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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유튜브에서 '낙원의 정복'을 검색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 음악을 들어봅니다. 유진의 MP3에 15번째 곡으로 저장되어 있던, 영화 1492의 OST 입니다. 몇 번이나 돌려 들은 탓에 이젠 이 곡을 들으면 제라르 드빠르디유 대신 유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비가 오는 늦은 밤, 여자의 뒤를 쫓는 건장하고도 용모단정한 청년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유진은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깹니다. 열 살 때쯤 여행지에서 사고로 형과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이후 정신과 의사였던 이모의 권유로 정신 치료를 받으며 약을 먹어오고 있었지만, 그 약이 자신의 정신을 좀먹어들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몰래몰래 약을 먹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은 약을 먹지 않은지 며칠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약을 끊으면 간질발작이 올 것 같지만, 그래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묘한 흥분감이 좋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느낌을 갖기 위해 약을 한다지만 유진은 약을 먹지 않아야 그런 느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약을 끊은 대가로 잃게 된 것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함께 살던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해진의 전화를 받은 후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피투성이인 자신의 모습과 피웅덩이속에누워있는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소설은 우리에게 미스터리를 던져주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뻔한 범인, 예상을 뒤엎는 반전 같은 것도 없습니다. 유진이 범인이었으니까요.
유진은 어렸을 때 반사회적 인격장애, 즉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 레벨이라는 프레데터. 아이의 파괴적인 그림을 본 이모가 내린 진단이었죠. 아이 때는 이런 그림도 그리고 저런 그림도 그리는 건데, 과잉 진단은 아니었을까. 이모가 프레데터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에 단둘 남은 모자가 사랑으로 보듬으며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유진의 시선을 따르며, 유진의 생각을 따라가며 나는 유진이 되었습니다. 유진이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가져보았었고, 실은 범인이 해진인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가져보았습니다. 혹시 약을 끊어서 보이는 환각은 아닌가 하는 조그만 기대도 가져보았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건 없었습니다. 그는 살인자였고, 사이코패스였습니다.
이런 캐릭터에 동화되는 것은 드문 일이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이코패스가 주인공인 소설들도 읽어보았었지만 그에게는 마력에 가까운 매력이 있었기에 이러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빠져들고 말지만, 유진은 그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도 아닙니다. 조용하고, 좀 칙칙하고, 분노를 담뿍 안은, 매력적이기는커녕 싫은 타입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유진이 되었습니다. 그가 되어 집을 둘러봅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피비린내와 찐득거리다 못해 젤리처럼 응고되어버린 피웅덩이. 사람의 몸속에 저렇게 많은 피가 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도살자 같은 내 모습,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아버지의 나이프. 이 나이프로 몇 사람의 목을 베었을까요. 두렵고, 회피하고 싶습니다. 일단 아무도 모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리 방문자가 많을까요.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어머니가 남겨놓은 메모인지, 일기장인지는 가지고 나가서 읽으면 충분할 텐데. 왜 여기서 뭉그적거리고 있는 건지.
종의 기원은 무서운 소설입니다. 내가 그에게 동화되어버리는 것이 무섭습니다.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끈끈한 피가 들러붙어있을 것만 같습니다. 나 자신 속의 악마가 깨어날까 무섭습니다. 유진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내가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