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변호사 왕실소송사건
정명섭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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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라는 건 대개 일반인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지는 것으로 법정에 설 때 자신이 원고임에도 두 근 반 세 근 반하는 심장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정황을 세세히 이야기할 수 있고 판사가 하는 말에 제대로 조리 있게 말을 할 수 있으며 상대방(피고 측)의 말에도재치 있게 반론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법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해 줄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현대엔 변호사가 있으니 동네 변호사 조들호처럼 어떻게든 해주겠지 싶지만, 과거엔 어땠을까요?


조선시대에는 '외지부'라는 대송인(소송대리인)이 있었습니다. 사실, 대놓고 있었다고 하기에도 뭣한 것이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대신해 송사를 맡아 좋을 결과를 이끌 수 있게 돕는다는 취지는 좋지만, 돈을 더 중시하여 송사를 질질 끌거나 공연히 사람을 부추겨 송사를 만들기도 하는 등 법을 잘 아는 무뢰배나 다름없었기에 성종 때 외지부 활동이 금지되었거든요. 그렇다고 특성상 사라질 직업은 아니니 송사 당사자의 먼 친척인 체하며 계속 활동해왔습니다. 선조실록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고요. 


그 외지부, 조선 변호사의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사건과 합하여 <조선 변호사 왕실 소송사건>이라는 소설로 태어났습니다. 이 책에서는 하의삼도 주민들의 소송이 다루어지는데요. 한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중노미로 살고 있는 주찬학에게 전라도의 섬, 하의도의 주민 윤민수와 두 사내가 찾아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도와줄 것을 청합니다. 처음에는 거절했던 주찬학이 마음을 돌려 그들을 대신해 송사를 걸고 진행하게 됩니다. 그가 마음을 돌린 이유와 그들의 송사는 어떻게 될까요?

소설은 대체로 무난하게 진행됩니다. 결정적인 클라이맥스가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는데요. 책을 다 읽고 난 후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을 읽고 조그만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화 바탕 소설일 거라고 생각지 않고 읽었거든요. 마지막 장면이 정말 마지막이 아니었겠구나 하며 소설이 이어져 현실과 맞닿았습니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생소한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따로 찾아볼 것 없이 작가가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궂이 찾아보지 않아도 책을 읽는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주석도 거의 없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지요. 모르는 단어를 주석으로 설명해주는 책들이 많은데, 읽는 입장에서는 고마움 반, 귀찮음 반입니다. 별로 읽고 싶지 않아요. 읽던 리듬이 깨지니까요. 자연스레 단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서술 방식이 참 친절하다고 느꼈습니다. 


소설 속의 하의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어쩐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그만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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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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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낙원의 정복'을 검색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 음악을 들어봅니다. 유진의 MP3에 15번째 곡으로 저장되어 있던, 영화 1492의 OST 입니다. 몇 번이나 돌려 들은 탓에 이젠 이 곡을 들으면 제라르 드빠르디유 대신 유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비가 오는 늦은 밤, 여자의 뒤를 쫓는 건장하고도 용모단정한 청년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유진은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깹니다. 열 살 때쯤 여행지에서 사고로 형과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이후 정신과 의사였던 이모의 권유로 정신 치료를 받으며 약을 먹어오고 있었지만, 그 약이 자신의 정신을 좀먹어들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몰래몰래 약을 먹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은 약을 먹지 않은지 며칠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약을 끊으면 간질발작이 올 것 같지만, 그래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묘한 흥분감이 좋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느낌을 갖기 위해 약을 한다지만 유진은 약을 먹지 않아야 그런 느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약을 끊은 대가로 잃게 된 것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함께 살던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해진의 전화를 받은 후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피투성이인 자신의 모습과 피웅덩이속에누워있는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소설은 우리에게 미스터리를 던져주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뻔한 범인, 예상을 뒤엎는 반전 같은 것도 없습니다. 유진이 범인이었으니까요.


유진은 어렸을 때 반사회적 인격장애, 즉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 레벨이라는 프레데터. 아이의 파괴적인 그림을 본 이모가 내린 진단이었죠. 아이 때는 이런 그림도 그리고 저런 그림도 그리는 건데, 과잉 진단은 아니었을까. 이모가 프레데터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에 단둘 남은 모자가 사랑으로 보듬으며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유진의 시선을 따르며, 유진의 생각을 따라가며 나는 유진이 되었습니다. 유진이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가져보았었고, 실은 범인이 해진인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가져보았습니다. 혹시 약을 끊어서 보이는 환각은 아닌가 하는 조그만 기대도 가져보았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건 없었습니다. 그는 살인자였고, 사이코패스였습니다. 


이런 캐릭터에 동화되는 것은 드문 일이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이코패스가 주인공인 소설들도 읽어보았었지만 그에게는 마력에 가까운 매력이 있었기에 이러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빠져들고 말지만, 유진은 그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도 아닙니다. 조용하고, 좀 칙칙하고, 분노를 담뿍 안은, 매력적이기는커녕 싫은 타입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유진이 되었습니다. 그가 되어 집을 둘러봅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피비린내와 찐득거리다 못해 젤리처럼 응고되어버린 피웅덩이. 사람의 몸속에 저렇게 많은 피가 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도살자 같은 내 모습,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아버지의 나이프. 이 나이프로 몇 사람의 목을 베었을까요. 두렵고, 회피하고 싶습니다. 일단 아무도 모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리 방문자가 많을까요.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어머니가 남겨놓은 메모인지, 일기장인지는 가지고 나가서 읽으면 충분할 텐데. 왜 여기서 뭉그적거리고 있는 건지.


종의 기원은 무서운 소설입니다. 내가 그에게 동화되어버리는 것이 무섭습니다.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끈끈한 피가 들러붙어있을 것만 같습니다. 나 자신 속의 악마가 깨어날까 무섭습니다. 유진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내가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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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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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라고 하면 고전부 시리즈가 유명합니다만 시리즈의 첫번째 편 <빙과>를 읽고 나서 저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가 좋은 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요. 그래서 그의 책은 계속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야경>은 작년에 선물 받은 책이었지만, 책꽂이에 계속 꽂혀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선물 받은 것이 아니라 딸이 받은 책이었기에 천천히 읽거나 해도 좋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미루어 두었던 건데요. 요사이 열대야와 평소의 수면장애가 겹치는 바람에 괴로워하던 차, 이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야경(夜景)이 아닌 야경(夜警)이지만 어쩐지 읽고 나면 어둠 속의 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저를 책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단편들은 밝음보다는 어둠이 많았습니다. 어두운 반전. 등장인물들은 빙과 시리즈를 그린 타스쿠오나의 그림체로 나타나 제 머릿속에서 멋대로 이야기를 펼쳐나갔습니다. 어쩐지 위태로운, 언젠가 사고를 칠 것만 같은 부하를 둔 파출소의 경찰도(야경), 자살의 명소라고 알려진 료칸의 종업원도(사인숙), 아름다운 어머니와 별 볼 일 없는 아버지를 둔 아름다운 두 자매도(석류), 어떻게든 회사를 위해 성과를 올려야 하는 해외 주재 회사원도(만등), 손님이 드문 휴게소의 주인 할머니도(문지기), 좋은 분이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는 하숙집 주인아주머니도 어두움을 안고 있었습니다(만원). 그러니 어둠 속에서 빛을 찾기는커녕 빛 속에서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죠.


어둡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미스터리가 그렇지 않나요.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소설처럼 경쾌하고 밝은 미스터리도 있지만, 보통은 어둡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어둠을 즐기는 거죠. <야경>은 단편 미스터리의 매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적당한 길이의 적당한 호흡. 그리고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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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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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희미한 빛으로는 저기 서 있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개인가 싶어 마음을 놓았다가는 늑대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어 뜯겨버릴지도 모릅니다.

1982년 4월 26일 경남 의령군의 산골마을 궁유면의 사람들도 늑대를 개로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평소 안면이 있던 지서의 순경이 갑자기 늑대가 되어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고 그 누구가 상상했을까요. 그의 어깨에 걸린 카빈 소총은 무장공비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든든한 무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총부리가 자신들을 향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죠. 그는 56명의 사람을 죽이고 결국 자신도 자폭해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경찰이 마을 사람들을, 심지어 4개의 산골마을을 돌아다니며 마구잡이로 죽였다니 연속 살인도 이런 연속 살인이 없습니다. 사건 종결 후 윗선에 보고도 제대로 이루어졌을까요? 책임 회피를 위해 기록을 조작하고 파기한데다가 당시 신군부의 청와대는 이 사건을 덮으려 언론 통제를 했었습니다. 그러니 사상자의 수가 매체마다 좀 들쭉날쭉합니다. 사건의 경위는 대체로 드러나 있지만 말입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이 우순경 사건을 모티브로 쓰인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황순경이 양 어깨에 카빈 소총 두 정을 메고 수류탄을 두르고 살육을 벌입니다. 그의 총에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56명. 내연녀(혹은 아내)가 파리를 잡으려다 그의 가슴팍을 쳤다는 이유로 꾹꾹 눌러두었던 그의 열등감은 대폭발하고 마을 사람들과 이웃 마을 사람들을 쏘아 죽이고 만다는 점도, 당시 그의 상관들은 온천 나들이를 갔었다는 점도 우순경 사건과 무척 흡사합니다. 아주 끔찍한 일들이, 우순경이 악마가 되었던 그날의 기록이 황순경을 통해 살아납니다. 황순경도 우체국 직원과 전화 교환수를 죽이고, 행인을 죽이고, 초상집에서도 사람들을 죽입니다. 평소에 순경이라는 사람이 결혼식도 안 올리고 동거부터 한다는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마음에 담아두었던 모양입니다. 사건은 이렇게 우울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무서운 소설을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옵니다. 웃으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실소가 터지고 이내 희생자를 보고 웃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이 생깁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책을 읽습니다. 하지만 또 웃고 맙니다. 황순경이 한 명씩 차근차근 죽여나가는 것처럼 등장인물들도 한 명씩 차근차근 등장합니다. 이름만 존재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처음엔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정말 살아있는 인간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의 고민, 나름대로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사랑을 꿈꾸는 사람도 있었고, 신부가 되려는 사람도 있었고, 베트남 참전 퇴역 군인도 있었고, 무협지에 푹 빠져서 온 세상이 무림으로 보이는 소년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느닷없이 허무하게 죽고 맙니다. 살아 있었다면 응원해줬을 텐데....


불행 중 다행히 제가 자꾸만 웃고 만 것은 작가의 의도 중에 있었습니다. 이 책은 블랙 코미디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웃는 게 당연하죠.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죽은 피해자들에게 애도하고 몸보신만 하는 경찰, 공무원들에게 욕을 합니다. 희한하죠. 실제 우순경 사건으로부터 30년도 더 지났는데,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잖아요. 앞으로 계속 변함이 없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슬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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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미스터리한 이방인
마크 트웨인 지음, 오경희 옮김 / 책읽는귀족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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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은 풍자소설가로 유명하죠. 풍자에 관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에 읽었던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왕자와 거지>같은 소설은 그 흐름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본명이 사무엘 랭그혼 클레멘스인 그는 배가 지나가기 안전한 수심이라는 뜻의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데요. 미시시피강에서 자라나 수로 안내인 일을 했던 경험에서 나온 필명인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 이야기의 배경이 미시시피 강 인근인데요. 배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마치 제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가 미시시피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겠죠. 

핼리혜성을 타고 태어난 그가 그 다음번 혜성 주기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작품들을 남겼고 많은 사회 활동을 했었는데요. 말년에는 평안하지 못 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던 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또 다른 딸이 죽습니다. 게다가 시대적 배경까지 그가 염세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인종차별, 물질만능주의, 여성 불평등...


그런 염세적이고 우울한 가운데 쓰인 소설이 바로 이번에 읽은 <미스터리 한 이방인>입니다. 풍자를 넘어선 호된 질책이랄까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온전한 그의 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소설은 네 가지 버전으로 남겨져 있는데 모두 미완성이었습니다. '상테페트르부르크 단장','젊은 사탄의 연대기','학교 언덕','No. 44 미스터리 한 이방인' 이렇게 네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 소설은 초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미스터리 한 이방인>은 그가 남긴 네 가지 버전의 소설들 중 두 번째와 네 번째의 소설이 편집자의 손에서 합쳐져 하나의 소설이 된 작품입니다. 당시 유산관리인에 의해 발표되었다고 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생각은 담겨있지만 온전히 그의 소설이라고 여겨도 좋은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맴돕니다. 'No. 44 미스터리 한 이방인'은 <신비한 소년 44호(문학수첩)>으로 출간된 바 있는데, 미완이긴 하지만 편집자의 손을 거치지 않은 그대로의 원고를 완역한 소설이라고 하니 읽고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미스터리 한 이방인>은 16세기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에셀도르프에서 철없이 신나게 살아가던 세 소년에게 미스터리 한 이방인이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소년의 모습을 한 이방인은 천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요죄 없이 순수한 그 천사의 이름은 '사탄'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사탄이지 사실은 천사라고 생각하려 해도 그의 티 없이 맑은 악함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거금을 건네주어 곤경에 빠지게 하기도 하고, 미래를 보아하니 식물인간으로 살 운명인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당장 죽여버립니다. 비참한 생활을 하며 오래오래 살아갈 사람을 마녀사냥의 희생물로 만들어 얼른 죽게 해주기도 하고요. 

사탄의 행실에 기막혀하면서도 가끔은 그의 말에 뜨끔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같은 거요.



  "아니야. 그것은 인간적인 짓이야. 그런 말로 함부로 짐승을 모욕해서는 안 돼. 짐승들은 그런 모욕을 당할 이유가 없어."

  사탄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너희 너저분한 종족은 항상 거짓말을 일삼고 지키지도 않는 도덕을 요구해. 너희보다 훨씬 우월한 짐승에게 도덕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도덕은 짐승에게만 있어. 어떤 짐승도 잔인한 짓을 하지 않거든. 도덕관념을 가진 사람들이나 잔인한 짓을 일삼고 있지. 짐승은 누군가를 괴롭힐 수는 있지만,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야. 따라서 그것은 죄가 아니지. 짐승들에게 죄는 존재하지도 않아. 그저 즐기려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짐승을 본 적 있니? 아니, 없어. 오직 인간만이 그런 짓을 해. 대체 왜 그럴까? 그것은 똥개 같은 도덕관념 때문이야."

-p.81~82


사탄은 사탄답게 인간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신에게도 몹쓸 말을 합니다. 



"신은 천사들에게는 영원한 행복을 거저 주면서 자식들에게는 스스로 노력해서 행복한 인생을 얻어내라고 해. 천사들에게는 고통 없는 삶을 주면서, 자식들에게는 지독한 불행과 몸과 마음의 병을 주며 저주해. 신은 세상에 지옥을 만들어 놓고, 정의와 자비를 떠들어대지.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는 황금률 운운하면서 일흔 번의 일곱 번씩 남을 용서하라고 해. 신은 또 인간들에게 도덕 운운하면서 정작 자기들의 도덕은 만들지 않았어. 신은 인간의 죄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모든 인간에게 죄를 짓게 했지. 신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인간을 창조했어. 그리고 인간의 근본인 신의 위대한 반열에 세우기는커녕,다른 인간에 대한 책임감으로 질질 끌려다니게 만들었어. 가장 끔찍한 것이 무엇인 줄 알아? 신은 너무나 둔감하여 자기 백성이 이렇게 학대당하는 가엾은 노예인 줄도 모르고 그들에게 자기를 경배하라고 강요한다는 사실이야."

-p.201


사탄의 이런 냉소적인 말들이 소설 중간중간 나타나는데 반박하고 싶은 마음과 그런 것 같기도 하다는 마음이 서로 싸웁니다. 인간이 그렇게까지, 신이 그렇게까지는 아니지 않나, 너무 말이 심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맞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소설이었음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태그를 붙였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돌아보면서 결국 인간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인간 다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표지의 말이 딱 들어맞네요.

'주목할 만한 시선, 인간 존재론적 자기반성의 철학적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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