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머니 밀리언셀러 클럽 148
로스 맥도날드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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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시작은 치정이었습니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데 아무래도 수상하다며 조사를 부탁했습니다. 참 이상하죠. 남자들은 왜 나랑 헤어지는 건 괜찮지만 그놈만은 안된다고 말하는지. 어느 정도의 자존심을 지키며 그녀가 떠나는 걸 막고 싶어서 그런 대사를 하는 건가 싶지만, 피터 제이미슨에겐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렴 어때요. 탐정 루 아처의 입장에서는 피터의 약혼녀 버지니아를 유혹한 마텔이라는 자칭 프랑스인의 뒷조사를 하고 그의 정체에 관한 것만 알려주면 되는걸요. 


지적인데다가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돈도 많은 마텔이 뭐가 부족해서 (사실은) 부유하지도 않은 버지니아를 꾀어 낼까요. 물론 그 지역 최고의 미인이라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경우엔 오히려 반대가 아닌가요? 미모를 무기로.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담배연기 뿜어내는 하드보일드 소설에서는, 특히 좀 오래전 배경의 스토리에서는 그럴 것 같은데요. 모든 건 잘 조사하고 캐어내 보아야 알 수 있는 법. <블랙 머니>의 루 아처는 마텔의 정체를 캐기 위해 여러 사람과 접촉합니다. 심지어 그가 정말로 지적인 프랑스인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그 방면의 권위자인 대학교수에게 기출문제까지 부탁했는데요. 마텔은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피터의 질투심으로 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습니다. 희한하게 7년 전에 바다로 걸어들어가 자살해버린 버지니아의 아버지 로이 문제랑 자주 마주치더란 말입니다. 마텔의 정체를 캐는 것도 중요하지만 - 아처의 생계가 달렸으니까요 - 자꾸만 따라붙은  로이의 죽음도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사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아 무언가 손에 잡힐 것 같은 순간, 마텔을 추적하던 또 한 명 헨리가 부상당한 채로 발견되고, 버지니아의 엄마가 살해당합니다. 도대체 이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게 무엇이기에 평범한 애정문제인 줄 알았던 사건이 이렇게 커져버렸을까요. 마텔이 들고 있던 바로 그 '돈'때문이었을까요.


아마 돈 문제가 맞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목이 <블랙 머니>일리 가요. 아시겠지만 블랙 머니는 음성적으로 유통되는 돈을 말하는데요. 금융 실명제를 하고 있음에도 본인 명의가 아닌 통장 개설을 할 수 있다는 걸 얼마 전에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뭘 위한 금융 실명제인가 싶어요. 우리 같은 일반인은 통장 하나 만들려면  근거 자료를 가지고 가야 개설할 수 있는 거 아시나요? 관리비 이체용이면 고지서, 스쿨뱅킹 용이 면 고지서, 청구서 이런 걸 가지고 가야 해요. 그렇지만 뭔가 뒷배가 있는 사람은, 만들더군요. 지점장하고 호형호제하는 사이면 발급되나 봅니다. 뉴스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들려올 땐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지금도 그런데 1960년대에는 어땠을까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블랙머니가 잘 돌아다니고 있었겠죠. 돈 세탁을 거치면서 말이에요. 우리나라가 보통 정치 경제 비자금이나 금융범죄자금을 합법 자금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라면, 서구에서는 무기, 마약 밀매 자금 같은 것이 세탁된다고 하는데요. 그 규모가 보통이 아닐 것 같습니다. 돈 세탁이라는 말은 재미있게도 알 카포네의 범죄 자금을 세탁소에서 합법 자금으로 전환시켰다는 데에서 왔다고 하는데요. 이 소설에서는 과연 블랙 머니를 어디서 세탁했을까요. 1920년대 알 카포네의 시대가 아니니 세탁소는 아니겠죠. 힌트를 드릴까요? 버지니아의 아버지 로이는 마텔 등장 7년 전에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속 빈 강정으로 잠시 세상에 머무르다 죽었는데, 로이의 아내이자 버지니아의 엄마인 마리에타의 말을 빌리자면, 친척이 물려준 유산이나 팔 수 있는 집이나 땅이 예전엔 있었지만 18년 결혼 생활 동안 거의 100만 달러를 날려먹고 - 600만 불에 사이보그를 만들 수 있던 시대였는데!- 셋집에다가 더 이상 죽을 친척도 없게 되었다지요. 그리고 결국 로이 스스로가 죽었다는데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집안에 도박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더 이상의 하강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근근이 살아가야 했습니다. 마리에타의 근근이 와 제 근근이에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저라면 부유한 동네에서 체면치레하느라 고생하느니 그냥 평범한 동네에서 평범하게 사는 걸 선택하겠습니다. 마리에타를 만날 수 있었다면 그렇게 권유해 봤을 텐데. 자신의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째서 마텔을 따라 떠난 건지 - 동네에서 제법 잘 사는 피터를 버리고 말이에요 - 알았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블랙 머니>는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3대 거장 중 한 명인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 시리즈 중 하나인데요. 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와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저 역시 엘릭시르의 <소름>에서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그를 몰랐을 겁니다. 사실 저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하고는 잘 안 맞아요. 눈이 따가울 정도로 매캐하달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하드보일드와는 잘 안 맞죠.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은 좋아하지만 커글린 가문 3부작은 좀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는 저랑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절대로 명탐정 코난 단행본 39권 표지 안쪽 날개 '코난이 찾은 명탐정 시리즈'에 루 아처(료 아처)가 소개되어있었기 때문은 아니에요. 네, 절대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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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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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동기들 중엔 해병대 취사병 출신이 많습니다. 동기가 열 명이라고 한다면 그중 일곱은 그러한데요. 첫 남자친구도 역시 그렇습니다. 다른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해 줄 때, 그는 취사와 축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짓말 같은 대규모의 조리나 말도 안 되는 양의 김장 이야기를 하며 솜씨 좋게 닭을 해체했고, 저는 그 뒷이야기를 들으며 닭볶음탕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해주던 이야기는 수방사 운전병이었던 선배가 해주는 이야기보다, 막 해군 신병으로 휴가 나온 동기가 해주는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쟁터의 요리사들>을 읽는데 옛 남자친구와 동기들의 얼굴이 겹치더군요. 그들은 미군인데도. 특히 취사병이 무시당하는 장면에서는 그들도 그랬다던데... 하는 생각에 남 이야기 같지 않았어요. 그들 역시 저에게 남이었음에도.

<전쟁터의 요리사들>의 주인공 티모시는 요리사 할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2차 세계대전 홍보물의 유혹이 아니었다면 결코 할머니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캡틴 아메리카가 그랬듯이 티모시 역시 전쟁터에 나가 멋진 남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할머니의 레시피북을 소중하게 안고 영웅이 되기 위해 훈련병이 된 티모시였지만 인생은 실전이라고, 운동 능력이 타 병사에 못 미친다는 걸 깨닫습니다. '키드'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만,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시당할 걸 알면서도 조리병에 지원, 훈련을 이어나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전우들을 만납니다. 특히 안경잡이 에드는 티모시에게 각별히, 의지할 수 있을 정도의 친구가 되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후엔 더욱 빛을 발하지요. 에드는 관찰력과 추리력이 뛰어난 친구였거든요.
메르스가 유행이어도 일상의 감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세계가 전쟁 속에 있어도 이러저러한 미스터리는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라이너스는 왜 사용했던 낙하산을 모으는 걸까 하는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실은 사소하지 않은 사건 같은 건데요. 찰스 슐츠의 <피너츠>의 라이너스는 담요를 끌고 다니던데, <전쟁터의 요리사들>의 라이너스도 혹시 '라이너스 증후군'이 있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잠시 했습니다만, 그의 기이한 행동에는 무척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건 좀 더 큰 문제인데, 아무리 배고파도 먹기 싫을 정도로 맛이 없는 분말 달걀이 600 상자나 없어져버린 사건도 발생합니다. 어쨌거나 군수물자인데 대량으로 사라지다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 맛없어서 갖다 버리려고 훔쳤나 하는 발상도 해보지만 진실은 뜻밖이었습니다. 
참, 군대와 학교에서 빠지면 안 되는 유령 괴담도 있습니다. 전쟁터를 배회하는 유령이라니. 적군보다 무섭지 않나요. 

<전쟁터의 요리사들>에는 서양인(미국인)들이 등장하는데 묘하게 일본 소설이나 일본 만화의 느낌이 풍깁니다. 일본 작가가 쓴 미군의 이야기라서 그런 거겠죠. 싫지 않은 퓨전의 느낌이 있습니다. 미나가와 히로코의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에서도 느꼈던 감각입니다. 대사나 행동 방식이 일본의 느낌인데 괜찮습니다. 전 일본 만화를 많이 봤거든요. 게다가 작가가 글을 참 잘 씁니다. 상세한 묘사에 장면에 눈에 그려집니다. 그러면서도 피곤해지지 않을 정도의 깔끔함이라 자연스레 작가의 배려를 삼킬 수 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던 건 제 과거의 인물들과 겹쳐져서만 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조리 장면이 적습니다. 전장에서 조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당연하겠죠. 맛없는 전투 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여유가 생기면 비로소 지역 주민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조리를 합니다. 조리병은 전투도 하고, 너희들이 쉴 때 조리도 하는데 무시하지 말라고!라고 화를 내고 싶은데 들어 줄 사람이 없군요. 지금의 전투는 어떨까요. 조리병의 위치는 괜찮을까요. 전투가 치열한 지역이나 작전 중만 아니라면 괜찮을까요. 



나를 걱정해준다면 바깥세상에서 열심히 살아라. 앞으로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전쟁터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 p.367

전쟁터에 가면 영웅이 되는 줄 알고 지원했던 많은 청년들이 상상과 다른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돌아가는 방법은 세 가지. 전쟁이 끝나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거나, 아니면 인식표에 영혼을 실어 상자에 담기거나. 

그런 게 전쟁입니다. 



"아, 그런데......"
"뭐?"
"네 손, 좋은 냄새가 난다."
"좋은 냄새? 그래?"
"응, 치즈랑 야채랑 우유. 어머니 손 같아서 안심되는데."
궁금해져서 내 오른손 냄새를 맡아보았다. 정말 어딘지 모르게 음식 냄새가 났다. 아까 로테에게 음식을 해줘서일까. 조리병이 되고 나서 어느새 나도 할머니 손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야, 눈 뜨라니까."
오하라가 또 눈을 감았기에 뺨을 탁탁 때렸다. 그런데 오하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흔들어도 몸이 마치 짐짝처럼 그냥 흔들렸다.
"야, 오하라!"
자세히 보니 눈꺼풀이 완전히 덮여있지 않았다. 나는 몸을 내밀고 녀석의 코와 입에 손을 대어 숨을 쉬는지 보려고 했다. 그러나 10초가 지나도 1분이 지나도 손바닥에 아무 느낌이 없었다. 붉은 머리 보급병, 포목점 집 아들이고 수다를 좋아하는 오하라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채 숨을 거두었다.
-p.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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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나미 신서의 역사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
가노 마사나오 지음, 기미정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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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를 통해 이와나미 신서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부터 출간하여 현재는 3000 호도 넘었다는 무척 유명한 시리즈인데다가 '신서'라는 이름의 원조인데도 전혀 몰랐다니 스스로의 무지를 탓했습니다. 소설이나 과학(그중에서도 생물 관련) 분야를 편식하는 저이기에 인문학은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서점에서도 도서관에서도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신서가 있다는 걸 알리가 없지요. 괜히 인문학이라고 하면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회피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를 읽으며 어렵고 심오한 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해주는 친절한 책이라 생각했는데,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가 거의 그렇다는 말에 한 번 읽어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에선 AK 커뮤니케이션즈에서 매월 한 권씩 발행하고 있는데요. 오렌지색 표지가 제주인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이와나미 신서는 일본의 대표적 인문학 서점인 이와나미 서점에서 1938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총서입니다. 지금까지 제2차 대전 때 잠시 발행을 멈추었던 걸 제외하고선 계속 발행되어왔으니 확실히 '역사'를 품고 있겠습니다. 시대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며 늘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제작하였으니 이와나미 신서의 역사는 일본 지성의 흐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영국의 펠리컨 북스의 판형을 참고하여 휴대가 간편하도록 하였으며 저가로 보급, 일본인들에게 시대에 맞는 정보를 주고 계몽한다는 취지에 적합한 출판물이었습니다.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가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한국인인 제 입장에서 다소 불편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국수주의인 것도 아니고, 이 책이 혐한인 것도 아닌데 신서의 내용은 무척 일본인 다운 견지이기에 제 입장에선 불편할 수밖에요. 회피를 꾀하는 저는 되도록 피하고픈 주제들이 종종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정면 승부할 자신도, 지식도 없는걸요. 그러나 애초에 이 책이 저를 위해 만든 책이 아니라 일본의 당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 편찬해온 시리즈이니 이런저런 흐름이나 내용은 무척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저의 편협함을 접어두고 본다면 이 신서 시리즈는 무척 대단한 기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 여성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것도 21세기의 저에겐 불쾌하지만, 당시엔 당연한 일이었겠죠. 시대 변화를 겪으며 이와나미 신서를 여자 한국인인 제가 읽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심지어 이렇게 글도 쓰고 있지 않은가요. 이런 시대이니 신서의 내용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을 겁니다. 읽어보지 않았어도 짐작할 수 있어요. 이와나미 신서는 시대의 변화를 빨리 알아채고 반 걸음 정도 빨리 나가거든요.

<이와나미 신서의 역사>는 1930년대부터 2010 년대에 이르기까지 신서의 대장정을 보여줍니다. 크게는 전시, 전후로 신서의 변화가 있었으며 냉전시대와 신세기에서도 그 차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최신식이며 현대적이었던 이념이나 지식, 특히 과학 분야에서의 것은 지금 와서 케케묵은 것이지만(심지어 스트렙토마이신도 없던 때의 책도 있잖아요!) 과거엔 어떤 식의 흐름이 있었나 알아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런 의의도 있지만, 저는 현재의 문제를 살피는 쪽에 더 관심이 갑니다. 이를테면 신고리 원전 5,6호기 문제와 더불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원전 프로파간다' 같은 책 말이에요.

이 책 <이와나미 신서의 역사>는 지금까지의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의 목록이 총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000권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기에 문장에 맞게 이러저러한 책이 있다고 간략히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자 입장에서 중요하다고 여긴 책은 좀 더 부연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책에 대해 소개를 하면서도 이 책은 이렇다 저렇다 평하거나 내용의 잘잘못은 따지지 않습니다. 의견을 보태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 텐데, 최대한 자제력을 발휘하여 전체적인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고 독자 스스로 본래의 신서를 찾아 읽고 판단하게 도와줍니다.(귀찮으면 찾지 않겠지만) 그러니 조선, 한국, 한국인에 관한 부분이 나와도 독자 역시 자제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저자의 입장이 독자에게 입혀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와나미 신서의 역사>를 초반에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으나 중반이 되니 좀 지치더군요. 이럴 땐 끊어 읽기.
다음날 플래그를 붙여가며 읽으니 또 새롭습니다. 간혹 무슨 말인지 모를 내용도 좀 있긴 했지만요. 저 같이 무지한 독자를 위해 뜻이 첨가되어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에 좀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책이 어마어마하게 두꺼워지고, 가격도 올라가겠죠. 책의 맨 뒤엔 지금까지 출간된 서적의 총 목록이 있습니다. 그 두께만도 굉장해요. 3000여 권이잖아요! 이게 메뉴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저 같은 결정 장애가 있는 사람은 며칠을 굶고 말 테니까요.
<이와나미 신서의 역사>는 2015년까지의 내용을 다룬 책이므로 오늘까지의 기록을 포함하다면 내용이 더 추가될 겁니다.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가 우리나라에서는 AK 커뮤니케이션즈에서 번역, 출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 제1권으로 우리도 읽으면 좋을 신서를 차례로 펴내고 있습니다. 본디 인문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직되는 저이지만,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라면 조금씩 접근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읽을 수 있는 책이 늘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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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웬디 워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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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나라의 연간 성범죄가 3만 건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중 강간 및 강제 추행이 74퍼센트로 제가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이에도 어디선가 성범죄에 노출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성범죄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기에 남자이므로, 나이가 많으므로 염려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고된 것만 3만 건이니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거나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꼽아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인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범죄의 크기가 크건 작건 간에 피해자는 상당한 상처를 입습니다. 잊고 살아가다가도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살아나 두렵고 괴롭습니다. 자신이 잘 못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감정이 되어 일상과 다른 기분을 느낍니다. 성폭력은 영혼에 상처를 내는 극악무도한 범죄입니다.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에는 크게 세 가지의 불안이 존재합니다. 강간당한 기억을 일종의 치료요법을 통해 삭제했으나 불안만은 남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고통에 자살 시도를 한 제니의 그것과 상처받은 자식을 지키지 못한 데다 범인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부모의 그것과 어쩌면 자신의 아이가 용의자일지도 모른다는 다른 부모의 불안. 이 세 가지가 존재하며 교차하는데, 누구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15년 전이었다면 제니의 고통이 가장 클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청소년 딸을 키우는 엄마이므로 단언할 수 없습니다. 상상조차 하기 싫어 피가 쏠려나가 정신이 아득해지는걸요.

제니는 파티장 인근에서 복면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소설 초반에 묘사된 성폭행 장면은 끔찍해서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상상을 억지로 밀어내야만 했습니다. 제니의 부모 샬럿과 톰의 모습은 각기 달랐지만, 샬럿은 강인한 태도의 엄마로, 톰은 유약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녀를 지키길 원했습니다. 제니가 겪은 일을 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길 원했던 샬럿은 기억을 지우는 요법을 사용케하지만, 결국 그것은 제니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만 몰랐던 데다가 이유 모를 두려움이 자신을 쫓아다녔습니다. 두려움의 실체를 모르니 이겨낼 수도 없었던 제니는 자살을 시도합니다. 운 좋게(?) 제니가 자살시도를 한 화장실 밖에서 불륜의 행위를 하려던 샬럿과 밥(톰의 상사이자 사장)이 제니를 발견하고 응급실로 옮깁니다. 다시 충격을 받은 샬럿과 톰은 제니에게 기억을 되돌려주기로 결정하고, 이 소설의 화자인 정신과 의사 앨런을 만납니다. 제니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샬럿과 톰은 영혼의 치유를 위해 모두 치료를 받는데요. 앨런에게 털어놓는 마음의 이야기로 조금씩 치유되어가지만 앨런은 그들의 비밀을 모두 조합하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한편, 주요 참고인으로 소환된 남자가 파란 잠바에 빨간 새가 그려진 옷을 입은 소년이 숲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는 목격 진술을 하는데, 수영 선수인 앨런의 아들에게 마침 그 옷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표백제 냄새에 반응한 제니. 설마 앨런의 아들이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요. 그렇다면 앨런은 제니의 기억을 되살려 범인을 떠올리게 할까요, 아니면 그릇된 기억을 주입하려 할까요.
이야기는 묘하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반전.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는 이미 워너 브라더스에서 영화 판권을 계약하고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 주연을 맡아 영화화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리즈 위더스푼의 나이로 보아 샬럿 역을 맡을 것 같은데요. 심연에 어둠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는 우아한 부인으로 등장할 그녀의 모습이 참 잘 어울립니다. 
사실 소설 초반부터 너무 높은 곳에서 시작하는 바람에 - 이를테면 롤러코스터의 시작점처럼 동력에 의해 꼭대기까지 쭉쭉 끌어 올려져서 급강하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는데요.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었으면 하는 지점에서 그렇지 못하고 그냥 평지를 달리더군요. 초중반이 살짝 지루했습니다. 아, 읽지 말까. 왜 제목이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일까. '너의 기억을 되살려줄게'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호, 아들이 의심을 받는 건가? 그럼 제목에서의 '너'는 아들인가? 제니에게서 아들의 기억을 지우는 건가? 어, 그런 거 아니네. 그럼 왜 제목이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지? 원제는 <All Is Not Forgotten>인데. 그럼 말이 되는데. 우리나라 제목은 왜 그런 거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산만하게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중후반에 이르러서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금세 끝.
책을 덮고 전체적인 스토리를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그 부분은 복선이었고, 그 부분은 필요한 부분이었구나 하며 이제는 이해합니다. 괜찮은 스릴러네요. 특히 마지막의 개연성은 참 좋았습니다. 그러니 혹시 저처럼 중간에 슬럼프가 온다면 그냥 참고 읽으셔요. 끝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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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이프 밀리언셀러 클럽 98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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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소년법의 적용을 받는 연령은 몇 세까지라고 알고 계시나요? 최근 부산 여중생 폭력 사건, 인천 어린이 유괴 살해 사건 등의 끔찍한 사건을 시작으로 최근 어금니 아빠 사건에서 딸의 구속영장 기각까지 하여(검찰에서 구속영장을 재신청했습니다.) 소년법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정한 소년이란 19세 미만인 자를 말하는데요. 생각보다 적용 연령대가 높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소년법은 '반사회성(反社會性)이 있는 소년의 환경 조정과 품행 교정(矯正)을 위한 보호처분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고, 형사처분에 관한 특별 조치를 함으로써 소년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소년법 제1장 제1조)'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거든요. 초등학생 이상이라면 무엇이 잘 못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견해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가장 기본이 되는 사항, 도둑질하면 안 된다, 폭력을 쓰면 안 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거든요. 어금니 아빠 사건처럼 간혹 보호자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해 보호자가 의뢰했을 때에는 위의 반사회적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그릇된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압니다. 그렇다면 정말 뭘 잘 몰라서, 이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저지르는 건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의 아이들이 잘 못된 걸 몰라서 하는 일인가요? 알면서 합니다. 잡혀도 감옥에는 가지 않으니 저지른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도 과연 법으로 보호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전 소년법의 개정이 이루어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촉법소년- 만 10세 이상에서 만 14세 미만의 형사 미성년자, 형사책임능력이 없기 때문에 형사처분을 받지 않고 보호처분을 받습니다.- 연령대 이상의 범죄자에게 그 장래가 어쩌느니 갱생의 가능성이 있다느니 하며 앞길이 창창한 아이를 한 번의 실수로 빨간 줄 들어가게 하면 되겠느냐 어쩌느냐 하면서 보호해주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미래는 소중하고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의 미래는 소중하지 않단 말인가요. 소년들의 인권은 중요하고,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인권은 뭐 알아서 챙기면 되는 건가요. 모든 소년을 보호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로 사건에 휘말렸을 뿐인 아이도 있을 것이고 진지하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아이도 있을 겁니다. 그것에 대한 판단과 정말 올바른 성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있는 대체 방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렇잖아도 소년범에 관한 이야기로 연일 시끄러운 요즘, 야쿠마루 가쿠의 <천사의 나이프>는 소년범에 대해 깊이 생각할 계기를 주었습니다. 이 소설은 2005년 작품인데요. 한 무리의 소년에게 얻어맞는 통에 휴대폰이 부서진 주인공 히야마가 무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휴대폰을 구입하는 그 정도 시절이 배경입니다. 히야마는 4년 전 집에 침입한 삼인조에게 아내를 잃습니다. 범인은 이내 잡혔지만, 열세 살의 미성년자였으므로 소년 보호소에 가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사과는커녕 범인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던 히야마는 아픈 기억을 안고 아내가 남긴 사랑스러운 어린 딸과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이 찾아옵니다. 소년 B가 살해당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히야마의 동선과 겹치는 인근의 한 공원에서요. 마침 그에게는 알리바이도 없었던 데다가, 아내의 죽음 이후의 인터뷰에서 범인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다는 말을 했던 - 아니 누군들 그런 소리를 안 할까요.- 일이 있었기에 주요 참고인이랄까, 용의 선상에 오릅니다. 매스컴에서도 소년 B, 사와무라 가즈야가 살해된 일과 히야마의 일을 연결 지어 찾아오기 시작했기에 그는 무척 곤란한 처지가 됩니다. 문득 그는 소년들이 어떤 곳에서 어떻게 교육을 받았으며 정말로 반성은 했었던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자기 자신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소년들에게도 검은 손이 접근하여 한 소년은 큰 부상을 당하고, 한 소년은 살해당합니다. 소년들의 사건에 접근하던 히야마는 누군가 아내에게 원한을 가졌었음을 알게 되고, 조용하고 착한 그녀에게 악의를 품은 사람이 누굴까 조사하던 중 자신이 몰랐던 아내의 이야기를 알게 됩니다. 

이 소설 <천사의 나이프>에서 소년법이 이러니 없어져야 한다. 그들은 절대 갱생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경우를 미스터리의 형식으로 제시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게 합니다. 소설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소년범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입니다. 각기 다른 형태로요. 그리고 소년범 중에서도 끝까지 교화되지 못한 자도, 뉘우치며 평생 가슴에 안은 사람도, 이런저런 기회를 갖지 못한 자도 있었습니다. 주인공 히야마는 일부는 용서하고 일부는 이해하며 일부는 사랑했으며 일부는 저주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을까요. 소년이기에 이렇게 저렇게 보호하며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깨닫고 피해자에게 속죄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렇게 이끌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쓴 <천사의 나이프>는 출간 당시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소년법 개정에 공헌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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