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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린 데 자긴 싫고
장혜현 지음 / 까레드볼륨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로맨스, 사랑 이딴 거에 이렇게 감정을 소모하고 지쳐버리는 모습이라니. 뭐, 그것도 한때일 테지, 참 좋을 때다.'라며 시큰둥한 태도로 한 장 한 장을 넘겨갔습니다. 뭐 그런 거에 목숨을 거나 싶고, 남자가 떠나면 쿨하게 마음 정리하면 그만이지. 그렇게까지 힘든 일인가 싶기도 하고. 아마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본 거야. 이 음악이 내 음악 같고, 이 드라마가 내 이야기 같겠지. 사랑할 땐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도는 것 같다가 이별하면 그 세상이 다 깨져버린 것 같겠지. 그래, 나도 책에 감정을 이입해보자. 스비리도프의 '눈보라'중 올드 로망스를 들으며 읽으면 나아지... 긴 뭐가 나아져. 음악을 들으며 엿보는 남의 사랑 후유증 같은 거 전혀 와닫지 않아!...라고 생각했는데...
블루와 그레이로 가득 차 있는 작가 정혜현(실례가 안 된다면 이하 그녀라고 하겠습니다.) 의 여행 사진들을 보며 어떤 의무감 비슷한 기분으로 책을 읽어가다 보니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 역시 그랬던 때가 있었어요.
애정 결핍 비슷한 것 때문에 중학생 때부터 우정 이상의 감정으로 고생한 적도 있었고, 동경 이상의 감정을 사랑이라 오해 한 적도 있었고, 본격 연애에서는 밀당을 하지 못하는 마냥 착한 여자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게 점점 독이 되어 차올라 이별도 했었지만 이별 후 힘들었던 것보다 사랑하는 동안이 더 힘들었기에 '사랑=독'이라는 공식이 각인되어 버렸고, 어느 날 죽을 것 같은 슬픔에 가슴을 치며 가까스로 숨통을 열며 울부짖던 날, 저의 이성을 향한 사랑은 모두 소사(燒死)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들이 죽기 이전의 세상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 패럴렐 월드의 나에게 말을 걸고 싶지만, 그건 그대로 놔두는 것이 낫겠죠. 슬기롭게 나 자신을 찾아 당당하게 서는 나도 있을 테고,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히키코모리로 전락하는 나도 있을 테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나도 있을 테지만, 그건 모두 그 세계의 나 자신이기에 타인인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냥, 그렇게 놔두기로 합니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 외로움을 더 깊게 만드는 건 그녀의 어떤 의식 같은 거겠죠. 헤어진 후엔 미련을 갖지 않는 나 같은 스타일이 아닌 그녀는 그를 사랑했던 에너지를 모두 태워버릴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그렇게 낯선 곳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남아있던 한 조각까지 모두 소멸 시켜 텅 빈 방이 되어야 새로운 사랑을 그 안에 담을 수 있을 거예요.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있는 남자의 가슴과는 달리 여자에게는 방이 하나뿐이라는, 그런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요. 이별 전이되었든, 이별 후가 되었든 그녀에게도, 저에게도 그 방을 깨끗하게 비워 낼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처음엔 블루나 그레이의 느낌이 강했던 사진이 뒤로 갈수록 형형 색색의 컬러감이 생겨나며, 더불어 그녀의 사랑과 이별과 여행이 성숙해져 갑니다. 순수의 부재에 마음이 어긋 거린다(p.150)고 하지만 지나치게 순수하고 지나치게 열정적인 건 소모적인 일이기에 잔잔한 사랑이 낫다고 생각하는 그야말로 재미없는 '나'라는 사람으로서는 지금에야말로 그녀가 사랑을 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의 말라비틀어진 감정은 돌아보지 않는 주제에 감히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