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비주얼 노블 1
NEW(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지음, 주)영화사 레드피터 제작, 연상호 감독, 박주석 각본 / artePOP(아르테팝)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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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물을 좋아하는 저는, 지난여름 <부산행>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여운에 빠져있었는데요. 아르테 출판사에서 <부산행> 소설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귀요미 마동석 때문에 이 책을 살까 말까 망설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소설로서의 가치보다는 어쩐지 화보집을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지 않기로 결정했었습니다. 서점에서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좀비 덕후 및 전문가로 유명하신 정명섭 작가님께서 이 책이 영화와는 다른 맛이 있다면서 추천하시더군요. 그리하여 작가님을 믿고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묵혀두었었죠. <더 좀비스>를 읽고 있노라니 <부산행>을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고, 지금이 이 책을 읽을 적기라고 판단, 꺼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스토리는 거의 모든 분들이 아시다시피, 네. 그 내용입니다. 펀드매니저 석우가 딸 수안이를 데리고 별거 중인 아내를 만나러 가기 위해 부산행 열차에 오릅니다. 이미 괴 바이러스가 - 아마도 인수 공통 전염병원인 - 퍼져 나가고 있었는데요. 열차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거나 가벼이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발차 후 가출 소녀로부터 시작된 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사람에게 전염되어 열차는 온통 좀비 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석우는 수안이를 지켜내어 무사히 부산까지 가야하고, 상화도 임신한 아내 성경을 지키고 싶습니다. 원래부터 강했던 남자 상화와 딸을 위해 강해진 남자 석우의 활약이 돋보이는 소설이었습니다. 

이 부산행이라는 영화는 감독의 말에 의하면 석우(공유)의 가족 외엔 열차의 승객에게 설정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배우는 나름대로의 설정을 가지고 감정선을 이어나갔고, 관객들 역시 그들의 사연을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면서 각 조연들의 행동을 100%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째서 저 사람은 저렇게 이기적이고 자기만 살려고 할까, 어째서 저 할머니는 문을 열어주었을까.... 그런 것들 말이죠. 소설 <부산행>에서는 등장인물의 설정이 서술되어 있었기에 그들 행동의 당위성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었구나, 납득할 수 있었죠. 석우가 남보다 가정, 겉보기엔 가정보다 돈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습니다. 임산부인 성경이 어쩜 저렇게 잘 달리는가 하는 관객들의 의아함도 풀어주었습니다. 책을 통해 영화의 완성도가 더 깊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각 장면의 영상과 사운드가 지원되는 듯, 무척 생생하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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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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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취학 아동일 적에, 그러니까 일곱 살 때 외할머니 댁에서 얼마간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빠는 제주에서 장사를 시작하려고 이것저것 준비 중이셨고, 엄마랑 동생, 그리고 제가 들어가서 살게 되었던 건데요.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인원이 한 집에 살았습니다. 외갓집이라지만 시골의 마당 있는 정겨운 집이 아니었고, 어려서 몇 평인지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30평 남짓 되는 주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방이 세 개 있고 거실 주방이 별도로 되어 있는 옛날식 주택이었는데요. 그곳에서 저희 셋과 외할머니, 그리고 이모 두 명, 외삼촌까지 함께 살았습니다. 방학 때는 지방의 이모도 올라오셨구요. 외할아버지가 함께 계셨던 기억이 없는데요. 공무원이셨기에 다른 지방에 발령 나서 근무하고 계셨나 봅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집에 살았을까요? 많은 인원이 한 집에 살아서 그랬는지 몰라도(1인당 필요한 필수 공간은 5평이라고 하던데요.) 외삼촌은 가출을 자주 했습니다. 저는 외삼촌이 가출하면 무척 신났습니다. 아예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고등학생이었던 외삼촌은 집에 오는 일이 별로 없을 정도였는데요. 집에만 오면 이모랑 싸워서 무서웠습니다. 한 번은 이모가 방으로 도망치고선 문을 잠갔는데요. 외삼촌이 분에 못 이겨서 문을 한 대 쳤습니다. 어이쿠, 문에 커다란 주먹 자국이 남았어요. 하지만 정말로 이모를 때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외할머니가 무척 엄하신 분이라서 아무리 아들아 오구오구 하더라도 누나를 때리는 것까지 예뻐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자라면서 알았는데, 그때 외삼촌은 복싱 선수였고, 가출한 것이 아니라 합숙 훈련을 하고 시합에 나갔던 모양입니다. 저는 이모들이 장난으로 하는 말만 듣고선 정말 그런 줄 알았지 뭐예요.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난 외삼촌은 무척 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무시무시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커다란 곰돌이 아저씨가 되어 있었어요. 한때는 볼링을 기술이 아니라 힘으로 제압했던 멋진 오빠였는데요. 


도선우의 <스파링>을 읽다 보니 외삼촌 생각이 났습니다. 평탄한 인생길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만은 외삼촌은 복서로서의 인생을 끝낸 후,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이라고 쓰고 사고를 치다라고 읽습니다) 지금은 효자로 살고 있는데요. 잃을 것들을 잃고 나니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생각해도 좋을는지, 외삼촌을 뵌 지 아주 오래된 나이 먹은 조카가 지레 짐작해봅니다. 왜냐하면, 설날이니까요. 


<스파링>의 장태주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 불행하게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려다 보니, 그 표현이 맞는 건지 망설입니다. 독특하게 태어났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병원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공중 화장실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엄마는 아이를 자신이 키우겠노라고 선언하고 태주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키우다가 결국 포기했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작중 화자가 태주 자신이니까요. 엄마가 왜 버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보육원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왕따가 되었습니다. 그게 어떤 건지 저는 압니다. 중학교 때 보육원에서 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있었거든요. 엄마가 있는데, 외삼촌도 있는데 그 친구는 가난 때문에 보육원에서 살아야 했고, 학대를 당했습니다. 지급받은 볼펜 한 자루를 잃어버렸다고 철제 앵글로 맞은 다음날 등교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 애는 저 말고도 몇몇의 친구가 더 있었기에 그래도 학교에 오는 게 즐겁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태주에게는 아무도 없었어요. 같잖은 어른의 되먹지 못한 사상이 옮아 있는, 소위 있는 집 아들이 태주가 좋아하던 새를 괴롭히던 날까지는 그랬지요. 그날 태주는 자신에게 잠재 되어 있는 동체 시력과 펀치력을 봉인 해제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습니다만, 중학교 진학 후 또 사건에 휘말려 이번엔 소년원에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만난 담임 덕분에 복서의 길을 걷게 되고, 작은 가정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드디어 오롯이 자기 것이 있는 생활을 하고, 목표가 있는 삶을 살게 되는데요.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이 그의 행보도 늘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소설은 참 희한합니다.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소설이 있는데요. 읽기 버거운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대개 초반이 힘들고 그 고비를 넘기면 후반이 편해지는데 (아예 끝까지 버거워 진을 빼기도 하지만요.) 이 소설은 그 반대에요. 초반의 소년 장태주의 이야기는 정말 술술, 읽다가 쉬기가 아까울 정도로 잘 넘어가요. 태주의 심리에 동화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복서 인생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가 좀 힘들어집니다. 태주랑 함께 로드워크를 해야 해요. 잠깐 멈춰 서 섀도복싱도 해야 하고요. 좀 쉬어볼까 싶은데 그러면 아예 퍼져버릴까 봐 굳게 마음을 먹고 끝까지 달립니다. 그래서 결국 다 읽어냈어요. 만세!

또 하나, 문체나 흐름의 분위기가 절반, 아까 말한 복서가 될 때쯤부터 달라집니다. 아니 이게 뭐지, 초반의 편안하고 수려함은 어디로 간 거야. 심지어 마주 보는 두 쪽에서 '~데, ~다.'라는 식의 문장 구성이 네댓 번이나 나와서 당황스러웠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퇴고를 하다가 시간이 부족했나 싶었다니까요...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심사 위원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이미 했네요? 

초반의 태주 소년 때문에 그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려고 끝까지 읽어낸 기분입니다....라는 식의 이야기도 했네...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에 공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습니다. 스토리는 참, 흔해요. 흔합니다. 무지하게 뭘 막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방식입니다. 알았다고, 그만 말하라고. 뿐만 아니라 방금 위에서 말한 것처럼 뭔가 좀 그래요. 격정적인 클라이맥스가 없고 넘실넘실 파도가 치는 것 같아요. 눈물을 흘려야 하는 부분에서도 안구는 뻑뻑, 어휴. 얘 이제 어떡하냐... 하는 정도의 감정이었습니다. 뭐야. 이런 소설.

제일 분한 건 뭐냐 하면요. 

그런데도 재미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화가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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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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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영화 <마터스:천국을 보는 눈(2008)>을 들먹이지 않아도, 사후 세계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겁이 나서 실제로 영화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많은 분들의 리뷰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사후 세계가 궁금해서 사람들을 극단적인 상태로 몰아가는 고어 영화라고 하더군요. 사람들은 어째서 사후 세계가 궁금한 걸까요? 먼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간 선배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자신이 갈 곳에 대해 예습하려는 태도인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마, 순수한 탐구정신 때문인 건 아닐 테지요. 점집에 가서 미래를 알아보고 대처하려는 것과 비슷한 마음으로 궁금해하는 거라면, 어차피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도 언젠가는 그곳으로 가게 될 테니 애써 미리 알려고 하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요. 스스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되어 저 너머엔 천국이 있을 수도 있고, 지옥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도 좋을 테지요. 뚜껑을 열기까지 그냥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있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왕이면, 천국이나 천당, heaven, 극락에 가기 위해 살아있을 때 착하게 살아두는 것도 좋고, 저승 곳간을 채워두는 것도 좋겠습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앞으로 갈 곳에 대한 궁금증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나온 곳에 대한 고찰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 자신만의 역사도 좋지만, 생명이라는 것의 탄생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기독교적 시각으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고, 흙으로 남자를 빚어 숨을 불어넣었으며 갈비뼈 하나를 취해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46억 년 전 원시 지구의 카오스에서 가까스로 대기와 바다로 분리되고 대기 중의 무기물들이 태양열이나 자외선 등에 의해 유기물로 합성되고 비와 함께 바다에 도착한 녀석들이 다시 합성되기 시작해 복잡한 유기물에서 원시 생명체로 진화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참 매력적입니다. 유기물 수프인 바다에 번개가 번쩍! 그리고 코아세르베이트가 생겨나고 오랜,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인간에까지 이르다니. 그 과정에 신의 손길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모르는 것 투성입니다. 지금은 예전보다는 많은 것들이 과학적으로 밝혀졌지만, 처음의 발견자들은 신성 모독일 수도 있는 것들에 두려워하면서도 그 마력에 마음을 뺏겼겠지요. 현재의 우리도 비슷합니다. 여전히 바벨탑을 쌓고, 생명 창조를 꿈꾸는 우리들은 언제 신에게 미움을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신께서 너희들이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구나 대견하도다... 하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스티븐 킹의 <리바이벌>을 읽고 나서 쓰는 글 치고는 이야기가 산으로 가다 못해 저세상까지 가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어안이 벙벙했거든요.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물론 소설이므로 많은 부분이 허구겠지요. 전체가 다 허구였으면 좋겠는데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음악 이야기라거나 기독교 금서에 관한 부분들이 사실인 관계로, 실제로 있었던 사실에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펜이 가상의 인물들을 만들어 내어 첨가 한 것 같습니다. 

<리바이벌>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드 베르미스 미스테리스'에 대한 것을 찾아보았는데요. 1542년 연금술사인 루드비히 프린에 의해 쓰인 라틴어판 책이라고 합니다. 그나마도 원저자가 아니라 십자군 원정 때 누군가로부터 훔친 책을, 이단 심문에 회부되어 투옥하던 중에 라틴어로 저술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예언, 강령술, 강신술에 대한 내용,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고 하니 어쩐지 이 소설 속의 일들도, 이런 위험한 방법으로 시도해 본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테죠.

18세기 갈바니의 개구리 전기 충격 실험과는 다르겠지만 M.W.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보면 죽은 자를 살려내는 방법이 등장하는데, <리바이벌>에서와의 의도는 다르지만 어쨌든 전기를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합니다. 인체에 전류를 흘려보냄으로써 약물 중독이나 두통뿐만 아니라 만병을 통치할 수 있었지만, 간헐적으로(몇 년마다 한 번씩이었지만) 나타나는 끔찍한 후유증은 치료받은 자들을 견딜 수 없게 했습니다. 


부흥회 같은 걸 정말로 싫어하는 저는 결단코 가지 않습니다만, 치유의 기적을 보여주는 부흥회니 목사 안수 기도니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정말로 치유의 성령이 내려오시겠지만, 소설 속 제이컵스 목사의 치료는 그런 것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실로암 기적처럼, 바울의 앉은뱅이(표현 죄송합니다만 성경에 그리되어 있으므로) 치유 기적처럼, 암까지 치유하는 제이컵스 목사의 부흥회는 정말로 대단했지만, 실은 제이컵스 목사가 신을 저주하고 있다는걸, 주인공인 제이미는 압니다. 여섯 살 때 그를 처음 만난 이후로 제이미는 제이컵스 목사를 잘 알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목사라고 불러서는 안되다는걸요. 다정하고 전기 다루기를 좋아했던 제이컵스 목사가 불운한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고 나서 좌절했고, 대중들 앞에서 신을 모독하는 연설을 한 후 마을에서 사라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약물 중독자가 된 제이미는 제이컵스를 다시 만났고, 그는 이제 목사가 아닌 찰스 아저씨였습니다. 찰스는 제이미가 어렸을 때 콘 형의 병을 고쳐주었던 것처럼 전기를 이용해 약물 중독을 고쳐주지만, 후유증이 있었습니다. 아주 고통스러운. 찰스와 제이미가 헤어져 다시 만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목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부흥회 목사가요. 하지만, 제이미는 그가 진정한 의미의 목사가 아니라는 걸 압니다. 그의 치유의 기적이 진화했고,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걸 싫어한다는 것도 알아챕니다. 그렇다면, 그의 진짜 목적은 무얼까요. 


이 책은 표지도 그렇고 띠지도 그렇고, 어쩐지 공포 소설일 것만 같습니다. 제 리뷰를 읽으신 분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요. 그래서 덧붙이려고요. 공포 소설로 읽으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공포스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닙니다. 혹시 스티븐 킹의 <조이 랜드>를 읽으셨나요? 그렇다면 그런 소설이구나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안 읽으셨다면 읽어보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리바이벌>의 찰스 제이컵스가 <조이 랜드>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 110페이지까지 뒤적이다가 찾기를 포기했지만, 등장했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 찰스 제이컵스가 제이미에게 한 말이니까 '조이 랜드'에 있었던 건 맞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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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 세계의 전쟁이 만들어낸 소울푸드와 정크푸드
윤덕노 지음 / 더난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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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인류가 생겨나면서부터 늘 함께 해왔고,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가끔 잊어버리는 분들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휴전 국가이고요. 한라산이 휴화산이라고 해서 언제 분출할지 모른다며 벌벌 떠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휴전 국가라고 해서 전쟁이 일어날까 봐 늘 두려워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겁니다. -북한의 도발이 있을 때면 혹시 전쟁이 나는 건 아닐까 불안하긴 하지만요. - 심지어 전쟁 때문에 탄생하거나 널리 보급된 음식들을 즐기면서도 전쟁을 연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그것들의 탄생 배경을 몰랐기 때문이죠. 저 역시 그렇고요.


병조림이라거나 통조림 같은 것이 전쟁시 보급과 보존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발명되었다는 건 상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이라는 책을 읽고선 이렇게나 많은 음식들이 전쟁 중에 개발되어 군인의, 민간의 식량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어쩌다 간식으로 튀기듯이 볶아 계피 설탕을 뿌려 먹는 건빵도, 뽀빠이 과자에 안 들어 있으면 섭섭한 별사탕도 전투 식량으로 일본에서 개발하거나 보급했다는 것도 흥미로웠고, 커피 믹스를 상업화 한 사람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과 이름이 같은 조지 워싱턴이라는 사실도, M&M 초콜릿이 전투 식량으로 사용된 이야기도 모두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백과사전 식의 단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윤덕노라는 작가의 스토리텔링 기법이 당시의 풍경과 상황을 생생하게 상상하게 해, 더욱 이야기 속에 푹 빠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음식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이유, 그리고 웃지 못할 에피소드 같은 것들이 독자를 심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깔깔거리며 웃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정말이지 소시지 전투 이야기 때는 너무 웃겨서 옆에서 공부하는 딸을 붙잡고 손발을 써가며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니까요. 이런 것들이 작가의 글재주가 아니라면 그저 굶주린 소련 1개 대대가 100여 명의 핀란드 병사에게 역습당한 사실일 뿐이었을 겁니다.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할 때 지나친 채색을 하여 왜곡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적당한 스토리텔링은 듣는 이로 하여금 몰입을 좋게 하여 기억에 도움을 줍니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 책은 음식에 관한 미시사 책으로서 무척 흥미롭고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4년 전쯤 저자의 다른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장모님은 왜 씨암탉을 잡아주실까?>라는 책이었는데요. 그때도 음식의 유래나 어떤 날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주어 기뻤더랬습니다. 지금은 절판되어 나오지 않고 있지만,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를 재미있게 읽으신 분이라면, 도서관에서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과 더불어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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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린 데 자긴 싫고
장혜현 지음 / 까레드볼륨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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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사랑 이딴 거에 이렇게 감정을 소모하고 지쳐버리는 모습이라니. 뭐, 그것도 한때일 테지, 참 좋을 때다.'라며 시큰둥한 태도로 한 장 한 장을 넘겨갔습니다. 뭐 그런 거에 목숨을 거나 싶고, 남자가 떠나면 쿨하게 마음 정리하면 그만이지. 그렇게까지 힘든 일인가 싶기도 하고. 아마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본 거야. 이 음악이 내 음악 같고, 이 드라마가 내 이야기 같겠지. 사랑할 땐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도는 것 같다가 이별하면 그 세상이 다 깨져버린 것 같겠지. 그래, 나도 책에 감정을 이입해보자. 스비리도프의 '눈보라'중 올드 로망스를 들으며 읽으면 나아지... 긴 뭐가 나아져. 음악을 들으며 엿보는 남의 사랑 후유증 같은 거 전혀 와닫지 않아!...라고 생각했는데...

블루와 그레이로 가득 차 있는 작가 정혜현(실례가 안 된다면 이하 그녀라고 하겠습니다.) 의 여행 사진들을 보며 어떤 의무감 비슷한 기분으로 책을 읽어가다 보니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 역시 그랬던 때가 있었어요.


애정 결핍 비슷한 것 때문에 중학생 때부터 우정 이상의 감정으로 고생한 적도 있었고, 동경 이상의 감정을 사랑이라 오해 한 적도 있었고, 본격 연애에서는 밀당을 하지 못하는 마냥 착한 여자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게 점점 독이 되어 차올라 이별도 했었지만 이별 후 힘들었던 것보다 사랑하는 동안이 더 힘들었기에 '사랑=독'이라는 공식이 각인되어 버렸고, 어느 날 죽을 것 같은 슬픔에 가슴을 치며 가까스로 숨통을 열며 울부짖던 날, 저의 이성을 향한 사랑은 모두 소사(燒死)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들이 죽기 이전의 세상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 패럴렐 월드의 나에게 말을 걸고 싶지만, 그건 그대로 놔두는 것이 낫겠죠. 슬기롭게 나 자신을 찾아 당당하게 서는 나도 있을 테고,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히키코모리로 전락하는 나도 있을 테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나도 있을 테지만, 그건 모두 그 세계의 나 자신이기에 타인인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냥, 그렇게 놔두기로 합니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 외로움을 더 깊게 만드는 건 그녀의 어떤 의식 같은 거겠죠. 헤어진 후엔 미련을 갖지 않는 나 같은 스타일이 아닌 그녀는 그를 사랑했던 에너지를 모두 태워버릴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그렇게 낯선 곳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남아있던 한 조각까지 모두 소멸 시켜 텅 빈 방이 되어야 새로운 사랑을 그 안에 담을 수 있을 거예요.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있는 남자의 가슴과는 달리 여자에게는 방이 하나뿐이라는, 그런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요. 이별 전이되었든, 이별 후가 되었든 그녀에게도, 저에게도 그 방을 깨끗하게 비워 낼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처음엔 블루나 그레이의 느낌이 강했던 사진이 뒤로 갈수록 형형 색색의 컬러감이 생겨나며, 더불어 그녀의 사랑과 이별과 여행이 성숙해져 갑니다. 순수의 부재에 마음이 어긋 거린다(p.150)고 하지만 지나치게 순수하고 지나치게 열정적인 건 소모적인 일이기에 잔잔한 사랑이 낫다고 생각하는 그야말로 재미없는 '나'라는 사람으로서는 지금에야말로 그녀가 사랑을 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의 말라비틀어진 감정은 돌아보지 않는 주제에 감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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