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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다운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으슥한 숲길, 동물뿐만 아니라 악한이 덤벼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 길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밤, 남편의 당부를 가볍게 여기고 숲속의 지름길로 차를 몰고 돌아오던 캐시는 앞의 차량이 멈춰 서는 바람에 오만 생각을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걸까? 고장 난 걸까? 보험회사나 상대방의 남편이(운전자가 여자라면) 오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휴대폰 불통지역인 걸. 그렇다고 자신의 차에서 내려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 보기도 두렵습니다. 이런 식으로 운전자를 낚아서 공격하는 강도가 있다는 말도 들었었기에 함부로 내리기도 그렇습니다. 결국 캐시는 그 차를 지나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차의 운전자- 여자는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만일, 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도왔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솟아나기 시작하는데, 심지어 피해자는 이제 막 사귀었지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캐시가 아는 여자였습니다. 캐시의 죄책감은 자신을 먹어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보통은 자신이 지나온 길에서 살인이나 사건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보면, 범행 대상자가 자기 자신이 되었을지 모른다며, 피해자는 참 안되었지만 그게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더라도 - 할 텐데요. 캐시는 심각할 정도로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런 생각은 공포로 변해가는데요. 집 주변에 나타나는 낯선 사람, 갑자기 방문한 보안 업체 사람, 뿐만 아니라 막상 받아보면 아무 말 없이 끊는,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걸려오는 집 전화, 가장 심각한 것은 그녀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조기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엄마의 유전적인 영향인지, 캐시 역시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늘 조작하던 세탁기나 커피 메이커 같은 가전제품의 사용법도 잊습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게 맞는 건지 불분명한 가운데 환각을 보거나 환청도 듣습니다. 분명 주방에서 커다란 칼을 보았는데, 남편을 불러서 다시 가 보니 조그만 과도로 변해있질 않나, 어딘가 창문이 열려있는 걸 봤는데, 닫혀있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보안업체를 통해 방범 시스템을 달았는데 - 그녀는 계약서에 사인한 기억도 없지만 - 비밀번호를 잊고 패닉에 빠지기도 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 레이철도 사랑하는 남편 매튜도 그녀를 이해하고 다독이지만 스스로의 공포는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을 먹어도 그때뿐, 마음은 편하지만 몸이 지나치게 늘어집니다. 점점 사라지는 기억, 그리고 잡히지 않은 살인범에 대한 공포. 다른 건 잊어버리면서 왜 그 사건만은 캐시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
그러고 보면 제목을 참 잘 지었습니다. 브레이크 다운(break down).
보통은 고장 나다, 망가지다의 뜻으로 사용되죠. 그래서 숲에서 고장 나서 멈춰버린 피해자의 자동차를 떠올렸습니다. 표지에도 차 한 대가 서 있고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의 인생 역시 붕괴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밝힐 수 없는 어떤 것들도 브레이크 다운되고 있어요. 게다가 'nervous break down'이라고 하면, 신경쇠약이니 이보다 적절할 수 없죠. 중의적인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마지막 50페이지를 향해 내달립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말이에요.
이 소설에서는 캐시가 겪는 심리의 불균형과 불안함이 제법 잘 그려졌습니다. 읽다 보면 뭔가 감이 잡히는 부분이 있기에 내 생각이 맞는지 어쩐지 궁금해 좀 더 빨리 달립니다. 뜻밖의 사실을 만나 전복되기 전까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