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웬디 워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의 연간 성범죄가 3만 건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중 강간 및 강제 추행이 74퍼센트로 제가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이에도 어디선가 성범죄에 노출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성범죄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기에 남자이므로, 나이가 많으므로 염려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고된 것만 3만 건이니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거나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꼽아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인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범죄의 크기가 크건 작건 간에 피해자는 상당한 상처를 입습니다. 잊고 살아가다가도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살아나 두렵고 괴롭습니다. 자신이 잘 못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감정이 되어 일상과 다른 기분을 느낍니다. 성폭력은 영혼에 상처를 내는 극악무도한 범죄입니다.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에는 크게 세 가지의 불안이 존재합니다. 강간당한 기억을 일종의 치료요법을 통해 삭제했으나 불안만은 남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고통에 자살 시도를 한 제니의 그것과 상처받은 자식을 지키지 못한 데다 범인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부모의 그것과 어쩌면 자신의 아이가 용의자일지도 모른다는 다른 부모의 불안. 이 세 가지가 존재하며 교차하는데, 누구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15년 전이었다면 제니의 고통이 가장 클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청소년 딸을 키우는 엄마이므로 단언할 수 없습니다. 상상조차 하기 싫어 피가 쏠려나가 정신이 아득해지는걸요.

제니는 파티장 인근에서 복면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소설 초반에 묘사된 성폭행 장면은 끔찍해서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상상을 억지로 밀어내야만 했습니다. 제니의 부모 샬럿과 톰의 모습은 각기 달랐지만, 샬럿은 강인한 태도의 엄마로, 톰은 유약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녀를 지키길 원했습니다. 제니가 겪은 일을 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길 원했던 샬럿은 기억을 지우는 요법을 사용케하지만, 결국 그것은 제니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만 몰랐던 데다가 이유 모를 두려움이 자신을 쫓아다녔습니다. 두려움의 실체를 모르니 이겨낼 수도 없었던 제니는 자살을 시도합니다. 운 좋게(?) 제니가 자살시도를 한 화장실 밖에서 불륜의 행위를 하려던 샬럿과 밥(톰의 상사이자 사장)이 제니를 발견하고 응급실로 옮깁니다. 다시 충격을 받은 샬럿과 톰은 제니에게 기억을 되돌려주기로 결정하고, 이 소설의 화자인 정신과 의사 앨런을 만납니다. 제니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샬럿과 톰은 영혼의 치유를 위해 모두 치료를 받는데요. 앨런에게 털어놓는 마음의 이야기로 조금씩 치유되어가지만 앨런은 그들의 비밀을 모두 조합하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한편, 주요 참고인으로 소환된 남자가 파란 잠바에 빨간 새가 그려진 옷을 입은 소년이 숲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는 목격 진술을 하는데, 수영 선수인 앨런의 아들에게 마침 그 옷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표백제 냄새에 반응한 제니. 설마 앨런의 아들이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요. 그렇다면 앨런은 제니의 기억을 되살려 범인을 떠올리게 할까요, 아니면 그릇된 기억을 주입하려 할까요.
이야기는 묘하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반전.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는 이미 워너 브라더스에서 영화 판권을 계약하고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 주연을 맡아 영화화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리즈 위더스푼의 나이로 보아 샬럿 역을 맡을 것 같은데요. 심연에 어둠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는 우아한 부인으로 등장할 그녀의 모습이 참 잘 어울립니다. 
사실 소설 초반부터 너무 높은 곳에서 시작하는 바람에 - 이를테면 롤러코스터의 시작점처럼 동력에 의해 꼭대기까지 쭉쭉 끌어 올려져서 급강하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는데요.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었으면 하는 지점에서 그렇지 못하고 그냥 평지를 달리더군요. 초중반이 살짝 지루했습니다. 아, 읽지 말까. 왜 제목이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일까. '너의 기억을 되살려줄게'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호, 아들이 의심을 받는 건가? 그럼 제목에서의 '너'는 아들인가? 제니에게서 아들의 기억을 지우는 건가? 어, 그런 거 아니네. 그럼 왜 제목이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지? 원제는 <All Is Not Forgotten>인데. 그럼 말이 되는데. 우리나라 제목은 왜 그런 거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산만하게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중후반에 이르러서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금세 끝.
책을 덮고 전체적인 스토리를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그 부분은 복선이었고, 그 부분은 필요한 부분이었구나 하며 이제는 이해합니다. 괜찮은 스릴러네요. 특히 마지막의 개연성은 참 좋았습니다. 그러니 혹시 저처럼 중간에 슬럼프가 온다면 그냥 참고 읽으셔요. 끝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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