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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95년 개봉한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워터 월드>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마리너(케빈 코스트너)는 돌연변이로, 귀 뒤에 아가미가 있었습니다. 극지방의 얼음이 모두 녹아버린 먼 미래의 지구에서 인간들은 수상생활을 했고, 한 줌의 흙이 무척 귀히 여겨졌지요. 발을 디딜 땅이 있다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어딘가에 있을 마른 땅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본 지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마리너의 아가미와 물갈퀴는 사람들에게 '진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배척해야 할 돌연변이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헤켈의 발생반복설까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태아 시절에 아가미가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이냐고요? 혹시 귓바퀴 근처에 뚫은 적도 없는 데 작은 구멍 같은 것이 있는지 거울로 살펴보세요. 이루공이라고 하는, 아가미의 흔적이랍니다. 세계 평균 1%의 사람에게 이루공이 있는데요. 아시아인에게는 4~10%까지 나타난다고 하는군요. 이 정도 확률이라면, 아주 어린 시절 뜻밖의 익사 위험에서 생존 본능적으로 아가미가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을까요? 없다고요?... 그렇죠... 없죠... 하지만 만약에 태아 때부터 닫혀야 할 기관이 닫히지 않고 온존되어 태어났었다면요?
구병모 소설 <아가미>에는 귀 뒤에 아가미가 있는 소년 곤이 등장합니다. 출판사 서평이나 네티즌 리뷰를 보면, 이 아이가 익사 위기에서 물고기의 아가미를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소설을 죽 읽어도 갑자기 가지게 되었다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아가미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아기인 곤이 폭우로 물이 찬 반지하 방에서도 머리만 간신히 내놓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거든요. 아이의 아빠는 얼마 후 생활고에 못 이겨 충동적으로 사장을 죽이고 아이와 함께 자살의 명소, 호수에 빠져 죽습니다. 아이는 강하와 그의 외할아버지 손에 건져져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곤이라는 이름을 얻어 그 집에서 사는데요, 강하의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엄마에게서 태어나 짐처럼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져 자란 강하는 모난 아이입니다. 부모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니 이해하라고 하기엔, 같은 입장인 곤이 너무나 유순하고 착합니다. 강하에게 수시로 얻어맞고 폭언을 당하기 때문에 주눅이 들어 그런 건 아니고 심성이 본디 그러한가 봅니다. 같은 환경에서 한 아이는 패악을 떨었고, 한 아이는 상냥하게 자라났습니다. 그 마음씀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만들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이 아이는 착하고 마음 좋았던 나머지 자신의 비늘을 예쁘다고 말해준 강하의 엄마를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를 구박했던 모난 강하는 곤을 구해냅니다.
이 소설은 삶과 죽음이 계속 교차합니다. 곤이 물속과 뭍을 계속 오갔던 것처럼. 읽는 재미를 위하여 뒷부분은 말씀드리지 않습니다만, 프롤로그에서 곤이 구해주었던 여자도 이들의 사연에 들어와 삶과 죽음의 한 부분이 됩니다.
한 호흡이 긴 문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짧은 문장도 싫어하고요. 뭐 이리 까다롭냐고 하시겠지만, 너무 짧은 문장은 가벼워 보이고, 너무 긴 문장은 읽다가 숨이 찹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어떤 한 문장이 무려 몇 줄이나 되는데도 어색하지 않고 매끄러운 데다가 숨이 차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나에게도 아가미가 있어서 물살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물길을 헤엄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곤 소리 내어 읽어보았지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곤과 강하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읽고선 뭉클해졌습니다. 눈가가 촉촉해지긴 했지만 울진 않았어요. 곤의 이야기는 인어 왕자의 이야기처럼 계속될 것이거든요. 지금쯤 곤은 어디서 헤엄치고 있을까요. 아름다운 비늘을 반짝이면서 말이에요.
北冥有魚. 其名爲鯤. 不知其千里也 化而爲鳥,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徒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이 일 때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곧 천지다. ---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