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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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던 데다가 부모님도 용돈으로 만화나 책을 사는 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으셨기에 상대적으로 용돈이 넉넉한 편이었던 대학시절은 책 구매의 황금기였습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나오는 만화잡지(지금보다 더 다양했었죠), 단행본, 로빈 쿡, 스티븐 킹, 그 외 이런저런 소설들, 읽지도 않을 원서, 계간 추리 문학지(이름도 기억 안 나는) 등등. 책을 별로 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책이 공간을 잠식해 들어가더라고요. 장식장, 책장, 책꽂이, 이불장, 캐비닛(아버지 사무실 것을 들고 왔어요)이 있었습니다만, 잠 잘 곳만 빼고선 책에 둘러싸이고 말았어요. 그러다 보니 정리는커녕 처박기 바빴군요. 언제나 제 방은 어수선했습니다. 20대 아가씨 방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3,4학년 때는 도서관에서 문헌자료들을 찾기도 했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하느라 바빠서 책 구매가 덜 했지만, 숨통을 틔우기 위해 차에다가 책을 싣고 헌책방에 가져다 팔곤 했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저희 집엔 책이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 한기호 님이 알라딘 중고 서적을 적대시하면서 이용자까지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해서, 그렇다면 책 욕심은 많지만 경제력이 좋지 않아 읽고 싶은 책을 모두 사 볼 수 없기에 도서관을 이용하는 나는 중고서적을 이용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쁘고 출판시장을 좀먹는 쓰레기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했습니다.  이웃 끊고 새 글 안 보니 괴로움에서 해방되었지만 말이에요. 출판사 입장에서는 저 같은 사람이 싫겠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능력은 안되는데 책은 읽고 싶은걸요. 일부는 구입하고 대부분은 도서관을 이용합니다. 현재 세 군데의 도서관을 이용하는데 특히 집 근처 제주시 북 카페는 농담 삼아 '내 서재'라고 부릅니다. 만약 제가 읽은 책 모두를 구입했더라면 저 역시 장서의 괴로움을 겪고 있을 거예요.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은 읽고 있는 저의 입을 쩍 벌리게 만들었습니다. 책이 엄청나게 쌓여 목조건물의 바닥이 꺼질 정도라니, 이 정도면 재앙이네요. 책을 연간 400권 읽는다 치고 (저는 250여권이지만 만화까지 하면 그리될 것 같네요) 10년이면 4천 권 100년이면 4만 권인데. 보유한 책이 3만 권을 넘는 사람들은 그 책을 다 읽을 수는 있는 건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흥. 어차피 다 읽지도 못하면서 쌓아두기는.'이라고 구시렁대지만 사실은 부러워요. <장서의 괴로움>에는 책이 사는 집을 지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신경숙 작가님의 집이 그러하다던데요. 아무튼 그는 모든 벽에 책장을 설치하는 것도 모자라 주택 개축시 복층 구조의 높다란 벽을 모두 책으로 채운 꿈같은 집을 짓습니다. 책의 보유를 적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집을 동경하는 걸 보니 저는 장서의 보유와 욕심 버리기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책이 등장해서 머지않아 나무의 무덤인 책이 사라지는 건 아닌가, 그럴 땐 책장에 외장하드나 USB를 쌓아두게 되는 건가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전자책은 크레마나 아이패드 같은 것으로 읽은 적은 없지만 PC로 도서대출하여 읽어보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무리였습니다. 하나의 콘텐츠 정도로만 인식이 되어서 책 읽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책이 사는 집을 동경하게 될 것 같습니다.

 

책은 내용물 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종이질부터 판형, 제본, 장정 그리고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촉감까지 제각각 다른 모양과 감각을 종합해 '책'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

p.181

 

책이란 본디 읽히기 위해 태어난 바. 읽히지 못하고 꽂혀있기만 하면 죽은 거랑 다를 바 없어서 불쌍합니다. 그러니 한 번 읽고 둘 것이 아니라 가끔씩 꺼내어 다시 읽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해서 미안한 책이 여러 권입니다. 심지어 사놓기만 하고, 혹은 선물 받은 채로 일 년도 넘게 읽지 않은 책들도 있어요. 책들에게 미안합니다. 새로운 것만 눈에 들어오니 저는 바람둥이인가 봐요. <장서의 괴로움>을 읽는 내내 책 더미에 깔릴 것만 같은 그들이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나 역시 저렇게 불편하고 싶다는 이중의 심리가 오락가락했습니다. 문득 고개를 드니 '그런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나 좀 읽어줘.'라고 하는 책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미안하다 책들아.

책은 내용물 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종이질부터 판형, 제본, 장정 그리고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촉감까지 제각각 다른 모양과 감각을 종합해 `책`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

p.181

책을 필요 이상으로 끊임없이 쌓아두는 사람은, 개인차가 있긴 하겠으나 멀쩡한 인생을 내팽개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생활공간 대부분을 거의 책이 점령하는 주거란, 일반 상식에서 보면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멀쩡한 정신은 아니다.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은 그저 한도 끝도 없이 갖고 싶은 책이 눈앞에 아른거려 계속 살 수밖에 없는 비틀어진 욕망뿐이다. 게다가 그에 대한 반성마저 별반 없다.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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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 생명진화의 숨은 고리
박성웅 외 지음 / Mid(엠아이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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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이란 무엇일까요? '蟲'자가 들어가 있으니 벌레의 한 종류로 보아야 할까요? 서민교수는 <기생충 열전>에서 기생충을 "한 종의 생물이 다른 종의 생물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득을 취하며, 핵막을 가진 진핵 생물이어야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칼 짐머는 <기생충 제국>에서 "기생충은 다른 종에 붙어살면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른 생물에게 피해를 주는 모든 생물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기생충이라 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프롤로그 발췌)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 공생이지만, 일방적으로 자신만 이득을 취하는 모든 생물을 기생 생물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네요.

 

기생 : Parasite라는 단어를 들으면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같은 것들과 채변봉투의 향긋한 추억이 떠오르지만, 기생수도 생각납니다. 원래는 인간에게 달라붙어 기생하며 숙주인 인간을 완전히 장악해 그들을 조종하고 지구를 장악해가는 패러사이트들이지만 주인공과 그의 손에 깃든 패러사이트는 공생해가며 위기를 극복해나갑니다. 그저 재미있는 만화로만 여겨졌던 <기생수>가 이 책 <기생>을 읽고 나니 심오한 만화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많은 기생충들이 있는데,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도 있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있으며 오히려 연구를 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러는 순간 '기생'이 아니지 않는가 싶지만)도 있습니다. 몇 번을 보아도 재미있는 영화 '연가시'에서는 변종 연가시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실제로는 곤충 한정 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벌레를 싫어하기 때문에 계곡물에서 연가시를 만나는 건 사양입니다. 연가시가 있다는 게 수질 최고라는 보증이 된다고 해도 말이죠. 메디나충처럼 지속적인 괴로움에 시달리게 하는 무서운 기생충도 싫고, 개구리 다리를 기형으로 만드는 리베이로이아도 무섭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기합니다. 숙주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식에 유리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도 신기하고, 번식에 용이하도록 형태 변이를 일으키게 하는 것도 신기합니다. 이쯤 되면 본능대 본능의 싸움이 아니라 고도의 지능을 지녔으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지구에 잠입해있는 기생수의 친구 패러사이트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드는데, 기생 따개비는 숫게를 기생 거세해 암게로 바꿀 수 있을 정도입니다.

어린 따개비 암컷이 게를 발견하면 위에 올라타 자신의 껍질을 벗고 부드러운 부분을 게 관절을 통해 집어넣습니다. 그리하여 양분을 계속 빨아먹는데, 게의 흉곽 신경절과 뇌 계통의 신경을 모두 장악해버려 게는 완전히 따개비의 조종하에 움직입니다. 짝짓기, 탈피도 금지. 수주 후 따개비 암컷이 게의 배 뒤쪽에 주머니를 만들고 알을 낳으면 수컷들이 수정시키고, 게는 그 알을 자신의 알처럼 돌보는 데다가 알이 부화되면 게는 물속에다가 그 알 주머니를 놓아주고 물에 뜬 유충들을 앞발로 하나씩 분리해줍니다. 이건 기생이 아니라 지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한번 기생수가 생각납니다.

이렇게 곤충이나 게 같은 것을 조종하는 기생충이 사람도 조종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사람들의 교통사건율이 높았으며, 자살률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알츠하이머병의 발병률은 낮아진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말라리아, 체체파리의 수면병, 메디나 충 같은, 사람에게 몹쓸 기생충도 있지만, 유기농법에 도움을 주는 기생벌이나 크론병에 효과가 있다는 돼지 편충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인간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이 해로운 가 이로운 가로 갈려왔고, 해롭다 여겨지면 그것을 박멸하려 애써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성이 생긴 슈퍼 박테리아나, 말라리아 같은 것들도 생겨났는데, 인간과 그들은 끊임없이 싸우며 드래곤볼도 아닌데 더욱 강한 적을 만나게 됩니다. 피콜로처럼 우리 편이 되게 하면 좋을 텐데요. 이 책을 통해 기생 생물의 여러 가지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내 몸을 그들에게 내어주는 것은 거절하지만, 세상엔 이런저런 신기한 녀석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얼핏 보기에 체체파리와 같은 매게 동물이나 기생생물들은 인류에게 이로움은 전혀 없고 해가 되는, 쓸모없고 없어도 좋은, 아니 없어져야 하는 그런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구에 아예 없어도 좋은 존재라는 것이 있을까? 없어도 되고 있어야만 되고는 인간이나 또 다른 절대적인 누군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운 대자연의 선택이다. 진화를 통해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한 종은 살아남고 반대로 적응하지 못한 종은 사라질 뿐이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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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뺑덕
백가흠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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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설 싫습니다. 권선징악적 코드나 개그코드, 희망, 힐링 같은 것이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두침침하고 곰팡내 나는 공간에서 눅눅한 살덩어리 마주 비벼대다가 결국 빛이 있으되 빛이 아닌 매캐한 곳으로 추락하고 마는 엉클어진 결말은 무척 싫습니다. 희망과 빛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말하는 양. 이렇게 칙칙한 것이 실제의 삶이라고 말한다면 차라리 지옥이 천국일 것입니다. 음울하고 망그러진 삶을 회복하려 하기는커녕 발을 질질 끌며 나락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주의 사람들마저 자신의 암흑 속으로 끌어들이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뻔뻔함이라니.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화가 나고 짜증 납니다.

 

아주 어린 시절 심청전을 보았을 때는 효녀로구나, 효행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아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희생은 부모를 위해 당연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어른들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자라나면서 슬슬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심청이는 공양미 삼천 석에 아비 눈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뛰어들었는데...라는 말은 여러모로 편리한 이야기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심청전 자체가 잔혹동화였습니다. 가진 것 없는 주제에, 어린 딸이 벌어오는 것으로 연명하는 주제에 눈 뜨게 해준다는 말에 공양미 삼백 석을 덜컥 약속하고, 그것도 모자라 딸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다니. 내가 부처님과 이런 약속을 했으니 네가 어떻게 해보라고 하는 은근한 강요가 아니고 뭐였겠습니까. 원작에서의 심학규는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 청이는 달아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기적인 아버지에게 한몫 챙겨주고 인당수에 빠져 자살함으로써 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청이를 심학규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뺑덕어미에게 모든 재산을 다 뜯긴 것도 자업자득입니다.

원작의 등장인물들이 마담뺑덕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각자의 불행과 어두움을 가진 채로. 마담 뺑덕의 등장인물 중 어느 하나도 내면의 빛을 지닌 이가 없습니다. 찌들고 지치고 힘들고..... 학규는 잘 나가던 교수였지만 성적으로 문란한 자였습니다. 조교와의 관계가 들통 나 시골로, 글 선생으로 내려오게 되었지만, 매일 술에 절어살며 희망을 놓았습니다. 그의 사라져가는 시력 역시 그의 좌절에 한몫했겠지만, 그의 가장 큰 죄는 반성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기대온 것은, 그리고 그가 기댄 것은 매일 몸을 팔아대어도 갚을 길 없는 빚더미에 신음하는 팽 마담이었습니다. 마이너스인 둘이 서로 몸을 섞는다고 플러스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먼 발치에서 학규를 짝사랑하던 팽 마담의 딸 덕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뿐이었습니다.

 

간병변으로 반 시체나 다름없는 아버지를 간호하며 집안에 보탬이 되려 놀이공원 매표원일을 했지만 그나마 월급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 그녀에게는 학규가 희망이고 탈출구였습니다. 아버지가 죽고 팽 마담이 집을 떠나 있는 새 덕이는 학규의 여자가 되고 학규의 딸 청이를 돌보며 자그만 희망과 지독한 사랑을 꿈꿉니다. 그러나 학규는 이기적인 인간이었고, 끝까지 저만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청이는 부모와 불화, 엄마의 자살, 사랑에 고픈 상태로 이리저리 방황하다 스스로 어둠 속으로 뛰어듭니다. 이 소설에서 빛을 잃은 건 학규뿐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한줄기 마음속에 남겨두어야만하는 빛을 잃고 이리저리 헤맵니다. 눈을 떠도 뜬 것 같지 않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방황하는 그런 영혼들이 되어 똑바로 걷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소설은 독자들마저 이리저리 흔들어 헤매게 만듭니다. 지나칠 정도로 어지러운 입체적 구성(역순행적이라고 말해도 복잡할 정도의)입니다. 현재와 과거만을 오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대과거, 과거, 현재, 과거의 과거. 온통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통에 맹인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유랑하는 기분이어서 살짝 욕지기까지 일었습니다.

 

이런 것도 사랑이었을까요. 파멸에 이르도록 잔인한 것도? 모두가 이기적이었고 모두가 잔인했으며, 자신을 위한 사랑을 했고, 모두가 미쳐버린 것 같았는데도. 그렇다면, 저는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던지듯 건넨 돈 봉투를 꼭 움켜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살아남아서 복수하겠다고 결심했다. 지나간 사랑의 다른 이름은 복수다. 그것은 원래 한 몸이어서 변화하는 과정이나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계기가 필요한 것뿐이었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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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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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편의점이 너무 많습니다. 과포화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다들 장사는 괜찮은 건지. 어찌나 편의점이 많은지 길 건너에서 마주 보고 있는 같은 브랜드의 편의점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기존의 편의점이 있는데 굳이 그 부근에 편의점을 여는 점주님들의 도전정신은 놀랍기까지 하네요. 저라면, 안 하겠는데. 하지만, 이용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편의점이 없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제 위치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게 훨씬 편리하죠.

 

편의점이라는 게 조금씩 번져나가기 시작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는 정가를 다 받는 얄미운 가게였습니다. 10% 할인해주는 동네 슈퍼가 문 여는 시간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내 너를 이용하지만, 낮엔 굳이 너를 이용할 일이 있겠느냐며 발길을 돌렸었지만, 편의점은 본래 자신의 이름답게 (CVS :ConVenience Store) 점점 진화해 알뜰 소비자마저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1+1 이니 2+1 에다가 제휴 할인, 요일 할인, 포인트 적립까지... 이젠 웬만큼 계산기 두들기는 실력이 아니라면 동네 슈퍼가 저렴한지 편의점이 저렴한지 헷갈립니다. 그러니 습관처럼 배가 심하게 고플 땐 편의점으로, 조금 덜 고플 땐 슈퍼로 향합니다. 어쨌든 배고플 일은 없어서 좋네요. 반면, 아침 시간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우는 초등학생들을 보면서 저렇게라도 아침을 먹고 가는 것이 좋은지, 인스턴트식품으로 어린 시절부터 세포에 미뢰에 가공의 맛을 새겨 넣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안쓰럽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시로 바뀌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보며, 책임감의 부재인가 점주에 갑질에 못견딘 을의 설움인가 고민하게 되고, 갑질을 하는 점주도 실은 갑이 아니라 본사의 노예 생활을 하는 을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편의점은 우울하고 안쓰러운 곳일까요. 1300원으로, 1500원으로,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800원짜리 삼각김밥으로 한 끼를 때우고 힘내서 살아보자는 영혼들의 쉼터인 것인가요.

최초의 24시간 이용 가능한 슈퍼의 형태에서 벗어나 진화한 편의점은 단순 소매 유통상이 아니라 복합 만능 생활 거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생필품, 일상용품뿐만 아니라 식당 대용, 술집 대용(편의점 외부 공간에서)으로 이용되며, 명절에도 문을 열어(제주에는 열지 않는 곳도 많습니다) 배고픈 영혼들을 달래줍니다. 각종 요금 수납, 택배서비스, 티켓 판매, 게임머니 구매 등의 종합생활 서비스도 하고 있습니다. ATM 기계 설치, 심지어 명동에는 환전소 기능까지 갖춘 편의점이 있다고 합니다. 저희 동네 모 편의점은 요일별 메뉴를 달리하는 3900원 덮밥집까지 운영 중입니다. 수익금의 일부는 무상급식기관에 기부도 한다고 합니다. 저녁에는 편의점 앞 너른 마당에 천막까지 둘러주어 손님들이 추위에 떨지 않고 치맥을(치킨도 팝니다) 할 수 있도록 서비스합니다. 이 모든 서비스들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편의점인 것입니다.

갓 구운 빵, 비상약 문구, 꽃, 식당, 술집, 카페, 은행, 여행사, 택배사 등의 상업, 공공기관, 문화공간들을 하나에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근의 해당 점포들을 모두 자신의 점포에 흡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편의점은 소시민인 사장님의 복합 가게이지만, 5개의 편의점이 우리나라 편의점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거대 기업이 소규모 상업들을 하나씩 찍어누르며 흡수하고 있다는 점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치킨전>에서 느꼈던 아이러니를 <편의점 사회학>에서도 느꼈습니다. 이용을 하지 않으면 소점포 점주인 사장님이 신경 쓰이고, 이용하자니 거대 기업이 소상인을 괴롭히는데 일조하는 것 같고. 편의점을 어떻게 보아야 좋은 것일까요? 저는 오늘도 라면을 사러 편의점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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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잔의 칵테일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이덴슬리벨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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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맥주>로 잔잔한 힐링 작가라는 편견을 깨 준 모리사와 아키오의 <여섯 잔의 칵테일>을 읽었습니다. 저자를 유쾌한 작가라고 기억하고 싶은데, 나는 어째서 또 잔잔한 힐링의 세계로 들어가려 하는 거냐며 스스로를 탓해보지만, 읽고 싶다는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 결국 읽게 된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리사와 아키오는 마초 스타일이지만 마음 따뜻한 게이, 곤마마를 메인에 내세워 잔잔하지만은 않은 유쾌한 힐링 속으로 저를 밀어 넣어주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가장 방황되던 시기에 제일 좋아했던 칵테일은 선라이즈였는데, 보드카 선라이즈도 좋고 데킬라 선라이즈도 상관없었습니다. 레드와 오렌지, 그리고 그 그러데이션이 좋았던 것이니까요. 원래는 신혼 첫날 새로운 출발을 기뻐하며 마시는 술이라던데, 아무렴 어때요. 저에게는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던 시기였으니 그 술이 딱 어울렸던 것이었죠. 이 책의 제목에 칵테일이 들어있는데다가 제가 느닷없이 술 이야기를 해서 바텐더 이야기라고 생각되겠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원래의 제목 <소중한 것일수록 작은 목소리로>처럼 여섯 명의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느끼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공통의 장소는 헬스장, 그리고 Bar 히바리인데요. 히바리의 마담 곤다(곤마마)는 2m가 넘는 거구의 스킨헤드, 근육이 장난 아닌 마초 스타일입니다.

<시티헌터>의 팔콘이 상상되는 외모인데, 야한 농담을 하지만 어째 귀엽습니다. 마음이 깊고 따뜻해서일까요? 곤마마는 헬스장의 동료이자 히바리의 단골들에게 알듯 말 듯 조언을 해는데요, 바텐더 카오리- 시티헌터의 카오리와 전혀 다른 이미지 - 의 칵테일도 조용히 그들에게 조언합니다.

샐러리맨 게라짱도, 섹시 미녀 미레씨도, 광고 대리점 사장 샤초씨도, 고교생 슌군도, 치과의사 센세도 겉으로보면 모두 유쾌한 사람들이지만, 알고 보면 모두 한가지씩의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나 이해하고, 사랑하며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들이 발랄하고 상큼하게 그려집니다. 심지어 이들을 제자리로 돌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의 곤마마도 '고독'이라는 괴물을 두려워하지만 점차 극복해나갑니다.

<여섯 잔의 칵테일>은 발랄하고,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소설입니다.

네가 살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뿐이야. 과거와 미래를 염려하는 건 다 쓸데없는 짓이지.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과거를 슬퍼하면 모처럼 살고 있는 지금이 불행해질 뿐이야.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불안해할 필요도 없어. 소중한 `지금`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면 안 되겠지? 괴로운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의 불안도 모두 잊고, 지금 이 순간만을 음미하며 살자.

그게 바로 `행복하게 살수 있는 비결`이란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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