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인문학 : 철학 - 철학이 묻고 역사가 답하다 우리 집 인문학
박시몽 지음, 임기환 감수 / 상상스퀘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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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을 읽을 때면 늘 한 가지에 주목하게 된다. 각각의 사상가들은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오늘 처음 진도를 나가는 서양 철학사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유를 읽으며, 나는 이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감상평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인간에 대한 관심이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사유는 조금 다르다. 연혁적으로 보면 인간에 대한 탐구보다 세계에 대한 이해가 먼저 등장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대인들에게 자연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흥미롭게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수많은 신들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카오스에서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태어나고, 바다와 밤과 운명이 신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자연을 의미로 묶어내려는 시도였다. 번개는 제우스의 분노였고, 바다는 포세이돈의 호흡이었다. 그러나 항해와 농경, 별의 관찰이 축적되면서 자연 현상이 신의 변덕에 달려 있다기보다 일정한 질서를 지닌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났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화적 설명은 자연철학으로 서서히 변모한다.
내가 그리스 철학을 접하며 흥미롭게 바라본 점은 중세와의 차이였다. 중세의 종교가 종종 신에 반하는 사상을 억압했던 것과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화와 자연철학, 더 나아가 수학적·과학적 설명이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이유 역시 분명하다. 신화는 세계의 의미를 이야기로 설명하고, 철학은 세계의 원리를 개념으로 탐구하며, 과학은 세계의 작동 방식을 관찰과 이론으로 해석한다.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을 다루고 있었기에 공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 사회는 각 자연현상을 담당하는 신들이 존재하는 다신교 사회였다. 그런 세계에서 자연은 무질서한 혼돈이라기보다 조화로운 질서, 곧 코스모스였다. 인간의 호기심이 그 질서를 지탱하는 근원을 찾으려는 방향으로 향했던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근원이 바로 아르케(archē), 만물의 시작과 원리였다.
아르케를 찾는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등장한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보았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끊임없는 변화를 세계의 본질로 보았다. 서로 다른 답이지만 그들의 시도는 공통된 방향을 지닌다. 세계의 복잡한 현상들을 하나의 근원적 질서로 이해하려는 통섭적 사유였다.
그러나 이 흐름을 뒤흔드는 사상가가 등장한다. 바로 파르메니데스다. 그는 변화 자체를 부정한다.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가 생겨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논리 때문이다. 그의 사유는 자연철학의 논의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다. 세계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작은 입자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보는 변화는 이 불변의 입자들이 끊임없이 결합하고 분리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논의의 철학적 함의는 단순하지 않다. 원자는 단지 작은 물질적 입자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신화나 조물주의 의지 없이도 설명할 수 있다는 거대한 사유의 전환을 의미한다. 자연과 세계가 신화의 영역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내려오는 순간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철학적 의미가 더욱 또렷해지는 것은 데모크리토스 이후 약 한 세기 뒤 등장한 에피쿠로스에 이르러서다. 이 시기에 이르러 철학의 관심은 자연의 구조에서 인간의 삶으로 이동한다. 소피스트를 거치며 철학은 “세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인간은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불안을 세계의 불확실성에서 찾았다. 신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끝없는 욕망. 그는 이러한 불안을 해체하기 위한 철학적 도구로 원자론을 선택했다. 다만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엄격한 기계적 결정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clinamen, 즉 ‘편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원자들은 단순히 직선으로 낙하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세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은 편향은 단순한 물리적 가설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완전히 필연적인 기계적 질서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선택과 행위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작은 틈을 마련한다. 에피쿠로스에게 원자론은 자연 설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공포에서 해방시키는 철학이었다.
그는 인간의 영혼 역시 원자의 집합으로 보았다. 따라서 죽음은 원자의 해체일 뿐이며, 감각 역시 그와 함께 사라진다. 죽음 이후의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후 세계 역시 두려워할 대상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번개나 지진 같은 자연 현상도 신의 분노가 아니라 자연의 운동일 뿐이다. 이렇게 세계를 이해할 때 인간의 삶을 지배하던 많은 공포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불안을 제거한 자리에서 에피쿠로스가 주목한 것은 인간의 감각이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흔히 생각하는 자극적인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 정신적 평정이다. 이 점에서 그의 철학은 후대 스토아 철학의 절제와도 어딘가 닮은 인상을 남긴다.
이렇게 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세계 이해가 인간 이해보다 먼저 등장한 이유도 분명해진다. 세계를 설명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삶을 둘러싼 공포와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은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세계가 어떤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지 이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고대 그리스 철학이 끊임없이 우주를 바라보았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길고 긴 시간을 건너 그들의 사유를 읽고 이해하려 하는 것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세계로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는 철학적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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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번은 벽돌책
장강명 지음 / 글항아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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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소설을 엄청나게 좋아하는데다 벽돌책에 깊은 로망이 있던 내게, 살면서 한 번은 벽돌책이란 제목의 도서 소개 책은 제목 자체가 유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500쪽이 넘으면 심정적으로 난 벽돌책을 읽고 있어, 라고 생각하는 인간이지만, 이 티저북을 읽게 되면서 벽돌책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흔히 벽돌책은 두께와 페이지 수로 정해지곤 한다. 일단 무게감이 남다르고,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완독 자체가 하나의 정신적 훈장처럼 다가오는 책들. 그런 게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벽돌책의 대중적 이미지가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 기준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걸 느꼈다. 어쩌면, 벽돌책이란, 단지 두꺼운 책이 아니라, 읽는 동안 사고의 구조가 바뀌는 책이어야 그 이름에 걸맞는 책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저자는 왜 벽돌책에 꽂혔을까. 왜 수많은 독서 리뷰 중에서 벽돌책 칼럼을 십년 넘게 써왔을까. 서문을 읽다 보면 연재 초기에 이미 읽어둔 벽돌책은 다 소진하고 그 다음에는 마치 오기라도 부리듯 도서관에서 온갖 벽돌책을 섭렵하며 이 책을 낸 것 같은데 나는 그 모습이 조금 우스우면서도 퍽 감동적이었다. 어쩌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책 읽기 버거워하는 현대의 독자들의 머리에 잠재적인 서고를 설치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읽지 않은 책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안티 라이브러리(antilibrary)란 개념을 말한 바 있었다. 이 책의 용도 역시 우리 머릿속에 아직 읽지 않은 안티 라이브러리를 설치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가 없었다. 실제로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권의 읽고 싶은 벽돌책이 생겨서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저자의 글은 달필이라 페이지는 거침없이 넘어갔지만, 저자의 주장 가운데 몇 가지 논쟁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감상평을 빙자해서 조금 써보고자 한다. 저자는 벽돌책 완독은 다른 행위로 대체하기 어려운 독자의 사고체계에 가해지는 일종의 충격이라고 말하며, 700쪽 이상인 책을 한 번이라도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이후 모든 텍스트를 대하는 기준이 달라진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나는 이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내 독서 경험은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열권이 넘는 대하소설을 탐독해 왔다. 나는 하지만 내게 벽돌책의 독파가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느낌은 없었다. <토지>를 읽는 동안 고구마를 수천 개 물도 없이 씹고 있는 것 같은 인물의 답답함에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던 느낌이 아직도 선하고, 태백산맥를 통해 알게 된 해방직후의 빨치산과 이념투쟁은 이후 내가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었으며, 아리랑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민중의 고통과 독립 운동의 처절함을, 임꺽정을 통해 조선 중후기의 민초들의 고달픈 삶을 읽는 감각이 생겼으며, <구 대망-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를 읽으며 일본 전국시대의 시대상과 임진왜란의 탄생 배경을 읽게 되었고 <삼국지>를 통해서 중국의 고대사에 대한 이해와 인간 군상의 욕망을 읽게 되었지만, 이 모든 책들이 준 가르침은, 단권이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다른 책들이 준 영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수천 페이지가 족히 넘는 책들을 읽어내려간 건 단순히 재미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도 하루에 두 세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가장 큰 동기도 재미 때문이다. 그 책이 벽돌책이든 아니든, 내게 있어 내 머릿 속의 사고의 구조를 단 한 권의 책이 설치해준다는 말은 내게 자칫 위험하게 들린다. 내 사유 근육을 만들어낸 건 수많은 책들의 학제간, 혹은 통섭적 연쇄 작용 때문이다. 내게 독서는 그렇기에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과정이고 그에 대해 쉼없이 답을 내리는 과정이다. 어떤 책은 그 과정을 좀더 쉽게 하기도 하고, 어떤 책은 질문의 단초를 던져주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내가 읽어온 무수한 책들 모두가 시간이라는 거대한 마그마 속에서 녹아들어 내 삶 전체를 통해 조금씩 구현되는 게 사고력이 아닐까. 하지만 그건 또 달리 말하자면, 좋아하는 책은 있어도 이 책이 네 삶을 바꾸었다고 말할 단 한 권의 인생책이 뭐야 라고 묻는다면, 아직 그에 즉각적으로 답할 만큼 확고한 인생책을 못만난 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벽돌책의 기준을 두께가 아니라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미래의, 내 사유의 지도를 개편할 책으로 정의하고 싶다. 읽는 동안 생각이 흔들리고, 때로는 저자와 속으로 논쟁하게 만들며, 책을 덮은 뒤에도 질문이 남는 책. 그런 책이라면 설령 얇다 해도 내게는 충분히 벽돌책일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독서였다. 저자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조용히 논쟁하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은 책이란 결국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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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불안하기 때문이야 특서 청소년문학 46
임지형 외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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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집은 청소년의 불안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양한 형식과 장르로 풀어보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학교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부터 재난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서사까지, 작품들은 비교적 넓은 스펙트럼의 소재를 활용해 청소년이 경험하는 불안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기획 자체는 분명 의미가 있다. 청소년문학이 종종 단일한 현실 서사나 교훈적 메시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 현실을 생각하면, 장르적 상상력과 사건 중심의 전개를 통해 독서의 흥미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신선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몇몇 작품은 빠른 전개와 독특한 상황 설정을 통해 이야기의 재미까지 부여한다.

 

그러나 읽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한계 역시 분명하다. 많은 작품이 흥미로운 소재를 제시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 소재를 충분히 밀도 있게 확장하지 못한 채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정리되곤 했다. 갈등의 긴장이 충분히 축적되기 전에 서사가 급하게 결말로 수렴하면서 이야기의 여운이 얕아지는 순간들이 네 개의 소설에서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작품들은 완결된 서사라기보다 아이디어의 스케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일부 작품에서는 인물의 행동이나 상황을 통해 독자가 의미를 읽어내기보다, 작품이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독해의 방향을 안내한다. 청소년 독자를 고려한 선택일 수 있지만, 독자의 해석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 두었다면 이야기의 깊이는 훨씬 풍부해졌을 것이다. 최근 청소년 독자들의 문해력과 독서 경험을 고려한다면, 작가들이 독자를 조금 더 신뢰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남는다.

 

편집상의 아쉬움도 발견된다. 122쪽에서 교무실과 행정실의 협박 전화의 서술 순서가 어긋나 서사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지는 부분은 명백한 편집상의 오류로 보인다. 작품의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긴장을 끊는 요소라는 점에서 다음 판에서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대목이다.

 

그럼에도 이 단편집은 청소년의 불안을 하나의 정답이나 교훈으로 수렴시키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상황 속에서 탐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완성도의 편차와 서사의 단순함이라는 한계는 분명하지만, 이야기의 재미와 소재의 독특함은 분명한 장점으로 남는다. 앞으로 독자의 해석 능력을 조금 더 신뢰하고 서사와 감정선의 밀도를 높여 간다면, 훨씬 인상적인 작품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편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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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씹어 먹는 국어 4 - 설명하는 글 맛있게 먹기 특서 어린이교양 6
박현숙 지음, 박기종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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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이들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말은 교실에서 이제 추상적인 탄식이 아니다. 사교육 현장에서 매일 마주하는 현실은 더 구체적이다. 문장제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하는 이유가 계산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무엇을 묻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조건을 읽지 못하고, 상황을 상상하지 못하며, 문장의 논리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읽기 능력의 붕괴가 곧 사고 능력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문제의식, 그리고 그 원인을 설명하는 글을 읽지 못하는 데서 찾겠다는 진단 하에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제안하는 해법은 명확하다. 설명문을 읽는 방식을 구조적으로 훈련하자는 것이다. 중심 내용을 찾고, 단락의 역할을 구분하며, 원인과 결과를 정리하고, 요약과 재서술을 반복함으로써 글의 뼈대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감상이나 느낌 위주의 독해가 아니라, 설명 방식과 논리 구조를 인식하는 읽기를 목표로 삼는다. 이 접근은 방향성 면에서는 설득력이 있다. 뇌과학 연구에서도 정보를 의미 단위로 묶어 재구성하는 과정이 작업기억과 장기기억의 연결을 강화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고, 교육학적으로도 설명문 구조 인식은 읽기 이해도의 핵심 요소다. 특히 수학과 과학, 사회 과목에서 요구되는 읽기 능력은 문학적 감상이 아니라 이런 구조적 이해에 가깝다.

 

실제 현장에서 이 책의 장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중심 문장이 무엇인지, 중요한 정보는 어디에 놓이는지, 설명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를 반복적으로 훈련하게 하는 구성은 불안한 학습자에게 안정감을 준다. 무엇을 하면 되는지가 분명할수록 아이들은 덜 흔들린다. 예측 가능한 학습 루틴은 정서적 부담을 낮추고, 사고를 시도할 최소한의 여지를 만들어준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사교육 현장에서 충분히 실용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실용성이 동시에 위험 요소로 보이기도 했다. 책에서 제시하는 많은 질문과 활동들이 자칫하면 사고를 유도하는 장치가 아니라, 답의 형식을 외우게 만드는 틀로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심 내용을 찾아보세요”, “이유를 정리해 보세요”,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세요라는 지시는 분명 유용하지만, 그 질문이 왜 필요한지,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인지를 함께 다루지 않으면 아이들은 곧바로 형식만 모방한다. 실제로 아이들은 중심 내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제일 중요한 문장이요라고 답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말이다. 그 문장이 왜 중요한지, 다른 문장과 무엇이 다른지까지 사고가 이어지지 않으면 독해는 표면에서 멈춘다. 이 경우 뇌는 의미를 생성하지 않고, 용어만 저장한다. 메타인지적 언어만 남고 사고의 연결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설명문 훈련이 갖는 정답 지향성이다. 책의 많은 활동은 올바른 중심 내용’, ‘맞는 요약을 전제로 한다. 시험 대비라는 목적에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지만, 사고 훈련의 관점에서는 긴장을 요구한다. 독해력이 약한 아이일수록 틀릴까 봐 말하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 해석하기보다는 답처럼 보이는 문장을 고르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렇게 되면 읽기는 점점 안전한 선택의 문제가 되고, 사고는 위축된다. 교육학적으로 보자면 이는 인지적 위축 상태에 가깝다. 생각을 확장하기보다, 실수하지 않는 전략이 학습된다. 이 상태에서는 독해 연습은 될 수 있어도 사유는 자라기 어렵다.

 

또 다른 우려 요소는 읽기의 목적이 지나치게 기능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설명하는 글을 읽으면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왜 이걸 해야 하는지가 몸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훈련은 쉽게 소진된다. 뇌는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반복에 빠르게 저항한다. 설명문을 읽는 이유가 점수나 수행 과제로만 남아 있을 때, 학습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설명하는 글 읽기가 살아 움직이려면, 아이 자신의 언어로 말해보고, 자신의 생각이 글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경험하는 과정이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자체로 완결된 해답이라기보다, 잘 정리된 도구에 가깝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사고를 키우는 장치가 될 수도 있고, 또 하나의 암기 과제가 될 수도 있다. 사교육 현장에서 이 책을 사용할 때 중요한 것은 정답을 묻기 전에 반드시 생각의 경로를 말하게 하는 훈련일 것이다. 왜 그렇게 읽었는지, 다른 선택지는 왜 배제했는지, 그 판단의 과정을 언어로 풀어내게 해야 한다. 중심 내용을 고르게하기보다 만들게하고, 틀린 요약을 지우기보다 왜 그렇게 이해했는지를 함께 분석해야 한다. 설명문 훈련을 수학·과학 문제와 연결해, 글의 구조가 실제 사고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체감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저자는 분명 독해력 붕괴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사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의 문해력에 대한 공포를 늘 느끼는 내게 그 문제의식은 진지하고, 방법 또한 상당 부분 타당하다. 다만 설명하는 글을 가르친다는 일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그것이 사고를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사고를 대신해 주는 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의 성패는 교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어떤 질문이 던져지는가에 달려 있다. 읽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글을 이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아이의 생각이 움직이도록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양면을 인식한 채 조심스럽게 다루는 사람에게, 이 책은 제 가치를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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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 행성 조사반, 북극곰의 파업을 막아라 - 기후 붕괴 현장에서 마주친 인간과 비인간동물들
남종영 지음, 불키드 그림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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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는 더 이상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현재의 조건이다. 그럼에도 이 위기는 좀처럼 실감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후 변화는 느리게 진행되고, 원인은 복잡하며, 결과는 불균등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느린 속도와 복잡성은 인간에게 사유의 공백을 허락했고, 그 자리를 단순화된 분노와 혐오, 혹은 무기력한 체념이 채워 왔다. 이 책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 북극곰의 파업을 막아라>는 바로 그 공백을 문제 삼는다.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기후 위기를 환경 문제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신 기후 위기를 둘러싼 인간의 태도, 즉 선택적 공감, 단편적 정의감, 그리고 책임을 외주화하는 사고방식을 집요하게 드러낸다. 북극곰, 비둘기, 명태, 투발루 시민 등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례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우리는 이들을 언제나 상징으로 소비해 왔지, 구체적인 관계의 당사자로 상상해 본 적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북극곰은 기후 위기의 대표 이미지로 호출되지만, 실제 정책의 장에서는 관리 대상혹은 위험 요소로 분류된다. 아이슬란드에서 표류해온 북극곰이 사살되는 장면은 이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호해야 할 존재이면서 동시에 제거해야 할 존재라는 이중적 위치는, 인간 중심적 사고가 기후 담론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드러낸다. 비둘기 역시 마찬가지다. 한때 통신 수단이자 전쟁의 도구였던 비둘기는, 기술 발전 이후 도시의 해로운 잉여로 전락했다. 이 책은 이러한 전환이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 변화에 따른 가치 재분류였음을 상기시킨다.

 

이 지점에서 책은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 자연과 공존하려는가, 아니면 공존이라는 말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가. 소고기 대신 닭고기를 먹는 선택, 명태 인공수정 후 방류, 기후 난민을 이민 정책으로만 다루는 태도는 모두 선의로 포장되지만, 그 이면에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도덕적 선택으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깔려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축소가 결국 기후 위기를 더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책의 사유를 한 단계 확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도나 해러웨이다. 해러웨이는 기후 위기를 단순한 과학적 데이터나 윤리적 선언으로만 다루는 방식에 회의적이다. 그녀가 말하는 사변적 우화실뜨기는 과학을 부정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라, 과학이 포착하지 못하는 관계와 맥락을 드러내기 위한 사유의 도구다.

 

해러웨이의 관점에서 보면, 기후 위기는 인류 전체의 문제라는 추상적 문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 누가 더 많이 배출했고, 누가 더 많이 피해를 입고 있으며, 누가 말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는지가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그녀가 철폐주의적 이상 대신 부분적 회복함께 잘 지내기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완전한 순결이나 급진적 단절이 아니라, 이미 얽혀버린 세계 속에서 책임을 나누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해러웨이의 사유를 빌려, 기후 담론 속 혐오의 작동 방식을 해부한다. 혐오는 대상을 단순화한다. 북극곰은 불쌍한 피해자나 위험한 맹수로, 비둘기는 더럽고 성가신 존재로, 기후 난민은 부담스러운 타자로 재현된다. 이러한 재현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감정을 배출하는 통로로 기능한다. 분노는 잠시 해소되지만, 구조는 유지된다.

 

결국 이 책이 제안하는 태도는 거창한 해결책이 아니라 사유의 전환이다. 기후 위기를 누가 잘못했는가의 문제로만 묻는 대신, ‘어떤 관계 속에서 이런 결과가 만들어졌는가를 질문하자는 것이다. 이는 혐오에서 책임으로, 선언에서 성찰로 이동하자는 요청이기도 하다.

 

중립적으로 보자면, 이 책은 명확한 정책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점이 이 책의 한계이자 장점이다. 기후 위기가 총체적 난국이라면, 단일한 해법 역시 환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신 이 책은 독자에게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 보이는 것만 믿지 말고, 선의를 의심하고,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존재의 위치를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기후 위기를 둘러싼 담론이 점점 더 극단화되고 있는 지금, 이 책은 냉소와 도덕주의 사이의 좁은 길을 제시한다. 혐오를 동력으로 삼지 않으면서도 무책임한 낙관에 머물지 않는 태도. 그것이 이 책이 기후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며, 동시에 독자에게 요구하는 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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