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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평점 :
최근에 피어스 브로넌, 가이 피어스 주연의 영화 스피닝 맨을 보았습니다.
어여쁜 한 여학생이 실종된 후 주용의자로 에반 교수가 지목되는데요. 경찰인 말로이는 그를 유심히 관찰하는데 그의 주변에서 여학생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이를테면 차 뒷좌석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발견되는 것 같은. 사실 에반에게는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비밀이 있습니다. 대형 매장에서 어리고 예쁜 여자 점원의 상냥한 미소와 응대를 보거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여학생을 보면 깊은 관계에 이르는 상상을 하는데, 그 상상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감독이 제대로 시점을 짚어주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에반에게는 그런 감독이 없었기에 약간 혼란스럽습니다. 저번 학교에서 여학생과 스캔들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쪽으로 오게 된 것이라는데, 정작 그는 억울합니다. 그 여학생과 관계 맺은 기억이 없어요. 이번에도 억울합니다. 그저 실종된 학생과 친구들을 한 번 태워준 일이 있었을 뿐인데 오해를 받으니까요. 가족과 학교, 학생들 모두 그를 나쁜 놈 취급합니다. 자신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아는 그는 혹시나 어쩌면 정말로...라는 생각 끝에, 실종된 여학생을 따라가다 그만 죽이고 마는 기억을 만들어내고 자수하러 갑니다.
영화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그의 기억인지, 그리고 그의 뇌가 합리화하는 부분은 어디인지 잘 모르겠던 부분도 있습니다. 이 책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를 읽기 전엔 죄책감이 만든 합리화일 거라 생각했고 세상 모든 이의 기억은 왜곡되고 조작되는 바, 주인공인 에반의 경우엔 이기적이어서 더 심했던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종의 뇌 기능 오류였죠.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이 병에 대해 알고 있었나 봅니다.
말짓기증(confabulation,작화증)환자들은 누군가를 고의로 속일 생각이 없으며 자신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있지도 않았던 일을 기억한다.
-p.196
다중 인격에 대해 다루는 영화 아이덴티티나, 가이 피어스의 또 다른 영화 메멘토 같은 영화들은 그냥 보아도 재미있지만 뇌과학이나 이상에 대해 알고 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지식이 선행되면 좋지만 가끔은 영화를 보고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책을 읽고 나면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번도 그런 케이스입니다.
이 책,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는 흔히 말하는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뇌가 어떻게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고자 노력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위트 있는 문장과 센스 있는 편집으로 소설이나 사례집을 읽듯이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올리버 색스의 책보다 약간 가벼워 누구나 읽을 수 있는데, 책이 하드커버에 두께가 두꺼워 지레 겁을 먹을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책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거든요. 그러나 이 책은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평소에 궁금했던 것, 궁금해본 적도 없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보다 궁금했던 '시각 장애인은 꿈속에서 무엇을 볼까' 하는 이야기 같은 거요. 후천적 시각 장애인은 영상이 있는 꿈을 꿀 거라 생각했지만 선천적인 경우엔 어떨까 했는데요. 뇌는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논리로 메꾸는 경향이 있어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영상이 있는 꿈을 꾼다고 하는군요. 그들이 꿈에서 보는 영상과 우리가 보는 영상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시각 장애인의 뇌는 지각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시각적 환각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감각을 동원해 시야를 재건하기도 한다. 꿈을 꿀 때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뇌는 뇌줄기가 활동하면서 내보낸 무작위 신호를 수집하고, 이런 신호들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결합해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머리는 잠을 자는 동안 터무니없는 판타지에 포위당하게 된다. -p.76
조현병 환자나 다중인격 환자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런 결과 그들이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부분에서는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무척 신기했죠. 뜬금없지만 정신병원에서 의사들이 그들과 상담하고 약물을 주고 그런 과정에도 이런 부분이 들어가겠구나, 약물은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하거나 치료해서 오류를 수정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뇌에 이상이 있는 환자뿐만 아니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뇌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오류들은 진화의 산물이기도 하고 삶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험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린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 어른은 충격을 받기도 하죠. 하지만 아이 스스로 거짓을 꾸며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어른도 그렇거든요. 내가 머리를 써서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뇌는 스스로 합리화하고 논리적이려고 애쓰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을 왜곡해버려요. 그래서 나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거짓을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이 책을 읽다 보면 많은 영화, 많은 책이 떠오릅니다. 장기 기억으로 담아두었던 것을 뇌가 꺼내어 확인하나 봅니다.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는 상처 입은 뇌, 상처 입지 않은 뇌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알려줍니다. 참 흥미롭습니다. 나의 뇌는 어떨까요? 어떤 과정으로 오류를 메꾸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