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95년 개봉한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워터 월드>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마리너(케빈 코스트너)는 돌연변이로, 귀 뒤에 아가미가 있었습니다. 극지방의 얼음이 모두 녹아버린 먼 미래의 지구에서 인간들은 수상생활을 했고, 한 줌의 흙이 무척 귀히 여겨졌지요. 발을 디딜 땅이 있다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어딘가에 있을 마른 땅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본 지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마리너의 아가미와 물갈퀴는 사람들에게 '진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배척해야 할 돌연변이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헤켈의 발생반복설까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태아 시절에 아가미가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이냐고요? 혹시 귓바퀴 근처에 뚫은 적도 없는 데 작은 구멍 같은 것이 있는지 거울로 살펴보세요. 이루공이라고 하는, 아가미의 흔적이랍니다. 세계 평균 1%의 사람에게 이루공이 있는데요. 아시아인에게는 4~10%까지 나타난다고 하는군요. 이 정도 확률이라면, 아주 어린 시절 뜻밖의 익사 위험에서 생존 본능적으로 아가미가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을까요? 없다고요?... 그렇죠... 없죠... 하지만 만약에 태아 때부터 닫혀야 할 기관이 닫히지 않고 온존되어 태어났었다면요?


구병모 소설 <아가미>에는 귀 뒤에 아가미가 있는 소년 곤이 등장합니다. 출판사 서평이나 네티즌 리뷰를 보면, 이 아이가 익사 위기에서 물고기의 아가미를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소설을 죽 읽어도 갑자기 가지게 되었다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아가미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아기인 곤이 폭우로 물이 찬 반지하 방에서도 머리만 간신히 내놓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거든요. 아이의 아빠는 얼마 후 생활고에 못 이겨 충동적으로 사장을 죽이고 아이와 함께 자살의 명소, 호수에 빠져 죽습니다. 아이는 강하와 그의 외할아버지 손에 건져져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곤이라는 이름을 얻어 그 집에서 사는데요, 강하의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엄마에게서 태어나 짐처럼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져 자란 강하는 모난 아이입니다. 부모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니 이해하라고 하기엔, 같은 입장인 곤이 너무나 유순하고 착합니다. 강하에게 수시로 얻어맞고 폭언을 당하기 때문에 주눅이 들어 그런 건 아니고 심성이 본디 그러한가 봅니다. 같은 환경에서 한 아이는 패악을 떨었고, 한 아이는 상냥하게 자라났습니다. 그 마음씀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만들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이 아이는 착하고 마음 좋았던 나머지 자신의 비늘을 예쁘다고 말해준 강하의 엄마를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를 구박했던 모난 강하는 곤을 구해냅니다.

이 소설은 삶과 죽음이 계속 교차합니다. 곤이 물속과 뭍을 계속 오갔던 것처럼. 읽는 재미를 위하여 뒷부분은 말씀드리지 않습니다만, 프롤로그에서 곤이 구해주었던 여자도 이들의 사연에 들어와 삶과 죽음의 한 부분이 됩니다.


한 호흡이 긴 문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짧은 문장도 싫어하고요. 뭐 이리 까다롭냐고 하시겠지만, 너무 짧은 문장은 가벼워 보이고, 너무 긴 문장은 읽다가 숨이 찹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어떤 한 문장이 무려 몇 줄이나 되는데도 어색하지 않고 매끄러운 데다가 숨이 차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나에게도 아가미가 있어서 물살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물길을 헤엄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곤 소리 내어 읽어보았지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곤과 강하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읽고선 뭉클해졌습니다. 눈가가 촉촉해지긴 했지만 울진 않았어요. 곤의 이야기는 인어 왕자의 이야기처럼 계속될 것이거든요. 지금쯤 곤은 어디서 헤엄치고 있을까요. 아름다운 비늘을 반짝이면서 말이에요.


北冥有魚. 其名爲鯤. 不知其千里也 化而爲鳥,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徒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이 일 때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곧 천지다. ---장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Z 캠프 사계절 1318 문고 106
김영주 지음 / 사계절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교 폭력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따돌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따돌림이라고 해야 말 그대로 정말 따돌리고 같이 안 노는 것 정도가 보통이었는데요. 당사자의 마음가짐이나 태도로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남자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의 경우엔 말이에요.

사촌 동생과 저는 중학교 1학년 때쯤 따돌림에 가까운 걸 당했습니다. 


여자들은 - 아마도 자연의 섭리로 - 무리를 짓는데요, 어떤 무리에도 들어가지 못하거나 무리에서 방출된 아이들이 따돌림을 당하는 대상이 됩니다. 저야 뭐, 신체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고, 정신 공격이야 무시하면 되니까...라는 태도로 잘 이겨나가서 나중엔 친구도 사귀고 아무튼 그 시기를 잘 넘겼다고 생각하는데, 사촌 동생에게는 문제가 생겼지요. 미리 알았더라면 그까짓 것 무시하라고 이야기를 해줬을 텐데... 아, 아니에요. 나쁜 선택을 한 건 아니에요. 아무튼, 요즘의 왕따는 예전과는 달리 언어, 신체에다가 사이버 폭력이 따라와서 정말 큰 문제입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나가기엔 벅찬 데다가 섣불리 손을 내밀어 주는 친구도 없습니다. 도와주려다간 자기도 괴롭힘을 당할까 봐 무섭거든요. 이런 청소년의 모습이 우리나라나 일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범 세계적인 건가 봐요. 외국 소설을 읽어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걸 보면 말이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왕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도 별로 소용이 없는데요.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포식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정말 짱 세다는 오해를 하고 있는 사춘기의 아이들의 마음가짐은 언제쯤 바로 잡힐까요. 

폭력은 전염성이 강해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기도 하며, 둘 다 아니니 안심하며 권력을 쥔 아이 옆에서 아부하며 가해자가 되기를 자처하기도 합니다. 이런 전염성은 좀비 바이러스를 닮지 않았나요. 좀비에게 물린 피해자가 이내 좀비가 되어 가해자가 되니까 말이에요. 


김영주의 <Z 캠프>는 따돌림에 관한 것을 Z 바이러스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따돌림당하다 죽은 학생은 과연 자살인가, 사고인가, 살해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여 사건과 관련된 아이들이 외딴섬에서 Z 캠프에 참여하게 되는데요. 그들에게서 바이러스가 발명, 좀비 같은 증상을 보이며 서로를 공격합니다. 이미 사람들 사이에 90% 정도 퍼져있다는 바이러스. 이 바이러스는 특별한 조건이 갖춰져 있을 때 발현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 따돌림, 그리고 폭력과 흥분일 겁니다. 

독특하고 영리한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스터리의 느낌도 있고, 아이들 간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들. 설정들이 참신했는데요. 라이트 노벨과도 닮아있어서 청소년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는...

중학생도 코웃음 칠 것 같더군요. 청소년 문고로 나오는 책들의 문제 중 하나는 교훈을 주려 한다는 거라고 늘 생각해왔는데요. 이 책도 교훈 주기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이 책을 통해서 왕따 문제를 생각하고 반성하며 무언가를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마음과 시도는 정말 와 닿았지만, 아이들도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런 점이 아쉬웠습니다. 중후반까지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못된 어른인 저는 꿈도 희망도 뭣도 없이 다 짓밟아 버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굳이 작가가 떠먹여주지 않아도 책을 읽고서 스스로 왕따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거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밤의 제주는 즐거워 - 심야 편의점에서 보고 쓰다
차영민 지음, 어진선 그림 / 새움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의점의 밤은 참 긴장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뉴스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편의점 사건 사고 소식들. 아르바이트생만 있을 때를 노리는 강도도 있고, 기분 나쁘다고 폭행을 하는 손님도 있다는 이야기에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지난달 알바 노조 편의점 모임이 전 현직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들을 대상으로(368명) 설문조사를 했는데요. 무려 67.9%(250명)이 폭언, 폭행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평범하게 들어가 물건을 고르고, 결정 장애 때문에 고르는 시간이 오래 걸리면 아르바이트 생이 서서 대기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미안해하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가 봅니다. 


모두가 잠든 밤, 나무와 돌을 때리는 바람소리와 거친 파도 소리만 들릴 것 같은 애월의 편의점은 어쩐지 낭만적일 것만 같습니다. 뉴스에서 본 진상 손님 같은 건 없을 것 같은데요. 그곳에서 조용히 글을 쓰며 아침 맞을 준비를 하는 소설가 차영민을 상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상상일 뿐. 편의점은 바쁘게 돌아가고, 육지의 여느 편의점 못지않게 별의별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텅 빈 편의점의 포스기 앞에서 글을 쓰는 차영민 작가의 모습은 어느새 지워지고 편의점 유니폼인 조끼를 입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동시에 하는 차알바의 모습이 제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이 책, <달밤의 제주는 즐거워>를 읽고 있노라면요.


저는 제주시에 살고 있는데요. 나름 번화한 곳에 살고 있는데도 한밤중에 편의점에 가는 길은 무척 무섭습니다. 육지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 했던 긴장감을 이곳에서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11시만 넘어도 편의점에 가지 않는데요. 시골인 애월엔 사람들이 오히려 자주 드나드나 봅니다. 저처럼 평범한 손님들도 많을 테지만, 가끔 혹은 자주 등장하는 진상 손님들이 차영민 작가에게 소재를 던져줍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는 거죠. 

떼를 쓰는 취객, 어떻게든 술을 사가려는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 안면을 텄다고 물건을 판매하려는 중견 화가, 단체로 몰려와 당연하게 중국어로 질문하고 대답을 원하는 중국 관광객들,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알바를 도둑 취급하는 손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서 해야 할 육체노동 이외에 견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 정말 대단해요. 얼마나 힘들까요. 느닷없이 일을 관둬서 점장님을 당황케하는 알바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열심히 이런 것들을 견디고 있잖아요. 진상 손님들, 왜 그러는 걸까요?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지위나 신분이 높아지는 건 아닐 텐데, 오히려 자신의 면을 깎는 행동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요? 


차영민 작가의 <달밤의 제주는 즐거워>를 읽다 보면 진상 손님들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하지만, 마냥 우울하거나 답답한 건 아니에요. 특유의 경쾌한 문장으로 자신의 답답한 에피소드도 유머러스하게 서술하거든요. 편의점의 피곤이 어디 손님들로 인한 것뿐이겠습니까. 편의점 알바는 만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척 다양한 일을 하는걸요. 편의점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생각해보셔요. 게다가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밤에 은밀히(?) 진행되고 있어요. 특히 매월 말. 제가 좋아하는 1+1, 2+1 같은 게 적혀있는 프라이스 카드도 교체해야 하고, 현수막 작업도 해야 하죠. 특별 판매하는 물품이 있으면 그것도 세팅해야 합니다.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 게이코라면 기계적으로 척척해내겠지만, 보통의 알바는 그 일이 보통이 아니라고 해요. 하아. 


이런 여러 가지 애환 속에서도 차 작가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지금은 제주시에서 다른 일을 하고 계시지만 당시에는 사장님이었지만 지금은 형이라 부르는 마음씨 좋은 '김 사장'님과 따뜻한 말을 건네며 인사하던 손님, 1+1 의 플러스 원 부분을 주시던 손님 같은 좋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편의점 알바의 희로애락을 유쾌하게 들려주는 <달밤의 제주는 즐거워>를 웃으며 읽다가 문득 눈과 손을 멈추고 나는 어떤 손님이었나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름 나쁘지 않은 손님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노력해 볼까 합니다. 



우리 삶에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그 순간들을 바람처럼 스쳐 지내고 살아간다. 바람은 붙잡을 수 없지만, 난 내 삶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잠시라도 붙잡아두고 싶다. 이 글은 나만의 순간이 아닌 편의점에 함께한 사람들과 지금쯤 어딘가에서 나와 닮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순간이다.

제주도 북서쪽 작은 어촌 마을의 편의점, 바로 그곳에서 삶의 작은 순간들과 마주하며 살아가는 내가 있다.

-p.3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공의 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공의 벌>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5년에 쓴 것으로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과 필요성을 모두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지금은 후쿠시마 원전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1986년 체르노빌 사건 이후 20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와 가깝지 않은, 먼 곳의 이야기로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나라 국민들이야말로 원자력 발전 시스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고민을 해야 했는데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원자력을 자원으로 이용하게 된 것은 원자력 잠수함이 그 시초였는데요. 소량의 물질로도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데 착안, 원자력으로 발전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핵분열 연쇄 반응시 발생하는 열로 물을 끓이고 그 증기로 터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원리인데요. 간단히 말하면 이렇지만, 일반인인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무척 어렵고 복잡한 원리와 장치가 있습니다. 아무튼 2차 대전 이후 원자력은 평화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목소리가 모아졌고, 무기로서의 이용보다 발전 장치 쪽으로 연구를 하게 되어, 많은 발전소가 세워졌습니다. 대다수 정부 기관과 학자들은 거의 무한대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지하자원을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라며 반가워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안정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방사능에 노출되었을 때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더욱 그러했고요. 그러던 중,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섬 원전에서 핵연료가 녹아내리는 멜트 다운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1986년엔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로 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피폭자가 후유증으로 사망합니다. 지금까지도 체르노빌은 죽은 땅이 되어 생명체가 온전하게 살기 힘듭니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미국과 서유럽은 원자력 발전소를 줄여나갔지만, 상대적으로 지하자원이 부족한 일본이나 한국은 오히려 원자력 발전소를 늘렸습니다. 지금도 늘려 나가고 있다는 걸 뉴스를 통해 알고 계시겠지만요. 원자력 발전소는 우리나라 전력 생산량의 30%가량 (총 생산량 중 2위, 1위는 석탄. 39.3%)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지요. 아주 중요한 것을 알고 있지만, 위험도도 높기 때문에 되도록 설치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천공의 벌>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무리 안전에 힘을 써도 완전히 안전하다는 건 없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하자원의 부족과 높은 에너지 사용량을 조절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이 중요한 만큼 관심을 기울이고 안전에 힘써야 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이야기들을 소설 속에 넣길 원했습니다. 자위대의 헬기 빅 B를 탈취해 '신양' 원자력 발전소 위에 띄워놓고 원전 가동을 중지하지 않으면 헬기를 추락시키겠다는 대국민 협박을 하는 테러범의 이야기를 통해서요. 사실 테러범이라고 하기에는 참 순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메시지를 전하길 원했나 봅니다. 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처럼 순리대로 흘러갑니다. 좀 답답했던 점은, 작가가 많은 이야기를 소설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다 보니 - 사회파 소설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 이야기가 지나치게 전문적입니다.
다른 작가의 소설에서도 작가가 소설을 쓰기 위해 취재하고, 연구한 내용들을 버리기 아까워 독자들에게 모두 알려주려 하다 보니 내용이 늘어지거나 피곤해지는 경향이 종종 있는데요. 이번 히가시노 게이고의 <천공의 벌>에서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전문적인 군더더기가 많아요. 피곤해서 대충 읽었지만, 제대로 읽었다면 원자력 발전소의 가동 원리 및 냉각 원리, 시설, 조직 체계 등등에 대해 모두 공부할 뻔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나름 나쁘지는 않겠지만, 소설을 읽고 싶어 책을 집어 든 독자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니, 제 입장에서는 차라리 과학기술 서적을 읽을 걸 그랬나 하는 회의가 들더군요. 정 보이드 반응도라거나 음 보이드 반응도라거나 고속 증식로가 어쩌구, 냉각재인 액체 나트륨이 어쩌구... 등등... 너무 깊이 들어 간 것 같아요.
다만, 원자력 발전에 대해 장단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좋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한국 원자력 연구원' 홈페이지에 방문도 해보고...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원했던 건 그런 건지도 모릅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두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소설을 읽고,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주길 바랐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 왕국 속 눈의 여왕 영상 속 문학 읽기 시리즈 2
신경범 지음 / 산호와진주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이거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지만, '겨울 왕국'은 간첩도 알 겁니다. 어린아이들조차 'Let it go'를 이상한 옹알이로 부르며 뛰어다니니까요. 뿐인가요, 엘사 풍의 원피스, 인형, 피규어들이 엄청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2014년 1월에 개봉했던 애니메이션인데도 아직까지 그 인기를 유지하고 있으니 성공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부모님들이 '겨울 왕국'의 모티브가 된 '눈의 여왕' 이야기를 함께 전해주셨으면 좋을 텐데, 그랬다면 아이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읽고 또 다른 - 아니 어쩌면 비슷한 - 감동을 느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깨닫는 것이지만, 현대 이전의 동화는 다소 잔인한 면이 있습니다. 꿈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가혹한 심리적, 육체적 학대 속으로 빠집니다. 어리거나 여린 주인공이 이겨나가기 힘든 고난과 마주칩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일을 일상으로 여길 만큼 험난하게 살았던 걸까요. 아니면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가 있어 주인공을 사지로 몰아넣는 걸까요.

장난꾸러기 악마가 놓쳐 깨져버린 거울의 파편이 눈에 박혀 차가운 마음을 갖게 된 소년 카이가 눈의 여왕에게 납치당한 후, 카이를 되찾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 겔다가 <눈의 여왕>에 등장합니다. <겨울 왕국>에서도 안나가 언니의 마음을 되찾기 위해 고생하지만 겔다의 고생에 비할 바가 아니죠. 겔다가 산적의 딸의 도움을 받았다면, 안나는 크리스토프와 올라프의 도움을 받는데요. 어쨌든 결국 결정은 자기 자신. 카이의, 엘사의 마음을 녹이는 건 그녀들의 몫입니다. 

<겨울 왕국 속 눈의 여왕>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를 가지고 산다. '내 안에 존재하는 자아'와 '밖으로 표출되는 자아'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일생을 살면서, 세상 속에서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조화롭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엘사가 만든 눈사람, 올라프는 이렇게 말한다. "뜨거움, 차가움, 양쪽 다 중요하지. 둘이 같이 있는 게 맞는 거잖아!"라고 말이다.
-p.37

단순한 개그 캐릭터라고 생각했던 올라프가 가장 현명해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 내면의 양면성을 인정하고 인정한다면 좀 더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사실 올라프가 저렇게 말했을 때는 몰랐어요. 이렇게 깊은 대사인 줄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캐릭터 분석과 더불어 애니메이션과 동화를 연결 지어 깊이 있게 설명해주는 이 책을 읽기 전엔 말이에요. 책을 읽어가면서 장면이나 대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책이 좋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해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