서도 함께 하길 원하는 의사이지만, 정신없고 힘겹더라도 환자와의 유대와 공감을 우선시하는 시골의 병원을 더 좋아합니다. 그 유대감 때문에 환자의 죽음이 자신의 아픔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환자와 함께하고 느끼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문학과 환자를 사랑하는 이치토를 단단히 붙들어 주는 건 별과 산을 사랑하는 아내 하루나인데요. 이치토가 내과의로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라면, 하루나는 그의 마음을 치유하는 신기하고 다정한 존재입니다. 상냥하고 명랑하며 밝은 그녀는 가냘픈 체구의 산악 사진작가인데요. 말 그대로 외유내강 형입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어요. 이치토가 어둠 속을 헤매더라도 반짝이는 이정표로서 항상 그 자리에 있어줄 것 같은 타입입니다.

소설의 작가인 나쓰카와 소스케가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팬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구리하라 이치토역시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톱니바퀴 같은 소설을 끼고 삽니다. 수면시간도 부족한 내과의인데다가 며칠에 한 번씩 응급식 당직을 서야 하는 의사가 책을 사랑하니 괴짜로 보일 수 밖에요. 하지만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의 작가가 그의 창조주이니 어쩔 수 없죠. 

지방의 작은 도시의 병원에서 맞이하는 환자들, 그리고 이치토의 주변 인물들과 함께하며 따뜻한 정과 잔잔한 울림을 얻었습니다. 긴박한 의료현장과 위트 있는 대화, 게다가 감동까지. 조금 찡하다가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닥터의 사정, 환자의 사정 같은 것이 어우러지며 마음 한 켠을 두들깁니다. 그래요. 그들 모두가 인간인걸요. 

아아, 이 책 참 좋습니다.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느낌이 있다면, 이 소설은 의사인 작가의 경험이 풍부히 녹아있는 잔잔한 느낌의 글입니다. 이 소설이 레지던트 시절에 써낸 첫 작품이라니 정말 놀랍습니다. 솔직히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보다도 이 소설이 더 와닿았거든요. <신의 카르테 1>을 읽었을 뿐인데, 나머지 이야기들도 궁금합니다. 읽고 싶어요. 게다가 사쿠라이 쇼 주연의 드라마도 보고 싶군요. 
참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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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에 갇힌 여자 스토리콜렉터 63
로버트 브린자 지음, 서지희 옮김 / 북로드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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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진 그룹 조양호 일가의 갑질로 시끌시끌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중2병이 덜 나아서 그런 걸까 싶을 정도로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하는 그들을 보며 나라면, 내가 만일 저렇게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아주 우아하고 매너 있는 행동으로 사람을 대할 텐데.. 그게 더 멋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과거 유럽의 생활을 잠시 들여다보면, 귀족들의 행동이 마치 그들 같았다고 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매너 있고, 교양 있는 행동은 귀족이 아니라 시민층의 모습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렇다면 조양호 일가의 행동은 스스로를 귀족같이 생각하는 데에서 나온 걸까요? 저는 그런 귀족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만.
이런 부유층, 기득권층의 갑질 행동은(갑질 문화라고 하고 싶지 않아요.) 비단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닌가 봅니다. 혹자는 갑질 문화가 만연한 건 우리나라와 일본의 특징이라고 하던데, 서양권이라고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 읽은 <얼음에 갇힌 여자>를 읽으면서 한진 그룹 조양호 일가의 모습이 떠올랐거든요. 소설 속의 일가는 조양호 일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습니다. 
겉으로야 지역 최고의 유지로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을는지 모르겠지만, 알고 보면 엉망 그 자체였거든요. 자신들의 부와 우아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식들을 내버려 둔 결과가 어떤 건지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얼음에 갇힌 여자> 앤드리아는 소위 말하는 셀럽입니다만, 무척이나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폭력적인 섹스, 마약 같은 것에 스스로를 물들이면서 게을러빠진 행동과 안하무인격인 태도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소문이 나지 않았던 건 집안의 힘과 돈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누군가에게 습격당하고 꽁꽁 얼어붙은 호수 아래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성폭력의 흔적도 없고, 돈도 그대로 있는 걸 보면 원한 살인이나 보복 살해 같은 걸 의심할 수 있는데요. 보통 골치 아픈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뒤를 캐야 하는 상대가 상대니만큼 경찰 측에서도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이니까요. 이에 한동안 휴직 중이던 에리카 경감을 소환합니다. 그녀라면 믿고 맡길 수 있기 때문에 불렀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런 게 아닌가 봅니다. 마음의 준비가 완전히 되지도 않은 에리카 경감을 소환해 굳이 사건을 맡겨놓고는 어찌나 비협조적인지. 일단 맡은 사건에는 최선을 다하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자꾸만 시비를 놓습니다. 그럴 거면 왜 부른 건지. 만일의 경우 잘못되면 덤터기를 쓸 사람이 필요했던 걸까요? 끝까지 읽다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에리카 경감은 작전 중 동료였던 남편을 잃은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도 못했지만, 경찰로서 열심히 사건을 수사합니다. 단서를 찾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비협조적인 건 경찰 내부뿐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하죠. 적극적으로 협조해서 범인을 반드시 밝혀내어 중형을 받게 해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딸의 죽음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는 게, 밝고 명랑하며 어딜 가나 빛을 발하던 앤드리아의 이미지가 사건을 파헤칠수록 점점 더러워져갔거든요. 에리카 경감이 더럽힌 게 아니라 숨겨졌던 앤드리아의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뿐인데, 마치 얼음이 녹아 그 안의 것이 흘러나오는 것처럼요. 앤드리아의 부모와 약혼자는 그녀의 사생활이 까발려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습니다. 부모니까 당연한 일이겠죠. 그래도 범인은 잡아야 하지 않겠어요? 웬만하면 협조 좀 하지.

에리카 경감이 사건을 추적하는 사이 몇 명의 희생자가 더 발생합니다. 범인은 사건을 파고드는 에리카 경감 역시 공격하는데요. 몇 번의 접근과 공격으로 에리카 경감은 위험에 처하고 맙니다. 예리한 직관력과 행동력, 혼자 있을 때면 상실감에 괴로워하지만, 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이고 열심인 그녀를 응원하다 보면 비협조적인 경찰 내부인들 때문에 답답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래도 한 팀인 부하들이 경감을 신뢰하고 잘 따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들 덕분에 수사가 진행될 수 있었거든요. 

범인은 뜻밖의 인물입니다. 일반적인 스릴러물처럼 작품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인물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의외로 작품 내에 잘 드러나있었습니다. 이건 일종의 스포일러가 될까요? 소설 내에 등장하던 인물이 범인이고, 결국 수사 끝에 밝혀낸다는 부분은 추리 소설 같습니다. 게다가 스릴러의 요소도 충분히 갖추고 있어요. 미국 아마존 킨들 1위에 오른 것도 당연합니다. 가독성도 좋아서 술술 잘 읽히거든요. 영국에서는 종합 베스트셀러 2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참 재미있어요. 데뷔작이 이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는 건 주목할만 일이죠. 앞으로가 더 기대됩니다. 에리카 경감 시리즈라고 하니 출판사에서 계속 출판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다음 작품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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