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평점 :
제 동기들 중엔 해병대 취사병 출신이 많습니다. 동기가 열 명이라고 한다면 그중 일곱은 그러한데요. 첫 남자친구도 역시 그렇습니다. 다른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해 줄 때, 그는 취사와 축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짓말 같은 대규모의 조리나 말도 안 되는 양의 김장 이야기를 하며 솜씨 좋게 닭을 해체했고, 저는 그 뒷이야기를 들으며 닭볶음탕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해주던 이야기는 수방사 운전병이었던 선배가 해주는 이야기보다, 막 해군 신병으로 휴가 나온 동기가 해주는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쟁터의 요리사들>을 읽는데 옛 남자친구와 동기들의 얼굴이 겹치더군요. 그들은 미군인데도. 특히 취사병이 무시당하는 장면에서는 그들도 그랬다던데... 하는 생각에 남 이야기 같지 않았어요. 그들 역시 저에게 남이었음에도.
<전쟁터의 요리사들>의 주인공 티모시는 요리사 할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2차 세계대전 홍보물의 유혹이 아니었다면 결코 할머니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캡틴 아메리카가 그랬듯이 티모시 역시 전쟁터에 나가 멋진 남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할머니의 레시피북을 소중하게 안고 영웅이 되기 위해 훈련병이 된 티모시였지만 인생은 실전이라고, 운동 능력이 타 병사에 못 미친다는 걸 깨닫습니다. '키드'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만,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시당할 걸 알면서도 조리병에 지원, 훈련을 이어나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전우들을 만납니다. 특히 안경잡이 에드는 티모시에게 각별히, 의지할 수 있을 정도의 친구가 되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후엔 더욱 빛을 발하지요. 에드는 관찰력과 추리력이 뛰어난 친구였거든요.
메르스가 유행이어도 일상의 감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세계가 전쟁 속에 있어도 이러저러한 미스터리는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라이너스는 왜 사용했던 낙하산을 모으는 걸까 하는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실은 사소하지 않은 사건 같은 건데요. 찰스 슐츠의 <피너츠>의 라이너스는 담요를 끌고 다니던데, <전쟁터의 요리사들>의 라이너스도 혹시 '라이너스 증후군'이 있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잠시 했습니다만, 그의 기이한 행동에는 무척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건 좀 더 큰 문제인데, 아무리 배고파도 먹기 싫을 정도로 맛이 없는 분말 달걀이 600 상자나 없어져버린 사건도 발생합니다. 어쨌거나 군수물자인데 대량으로 사라지다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 맛없어서 갖다 버리려고 훔쳤나 하는 발상도 해보지만 진실은 뜻밖이었습니다.
참, 군대와 학교에서 빠지면 안 되는 유령 괴담도 있습니다. 전쟁터를 배회하는 유령이라니. 적군보다 무섭지 않나요.
<전쟁터의 요리사들>에는 서양인(미국인)들이 등장하는데 묘하게 일본 소설이나 일본 만화의 느낌이 풍깁니다. 일본 작가가 쓴 미군의 이야기라서 그런 거겠죠. 싫지 않은 퓨전의 느낌이 있습니다. 미나가와 히로코의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에서도 느꼈던 감각입니다. 대사나 행동 방식이 일본의 느낌인데 괜찮습니다. 전 일본 만화를 많이 봤거든요. 게다가 작가가 글을 참 잘 씁니다. 상세한 묘사에 장면에 눈에 그려집니다. 그러면서도 피곤해지지 않을 정도의 깔끔함이라 자연스레 작가의 배려를 삼킬 수 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던 건 제 과거의 인물들과 겹쳐져서만 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조리 장면이 적습니다. 전장에서 조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당연하겠죠. 맛없는 전투 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여유가 생기면 비로소 지역 주민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조리를 합니다. 조리병은 전투도 하고, 너희들이 쉴 때 조리도 하는데 무시하지 말라고!라고 화를 내고 싶은데 들어 줄 사람이 없군요. 지금의 전투는 어떨까요. 조리병의 위치는 괜찮을까요. 전투가 치열한 지역이나 작전 중만 아니라면 괜찮을까요.
나를 걱정해준다면 바깥세상에서 열심히 살아라. 앞으로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전쟁터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 p.367
전쟁터에 가면 영웅이 되는 줄 알고 지원했던 많은 청년들이 상상과 다른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돌아가는 방법은 세 가지. 전쟁이 끝나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거나, 아니면 인식표에 영혼을 실어 상자에 담기거나.
그런 게 전쟁입니다.
"아, 그런데......"
"뭐?"
"네 손, 좋은 냄새가 난다."
"좋은 냄새? 그래?"
"응, 치즈랑 야채랑 우유. 어머니 손 같아서 안심되는데."
궁금해져서 내 오른손 냄새를 맡아보았다. 정말 어딘지 모르게 음식 냄새가 났다. 아까 로테에게 음식을 해줘서일까. 조리병이 되고 나서 어느새 나도 할머니 손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야, 눈 뜨라니까."
오하라가 또 눈을 감았기에 뺨을 탁탁 때렸다. 그런데 오하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흔들어도 몸이 마치 짐짝처럼 그냥 흔들렸다.
"야, 오하라!"
자세히 보니 눈꺼풀이 완전히 덮여있지 않았다. 나는 몸을 내밀고 녀석의 코와 입에 손을 대어 숨을 쉬는지 보려고 했다. 그러나 10초가 지나도 1분이 지나도 손바닥에 아무 느낌이 없었다. 붉은 머리 보급병, 포목점 집 아들이고 수다를 좋아하는 오하라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채 숨을 거두었다.
-p.286~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