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너를 생각해 아르테 미스터리 2
후지마루 지음, 김수지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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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5학년 때쯤 저는, 마법 소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법으로 빨리 어른이 되어서 내가 하고픈 일들 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여겼었죠. 하지만 어른이 되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여전히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나와 함께 있었어요. 이렇게 사는 게 인생인가 보다 현실에서 행복을 찾자고 생각한 순간, 파랑새는 내 곁에 남고 마법 소녀는 사라졌어요.

후지마루의 <가끔 너를 생각해>에선 어린 시절 마법 소녀, 아니 마녀였지만 할머니의 죽음으로 마녀 따위 잊고 살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소꿉친구로 인해 마녀로서의 본분이 되살아난 어린 아가씨 시즈쿠가 등장합니다.

이 책에서의 마녀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사악한 존재가 아닌, 반짝반짝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마법봉을 휘두르며 변신하는 마법 소녀는 아니지만 그래도 느낌상 그쪽에 더 가깝거든요.

시즈쿠의 집안은 모계 격세 유전으로 마녀의 힘이 전해집니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여섯 가지 마법 도구를 전해주고 사용법을 일러주는데요. 이 마법 도구는 단 한 번씩만 사용할 수 있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쓸 수 있습니다. 여섯 가지 마법 도구의 힘이 떨어지면 마녀로서의 힘이 사라지고 도구를 고이 간직했다가 손녀에게 전해주면 사명은 끝납니다. 이런 식으로 몇 대를 거쳐왔는지 몰라요.

어린 시즈쿠는 자신이 마녀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동화책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죠. 소꿉친구 소타와 함께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했었지만, 천재지변이 일어난 그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소타는 사라졌습니다.

잊고 살았는데, 십 년 후 마도구를 꺼내놓고 할머니와의 추억에 잠겨 있던 그날 소타가 돌아옵니다. 경망스러운 남자로 자랐는지 말이 너무 가벼워요. 소타는 어릴 적 약속대로 마녀의 사명을 도우러 왔다고 하는데, 정작 시즈쿠는 마녀라니 말도 안 되고 그런 일을 할 생각도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끈질긴 남자 소타의 권유로 마법 도구를 이용해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로 순간이동하는데요. 이때부터 마법 도구를 이용해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고 마침내 모든 도구를 다 사용했을 때, 하나 둘 흩어져있던 비밀과 기억들이 떠오르고, 그것은 이별과 긴 기다림을 예고합니다.

라이트노벨의 느낌이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었던 전작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에 비해 <가끔 너를 생각해>는 굉장히 가볍고 발랄합니다. 상상 그 이상으로요. 애니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실은, 지나치게 과장된 행동에다가 외모 지향이나 신경 쓰이는 표현들이 있어서 좀 거슬리는 부분이 없지 않았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인데 남성향이라고나 할까요. 스토리는 여성향인데 다루어지는 언어나 장면들은 종종 남성향의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읽다가 문득문득 거슬리기도 했어요. 진행도 좀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고요. (아니 어쩌면 좀 많은 지도.)

투덜거리면서 책을 봤죠. 그런데 왜 코 끝이 찡해지는 걸까요?

저는 이별에 약한가 봐요.

전체적인 느낌은....

나쁘지 않군요. 때로는 이런 느낌의 소설도 좋은 것 같아요.

사람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면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는 마법사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마법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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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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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가슴이 먹먹한 소설이라니.

요새 많은 분들이 읽고 있어 핫한 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벼이 이 책을 선택했던 저는 이내 자신의 미련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전 정보 없이 제목과 표지의 느낌으로만 선택한 책,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담담한 서술 아래에 생존에 대한 불안감과 욕구, 끊임없는 모순, 잔잔하고 애달픈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그 무언가가 깔려 흐르고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주인공인 로자를 통해 만나게 되는 실존 인물 마고 뵐크를 떠올리며 더 깊은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로자의 삶도 이토록 마음 아픈데, 마고는 어땠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유대인에 대해서는 슬퍼했었지만 독일 국민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일본과는 다르게 나치가 저지른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한대.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 국민도 히틀러에 의한 전쟁의 피해자라는 건 생각조차 해 본적 없었습니다. 헐리우드 전쟁 영화에서 그려진 2차 세계대전은 몇몇의 쉰들러 같은 위인이 아니라면 모두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이 더 아프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인 로사는 남편 그레고리의 참전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정말 말 그대로 갑자기 SS친위대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고, 그날 이후 열네 명의 동료와 함께 매일 세 번 히틀러 총통의 음식을 먹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내 몸은 총통의 음식을 흡수했다.

이제 총통의 음식은 피를 타고 내 몸속에서 순환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무사했고 나는 또다시 배가 고팠다.

어리둥절했습니다. 히틀러의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알아보는 테스트를 하기 위해 히틀러가 우수한 인종이라고 여기는 아리아인을 독 감별사로 쓰다니. 동물을 죽이는 잔인한 짓을 할 수 없었던 히틀러가 채식 위주의 식사를 했던 모순과 같은 걸까요?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어떻게 선발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양한 성향의 그녀들은 점점 사이좋은 친구가 되어 갔습니다. 삶과 죽음을 함께 겪어야 하는 전우애 같은 것일까요. 그녀들은 출퇴근을 하며 매일 세 번 음식을 먹고, 세 번의 죽음을 넘깁니다.

실제로 나는 총통에게 목숨을 바치기로 한 사람이 아닌가. 매끼 내 앞에 일렬로 나란히 놓이는 접시 열 개는 주님의 몸으로 만들어진 영성체처럼 끊임없이 히틀러의 존재를 환기시켰다. 하지만 성당과는 달리 이곳에는 영생의 약속 따윈 없다. 한 달에 200마르크 그것이 우리들의 대가였다.

전쟁에 나간 남편이 실종되었다는 통지를 받아 슬픔으로 온몸이 뭉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날도 잠옷 바람으로 질질 끌려 차에 실렸습니다. 가슴이 눈물로 가득 차 올라 꽉 막혀있던 날도 변함없이 히틀러의 음식을 삼켜야 했습니다. 그 음식이 안전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힘들었지만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 친위 대원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독을 먹고 싶어서였다. 독이 든 음식을 한입이라도 삼키면 힘들여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 없이 죽게 될 터였다. 적어도 죽기 위한 노고는 아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음식은 멀쩡했고 나는 죽지 않았다.

로자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먹고, 먹음으로써 죽음과 늘 함께 걸었습니다. 자신들을 감시하는 원수 같은 독일군 장교와 사랑에 빠지고,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다른 친구는 잃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모순 투성이라는걸, 나이가 제법 들어가는 지금은 알고 있지만 이토록 아픈 모순은 겪은 적이 없습니다.

왜 늘 전쟁은 일으킨 자보다는 평화를 원하는 자를 아프게 하는 걸까요?

눈물이 줄줄 흐르는 슬픔이 아닌, 가슴 깊은 곳부터 아려오는 묵직한 슬픔을 느끼게 하는 실화 바탕 소설이었습니다.

작품은 사랑, 자유, 믿음, 국가와 개인, 삶과 죽음, 역사적 책임, 인간의 존엄성 등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단순한 스토리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중략)

그녀는 히틀러의 시식가로서 끊임없이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는 '희생양'이자, 모든 이들이 굶주리는 전쟁 통에서 히틀러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전체주의의 수혜자'라는 양면적 특징을 가진 인물이다.(중략)

로자의 죄책감은 결국 생존 자체에 대한 죄책감이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비인간적인 시스템에 적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2부와 3부 사이엔 40여 년의 세월이 있습니다. 하얀 백지인 그 페이지가 평온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로자를 생각하고 마고를 생각하며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 아픔은 내가 감히 다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지금껏 그 모든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살면서 유일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존하는 법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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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푸드 - 당신의 뇌가 원하는 음식은 따로 있다
리사 모스코니 지음, 조윤경 옮김 / 홍익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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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생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주에 살고 있지만 마트나 시장에서 사는 생선이 저렴한 것도 아니고, 부지런을 떨어서 새벽배 들어오는 포구에 가서 각재기라고 불리는 정어리를 사 온다면 모를까 저에게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식품입니다. 실은, 핑계입니다. 저는 비린내가 싫어요. 집에서 생선이 구워지는 냄새도 싫고, 조림을 하자니 나트륨이 걱정됩니다. 밖에서는 먹어요. 단, 비린내가 나지 않는 생선에 한해서 말이에요. 몸에 좋은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뇌와 혈관 건강을 위해 오메가 3 보충제를 먹고 있습니다. 이젠 염려해야 하는 나이거든요.

그런데 <브레인 푸드>의 저자 리사 모스코니는 보충제보다는 직접 음식에서 오메가 3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질 좋은 연어를 하루에 85g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충이 가능하다고 하는데요. 연어라... 저 연어 좋아하거든요. 마트에 가서 연어를 사다가 소분해야겠어요. 그뿐만 아니라 난황에는 인지질이 풍부해서 콜레스테롤이 유의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적당량의 달걀을 꾸준히 먹는 것도 좋다고 하더군요. 저자는 블랙 캐비아나 연어 알 같은 걸 권하지만 저는 좀.

저자는 <브레인 푸드>를 통해 반짝하고 떠오르는 획기적이거나 신박한 방법보다는 제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짚어줍니다. 아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무척 중요한 것으로, 이상한 불안 마케팅에 흔들리지 않을만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줍니다.

저자의 처방은 무척 간단합니다.

첫째, 꾸준히 신체 활동을 하면 심장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둘째, 영양소가 풍부한 채소, 과일, 콩류, 통곡물을 섭취하라. 셋째, 물질대사에 영향을 미치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며 동맥이 막히게 만든다고 알려진 동물성 식품과 첨가된 당의 섭취를 제한하라. 넷째, 물을 많이 마셔라. 다섯째, 금연하라. 그리고 간접흡연을 최대한 피하라. 여섯째,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간다면 의사의 지침에 따라 몸무게를 줄여라.

-p.215,216

건강을 위해서는 무척 당연한 처방임에도 꾸준히 이것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뇌와 심혈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충분한 채소의 섭취를 하지 않고, 동물성 식품을 많이 먹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아요. 저는 고혈압입니다. 이는 결국 뇌혈관에도 영향을 미쳐서 벌써 문제가 생기고 있을지 몰라요. 저자는 충분한 수면 역시 권하고 있는데, 저는 약간의 수면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게 원인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아이가 공부하다가 늦게 자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봅니다만, 이러다가 노년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땐 아이를 더 힘들게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당장의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브레인 푸드>의 띠지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당신의 뇌는 어느 날 갑자기 병들지 않는다.'

맞습니다. 지금 저의 식습관, 과거로부터의 식습관, 행동 습관이 노년의 저를 만들겠죠. 안 좋은 습관이라면 그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바로 교정해야 합니다.

그 시기가 이르면 이를 수록 좋아요. 혈관의 노화라거나 뇌의 노화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소를 잃어도 다음 소를 위해 외양간은 고쳐야 하겠지만 잃기 전에 단단히 방비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이 책은 대체로 믿음직합니다. 겁을 주는 게 아닌, 되도록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신경과학자이자 영양사입니다. 그렇기에 뇌에 좋은 음식을 영양학 측면에서 알려주고 권유합니다. 뇌에 좋은 음식은 곧 혈관에 좋은 음식이고 심장에 좋은 음식입니다. 따라서 저자가 권하는 것을 주의 깊게 살피고 따른다면 뇌 건강뿐만 아니라 전신의 건강, 노화 방지에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 추천 식품 중 비용 면에서 -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 이를테면 물을 충분히 마신다거나 좋은 기름을 사용한다거나 식탁 위의 트랜스 지방을 몰아낸다거나 하는 건 충분히 실천 가능합니다. 고구마를 즐겨 먹으라는 건 누구나 잘 할 수 있겠죠. 특히 단순히 굽거나 쪄서 먹으라는 건 황홀한 유혹입니다. 그러니 이런 걸 어떻게 하라고! 하면서 투덜대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하는 게 좋겠습니다. 책의 후반부에 식단과 요리법이 나와있는데, 그건 참고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분명 건강에 좋은 식단이긴 한데, 우리가 이대로 식단을 꾸리기엔 좀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조리법이고 몸에 좋은 조리법이니 가끔씩 내킨다면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책을 꼼꼼히 읽고 저자의 권유에 따른 좋은 식품, 좋은 조리법으로 우리 형편에 맞게 식단을 직접 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에는 좋은 내용이 잔뜩 들어있습니다. 영양학적 측면에서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지중해식 식단, 혹은 채식에 가까운 식단을 권하고 있으므로 채식주의자 독자가 본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처럼 육식을 과하게 하는 독자도 반성의 기회를 갖고 새해 건강 지침을 세우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누군가가 2020년 새해 건강을 위해 계획을 세운다면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을 추천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마법의 약'이나 순식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빠른 해결 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 책을 통해 신경 영양학을 실천하며 당신이 발견하는 지식은 평생에 걸친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이 책의 목표는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건강한 뇌를 만드는 것을 돕고 앞으로도 뇌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지도를 제공하는 것이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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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1-07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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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피어스 브로넌, 가이 피어스 주연의 영화 스피닝 맨을 보았습니다.

어여쁜 한 여학생이 실종된 후 주용의자로 에반 교수가 지목되는데요. 경찰인 말로이는 그를 유심히 관찰하는데 그의 주변에서 여학생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이를테면 차 뒷좌석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발견되는 것 같은. 사실 에반에게는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비밀이 있습니다. 대형 매장에서 어리고 예쁜 여자 점원의 상냥한 미소와 응대를 보거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여학생을 보면 깊은 관계에 이르는 상상을 하는데, 그 상상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감독이 제대로 시점을 짚어주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에반에게는 그런 감독이 없었기에 약간 혼란스럽습니다. 저번 학교에서 여학생과 스캔들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쪽으로 오게 된 것이라는데, 정작 그는 억울합니다. 그 여학생과 관계 맺은 기억이 없어요. 이번에도 억울합니다. 그저 실종된 학생과 친구들을 한 번 태워준 일이 있었을 뿐인데 오해를 받으니까요. 가족과 학교, 학생들 모두 그를 나쁜 놈 취급합니다. 자신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아는 그는 혹시나 어쩌면 정말로...라는 생각 끝에, 실종된 여학생을 따라가다 그만 죽이고 마는 기억을 만들어내고 자수하러 갑니다.

영화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그의 기억인지, 그리고 그의 뇌가 합리화하는 부분은 어디인지 잘 모르겠던 부분도 있습니다. 이 책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를 읽기 전엔 죄책감이 만든 합리화일 거라 생각했고 세상 모든 이의 기억은 왜곡되고 조작되는 바, 주인공인 에반의 경우엔 이기적이어서 더 심했던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종의 뇌 기능 오류였죠.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이 병에 대해 알고 있었나 봅니다.

말짓기증(confabulation,작화증)환자들은 누군가를 고의로 속일 생각이 없으며 자신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있지도 않았던 일을 기억한다.

-p.196

다중 인격에 대해 다루는 영화 아이덴티티나, 가이 피어스의 또 다른 영화 메멘토 같은 영화들은 그냥 보아도 재미있지만 뇌과학이나 이상에 대해 알고 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지식이 선행되면 좋지만 가끔은 영화를 보고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책을 읽고 나면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번도 그런 케이스입니다.

이 책,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는 흔히 말하는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뇌가 어떻게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고자 노력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위트 있는 문장과 센스 있는 편집으로 소설이나 사례집을 읽듯이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올리버 색스의 책보다 약간 가벼워 누구나 읽을 수 있는데, 책이 하드커버에 두께가 두꺼워 지레 겁을 먹을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책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거든요. 그러나 이 책은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평소에 궁금했던 것, 궁금해본 적도 없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보다 궁금했던 '시각 장애인은 꿈속에서 무엇을 볼까' 하는 이야기 같은 거요. 후천적 시각 장애인은 영상이 있는 꿈을 꿀 거라 생각했지만 선천적인 경우엔 어떨까 했는데요. 뇌는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논리로 메꾸는 경향이 있어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영상이 있는 꿈을 꾼다고 하는군요. 그들이 꿈에서 보는 영상과 우리가 보는 영상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시각 장애인의 뇌는 지각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시각적 환각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감각을 동원해 시야를 재건하기도 한다. 꿈을 꿀 때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뇌는 뇌줄기가 활동하면서 내보낸 무작위 신호를 수집하고, 이런 신호들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결합해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머리는 잠을 자는 동안 터무니없는 판타지에 포위당하게 된다. -p.76

조현병 환자나 다중인격 환자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런 결과 그들이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부분에서는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무척 신기했죠. 뜬금없지만 정신병원에서 의사들이 그들과 상담하고 약물을 주고 그런 과정에도 이런 부분이 들어가겠구나, 약물은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하거나 치료해서 오류를 수정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뇌에 이상이 있는 환자뿐만 아니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뇌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오류들은 진화의 산물이기도 하고 삶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험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린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 어른은 충격을 받기도 하죠. 하지만 아이 스스로 거짓을 꾸며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어른도 그렇거든요. 내가 머리를 써서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뇌는 스스로 합리화하고 논리적이려고 애쓰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을 왜곡해버려요. 그래서 나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거짓을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이 책을 읽다 보면 많은 영화, 많은 책이 떠오릅니다. 장기 기억으로 담아두었던 것을 뇌가 꺼내어 확인하나 봅니다.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는 상처 입은 뇌, 상처 입지 않은 뇌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알려줍니다. 참 흥미롭습니다. 나의 뇌는 어떨까요? 어떤 과정으로 오류를 메꾸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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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5대 소설 수호전·금병매·홍루몽 편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이나미 리쓰코 지음, 장원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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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중국 5대 소설: 삼국지연의 서유기>를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그 책을 통해 구어체로 된 소설을 '백화 소설'이라고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삼국지연의>와 <서유기>모두 어린 시절부터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었기에 이나미 리쓰코의 안내서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죠.


이번에는 <중국 5대 소설: 수호전 금병매 홍루몽> 편을 읽었습니다. 지난번에 책을 재미있게 읽어서 만일 수호전, 금병매, 홍루몽 편을 읽을 기회가 온다면 꼭 읽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되니 정말 기뻤습니다. 책은 지난번보다 좀 두껍고 묵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엔 세 편의 소설을 이야기하려니 분량이 많이 질 수밖에요. 앞서의 책과의 차이점이라면, 지난번의 삼국지연의와 서유기는 백화소설이라 맛깔나게 구성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성격이 다른 별개의 소설이었다면 이번의 책은 수호전, 금병매, 홍루몽이 서로 연관이 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했다는 점일 겁니다.

수호전, 금병매, 홍루몽을 모두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서로 관계있음을 알고 있을 텐데, 저는 수호전과 금병매는 읽었으나 홍루몽을 읽지 않았고, 두 책을 읽었음에도 반금련의 그 늠름한 시동생이 수호전의 인기 인물 무송이라는 건 몰랐습니다. 수호전은 학생 때, 금병매는 몇 년 전에 읽었는데요. 아마 수호전의 인물들에 대해 거의 잊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삼국지는 몇 번이고 읽었지만 수호전은 두 번 정도 읽다가 처음엔 완독했지만 두 번째엔 읽다가 포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상하게 삼국지보다 신이 나지 않더군요. 혹시 수호전에 깔려있는 여혐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왠지 모를 거부감이 느껴졌나 봅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정면으로 연애를 묘사하는 장면은 없지만 그래도 현부인이나 현모등 꿋꿋한 여성들이 등장해 크게 활약하는 장면이 종종 나타난다. 그러나 <수호전>은 이러한 긍정적 이미지의 여성상조차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중략) <수호전>세계의 여성관은 지나치게 결벽한 나머지 거의 여성 혐오에 가깝다고 해야 할 지경이다. (중략) 대체로 <수호전>에서는 '여성적인 것'은 모름지기 '악'으로서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상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윤리관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수호전>이 정신적으로는 '동성끼리만 사회적 관계를 맺는' 유형의 '남성 세계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p.60~61

그래도 의협심으로 뭉쳐 무언가를 해내는 걸 보면서 통쾌해 했었습니다. 초반엔 말이에요. 후반으로 갈수록 좀 이상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장면들이 좀 많아요. 자신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자기 가족을 몰살 시킨 집단에 어쩔 수 없으니 들어간다? 과거에는 그래도 좋았을까요?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마음에 안 들었었나 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잊었던 기억이 소환되었어요.

수호전의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인 무송은 자신과 정반대의 외모인 무대라는 형이 있습니다 키도 작고 못생기고 볼품없는 남자인데요. 주인집과 여차여차한 일이 생겨 억지로 무대에게 시집온 반금련이라는 형수가 유혹해도 넘어오지 않았던 그는 반금련이 서문경과 바람이 나서 형을 죽게 만들자 형수와 상간남을 때려죽입니다.

북송 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신흥 졸부 상인 서문경을 둘러싼 욕망과 에로스의 세계를 강렬하게 묘사하는 백화 장편소설 <금병매>(중략)라는 소설이야말로 중국 소설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획기적인 위대한 소설 작품이라고 하겠다.(중략) <금병매>는 처음부터 단독 저자가 구상해 창작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금병매>의 출현으로 중국 고전 백화 장편소설은 '이야기되는 설화'에서 '창작되는 서사물'로 대전환을 이루게 된다. -p.207

금병매는 이때 반금련이 죽지 않고 서문경에게 시집갔다는 - 무송이 죽이기 전에 달아나 혼인을 했다는 내용으로 수호전과 완전히 상반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저히 남성만의 사회에다가 의리를 중시하고 물욕이나 색욕을 중시하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더러운 것처럼 취급했던 수호전에 반해 권모술수, 물욕, 색욕에 의리는 개한테 주려고 찾아봐도 없는 그런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수호전에서 여자들이 악녀였으니 여기서는 선한 이들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반금련부터가 참 고약한 여인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과거에 읽었던 <금병매>는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과 좀 달랐습니다. 책에서 수호전의 반금련 이야기와 금병매의 반금련 이야기를 조금씩 섞어놓은 것 같은데요. 그때는 반금련이 참 불쌍하고 안타까운 운명의 여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렇지 않더군요. <금병매>에는 다양한 판본의 텍스트가 있다고 하니 제가 읽은 것은 이 책과는 다른 본 인가 봅니다.

<금병매>는 <삼국지연의>,<서유기>,<수호전>과는 달리 독자를 비일상적인 세계에서 노닐게 하는 것과는 무관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런 차이는 다른 세 편의 작품이 설화의 세계에서 성장했던 시대와 창작소설로서의 <금병매>가 써진 시대 간의 차이이기도 하다. -p.381

<금병매>가 탄생한지 약 150년 뒤, 조설근이 지은 <홍루몽>은 <금병매>를 토대로 하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구축해냅니다.

<홍루몽>은 최초의 '창작된 작품'으로 중국 백화 장편소설의 새로운 경치를 열었던 <금병매>를 토대로 하면서도, 이를 철저하게 정화하여 비할 바 없이 정치한 서사 세계를 구축해낸 작품이다. 중국 백화소설의 금자탑이라고 마땅히 불러야 하는 동시에 이를 능가하는 장편소설은 중국에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쓰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하겠다. -p.387

하지만 <홍루몽>이 완성되기 전 조설근이 병사하고 나머지 분량은 그의 구상을 바탕으로 고악이라는 사람이 집필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홍루몽>과 <금병매>의 가장 큰 차이라면 서문경은 욕망을 주체 못 하는 속물이었지만 홍루몽의 중심인물 가보옥은 물욕, 출세욕, 에로틱한 욕망 등을 씻어낸 인물입니다. 미리 소설을 읽어보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상상해보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선비 같은 면모가 있는 이가 아닌가 합니다.

<중국 5대 소설 : 수호전 금병매 홍루몽>은 훌륭한 안내서입니다. 앞서의 <삼국지연의, 서유기>편과 더불어서요. 이 책을 읽고 난 후 다섯 개의 소설 중 하나를 읽지 않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읽었던 소설들 간에서는 어떤 그림이 명확하게 그려져서 이 책의 안내를 따라가기 쉬웠으나 읽지 않았던 <홍루몽>편에서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떠올리며 맞장구 쳐가며 읽는다면 더 맛 좋게 느껴졌을 텐데 참 아쉽습니다.

그런고로, <홍루몽>을 찾아 읽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어요. 그렇다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즐겁게 읽을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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