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던 데다가 부모님도 용돈으로 만화나 책을 사는 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으셨기에 상대적으로 용돈이 넉넉한 편이었던 대학시절은 책 구매의 황금기였습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나오는 만화잡지(지금보다 더 다양했었죠), 단행본, 로빈 쿡, 스티븐 킹, 그 외 이런저런 소설들, 읽지도 않을 원서, 계간 추리 문학지(이름도 기억 안 나는) 등등. 책을 별로 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책이 공간을 잠식해 들어가더라고요. 장식장, 책장, 책꽂이, 이불장, 캐비닛(아버지 사무실 것을 들고 왔어요)이 있었습니다만, 잠 잘 곳만 빼고선 책에 둘러싸이고 말았어요. 그러다 보니 정리는커녕 처박기 바빴군요. 언제나 제 방은 어수선했습니다. 20대 아가씨 방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3,4학년 때는 도서관에서 문헌자료들을 찾기도 했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하느라 바빠서 책 구매가 덜 했지만, 숨통을 틔우기 위해 차에다가 책을 싣고 헌책방에 가져다 팔곤 했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저희 집엔 책이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 한기호 님이 알라딘 중고 서적을 적대시하면서 이용자까지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해서, 그렇다면 책 욕심은 많지만 경제력이 좋지 않아 읽고 싶은 책을 모두 사 볼 수 없기에 도서관을 이용하는 나는 중고서적을 이용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쁘고 출판시장을 좀먹는 쓰레기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했습니다.  이웃 끊고 새 글 안 보니 괴로움에서 해방되었지만 말이에요. 출판사 입장에서는 저 같은 사람이 싫겠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능력은 안되는데 책은 읽고 싶은걸요. 일부는 구입하고 대부분은 도서관을 이용합니다. 현재 세 군데의 도서관을 이용하는데 특히 집 근처 제주시 북 카페는 농담 삼아 '내 서재'라고 부릅니다. 만약 제가 읽은 책 모두를 구입했더라면 저 역시 장서의 괴로움을 겪고 있을 거예요.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은 읽고 있는 저의 입을 쩍 벌리게 만들었습니다. 책이 엄청나게 쌓여 목조건물의 바닥이 꺼질 정도라니, 이 정도면 재앙이네요. 책을 연간 400권 읽는다 치고 (저는 250여권이지만 만화까지 하면 그리될 것 같네요) 10년이면 4천 권 100년이면 4만 권인데. 보유한 책이 3만 권을 넘는 사람들은 그 책을 다 읽을 수는 있는 건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흥. 어차피 다 읽지도 못하면서 쌓아두기는.'이라고 구시렁대지만 사실은 부러워요. <장서의 괴로움>에는 책이 사는 집을 지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신경숙 작가님의 집이 그러하다던데요. 아무튼 그는 모든 벽에 책장을 설치하는 것도 모자라 주택 개축시 복층 구조의 높다란 벽을 모두 책으로 채운 꿈같은 집을 짓습니다. 책의 보유를 적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집을 동경하는 걸 보니 저는 장서의 보유와 욕심 버리기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책이 등장해서 머지않아 나무의 무덤인 책이 사라지는 건 아닌가, 그럴 땐 책장에 외장하드나 USB를 쌓아두게 되는 건가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전자책은 크레마나 아이패드 같은 것으로 읽은 적은 없지만 PC로 도서대출하여 읽어보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무리였습니다. 하나의 콘텐츠 정도로만 인식이 되어서 책 읽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책이 사는 집을 동경하게 될 것 같습니다.

 

책은 내용물 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종이질부터 판형, 제본, 장정 그리고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촉감까지 제각각 다른 모양과 감각을 종합해 '책'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

p.181

 

책이란 본디 읽히기 위해 태어난 바. 읽히지 못하고 꽂혀있기만 하면 죽은 거랑 다를 바 없어서 불쌍합니다. 그러니 한 번 읽고 둘 것이 아니라 가끔씩 꺼내어 다시 읽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해서 미안한 책이 여러 권입니다. 심지어 사놓기만 하고, 혹은 선물 받은 채로 일 년도 넘게 읽지 않은 책들도 있어요. 책들에게 미안합니다. 새로운 것만 눈에 들어오니 저는 바람둥이인가 봐요. <장서의 괴로움>을 읽는 내내 책 더미에 깔릴 것만 같은 그들이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나 역시 저렇게 불편하고 싶다는 이중의 심리가 오락가락했습니다. 문득 고개를 드니 '그런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나 좀 읽어줘.'라고 하는 책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미안하다 책들아.

책은 내용물 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종이질부터 판형, 제본, 장정 그리고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촉감까지 제각각 다른 모양과 감각을 종합해 `책`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

p.181

책을 필요 이상으로 끊임없이 쌓아두는 사람은, 개인차가 있긴 하겠으나 멀쩡한 인생을 내팽개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생활공간 대부분을 거의 책이 점령하는 주거란, 일반 상식에서 보면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멀쩡한 정신은 아니다.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은 그저 한도 끝도 없이 갖고 싶은 책이 눈앞에 아른거려 계속 살 수밖에 없는 비틀어진 욕망뿐이다. 게다가 그에 대한 반성마저 별반 없다.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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