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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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를 읽으며 - 팽나무가 인간의 역사를 바라볼 때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특정 인물의 비극도, 극적인 사건도 아니었다. 600년을 살아온 팽나무가 마지막 장면에서 내뱉는 단 한 문장이었다.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

 

이 말은 위로도, 고발도, 교훈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인간을 부르는 방식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이 건조하고 감정 절제된 소설이 놀라울 만큼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역사를 자연의 시간 속에 다시 배치하기 때문이다.

 

1. 왜 하필 팽나무여야 했는가

 

팽나무는 한국의 생태·문화사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점한다. 수백 년을 사는 장수목이자, 마을 어귀에 서서 사람의 출입과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는 존재. 서낭신으로 모셔지며 인간의 삶과 죽음, 탄생과 이주를 모두 보아온 나무다. 저자가 팽나무를 화자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토속적 상징 때문이 아니다. 팽나무는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 단위로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다. 인간의 왕조 교체, 종교의 흥망, 전쟁과 학살은 팽나무에게 하나의 계절 변화처럼 지나간다. 이 소설에서 팽나무는 기억하는 신이 아니라, 지켜보는 자연이다. 그래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더 잔혹하고 정확하다.

 

2.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고리

 

이 소설은 개똥지빠귀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새의 죽음으로 그 뱃속의 씨앗인 팽나무가 탄생한다. 팽나무의 탄생은 버려진 아이 몽각의 생과 사로 이어진다. 몽각은 자신의 사체를 자신이 먹고 살게 해준 대자연에 보시한다. 몽각의 사체 위로 기어오르는 게는 수많은 새들의 먹이가 되고, 팽나무에 깃든 도요새 무리의 번식과 죽음은 생합의 탄생의 기반이 된다. 생합으로 대표되는 갯벌 위에서 다시 인간의 역사가 쓰여진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의 이 교차 구조는 인간이 특별할 것 없는 존재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작품 속에서 몽각의 죽음에 감정적 서술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몸에 바닷물이 밀려들고, 칠게들이 몰려드는 장면은 애도 없는 죽음이 아니라, 자연으로의 회귀 그 자체다. 이는 <사피엔스><, , >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자연주의적 관점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자연의 정점이 아니라, 그 일부일 뿐이라는 인식 말이다. 이 소설은 그 명제를 서사로 구현한다.

 

3. 특별할 것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

 

이 소설에서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몽각은 수행자도, 영웅도 되지 못한다. 당골네, 춘삼, 경순, 경수, 동수로 이어지는 계보 역시 위대한 진보를 이루지 않는다. 그들은 떠나고, 속하고, 배신하고, 믿고, 죽는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거부하려는 인간의 태도다. 갯벌을 막고, 바다를 죽이고, 새떼를 몰살시키는 행위는 생존의 전략이 아니라 오만이다. 이 소설이 인간을 비판하지 않고 연민하는 이유는, 인간이 악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어리석은 존재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저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다양한 종교, 하늘과 연결되려는 인간의 몸부림

 

이 소설 속에는 참 많은 종교인이 등장한다. 불교, 무속, 천주교, 동학. 이 소설에 종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종교는 모두 하늘과 연결되려는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절에서 자란 몽각, 서낭신을 모시는 당골네, 박해 속에서도 신을 선택한 유 도사공, 하늘님을 품고 죽어간 동학군 경수. 그러나 어떤 종교도 소설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대신 종교는 시대마다 소외된 인간들의 선택지로 등장한다. 이는 초월을 향한 믿음이라기보다, 구조적 폭력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다. 흥미로운 점은 마지막에 신부가 마주하는 존재가 신이 아니라 팽나무라는 사실이다. 구원은 하늘에 있지 않고,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 곁에 머물던 자연에 있었다.

 

5. 허무주의가 아닌, 관계의 윤리

 

이 소설은 어떤 면으로 봐도 희망적이지 않지만, 놀랍게도 그 결말이 허무주의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저자는 감정의 고조를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저자는 삶과 자연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글 속에 그려지는 인간의 고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를 때 비극이 구조화될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팽나무가 유신부를 부르는 목소리는 심판이 아니라, 오래 기다린 존재의 확인이다. “인제 오냐라는 말에는 분노보다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다.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은 너무 많은 것들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쳐왔으나, 자연은 늘 그 자리에서 그 자신의 회복력으로 기다리고, 스스로를 달래며 인간을 품어준다. 오래된 팽나무 할매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인간에게 묻는다. 우리가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는 동안, 자연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느냐고. 사피엔스가 인간의 허구를 해체하고, , , 가 환경의 힘을 드러냈다면, 할매는 그 모든 사유를 한 그루 나무의 시선으로 내려놓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고, 울리지 않는다. 대신 독자를 자연의 시간 속으로 잠시 끌어당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에 내 안에 남은 것은 감동이 아니라, 먹먹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였는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사실까지 후회 한편으로는, 팽나무 할매가 쓰러지지 않은 아직은, 조금 더 제대로 살아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다짐이 고개를 든다.

 

인간의 문제를 인간 존재에 국한하지 않은 장구한 서사 속에서 나는, 그리고 이 소설을 접하는 모든 독자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지구를 살아가는 운명 공동체로서의 우리의 한계를, 그리고 공존의 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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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엔 모두 남남이 되기로 해
오영은 지음 / 김영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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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엔 모두 남남이 되기로 해

: 감각·주의·자기조절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일상의 회복 기술

 

오영은님의 오후엔 모두 남남이 되기로 해는 표면적으로는 일상의 소소한 장면을 기록한 에세이지만,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감각 조절, 주의 전환, 자기조절(self-regulation)이라는 핵심적인 인간 정신 기능을 다루는 흥미로운 텍스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독자의 감정적 위로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로, 과부하, 성취 압박, 창작적 공백 등 현대인이 공통적으로 겪는 심리적 현상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우리가 매일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정신적 조절의 메커니즘을 탐구하도록 안내한다.

 

책에서 저자는 종종 글을 쓰고 싶은데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는 단순한 작가의 고민이 아니라,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실행 기능(executive function) 과부하의 대표적 현상과 닿아 있다.

 

실행 기능은 작업 전환, 계획 수립, 억제 조절, 지속적 주의 등을 담당하는데, 이 기능이 피로하거나 감각 자극으로 과도하게 소모될 경우 실제 능력보다 훨씬 낮은 퍼포먼스를 보인다. , “꾸준히 하고 싶은데 되지 않는다는 경험은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에너지 배분 실패에 가깝다.

 

책은 이를 명확히 설명하진 않지만, 저자의 일상 묘사는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창작의 공백을 자책하는 대신, 몸과 마음의 여유가 회복되었을 때 다시 문장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꾸준히 하지 못함을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지적 리듬의 일부로 재해석하게 만든다.

 

책 전반에 흐르는 중요한 정조는 아날로그적 감각이다. 저자는 현금 결제의 촉감, 종이의 질감, 오프라인 쇼핑의 천천한 리듬 등 디지털 환경에서 사라진 감각적 경험을 자주 언급한다.

 

인지과학에서는 이를 감각 통합(sensory integration) 혹은 감각 조절(sensory modulation)의 영역으로 설명한다. 특히 디지털 환경은 주의 자원을 빠르게 소모시키는 반면, 아날로그 환경은 예측 가능하며 느린 감각 자극을 제공한다. 이런 자극은 뇌의 생리적 각성도를 낮춰 안정감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저자가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유난히 소중하게 묘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과정이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과부하된 신경계를 재조정하는 안전 신호(safety cue)’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계획을 모두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 “오늘은 금요일이니 쉬어도 된다이런 메시지는 자기 완화(self-soothing)의 언어이다. 이 문장들은 단순한 감성적 위로가 아니라, 심리학적 분류로 보면 인지 재평가(cognitive reappraisal) 전략에 가깝다. 목표 실패를 실패로 규정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조정 가능한 목표로 재해석하는 것, 이는 감정 조절 연구에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며, 스트레스 반응을 줄이고 자기 효능감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의 에세이는 생활의 실패를 정당화하는 대신, “실패를 조정 가능한 변이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제시한다. 그 결과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자비(self-compassion)를 학습하게 된다.

 

저자는 일상의 사소한 지점을 오래 들여다보는 방식을 사용한다. 예컨대 카페 직원의 표정 변화, 쇼핑을 하며 느끼는 촉각, 자동차의 진동 등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이것은 주의의 방향성과 깊이(attentional style)를 보여주는 사례다.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러한 집중 방식은, 실제로는 감정 회복의 중요한 요소다.

 

심리학에서 명상(mindfulness)이 그러하듯,현재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은 전전두엽의 활동을 안정시키고 스트레스 지표를 낮춘다. 저자가 천천히 관찰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일상을 정교하게 살기 위함이 아니라, 주의를 세밀하게 조절함으로써 자기 감정을 재정렬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책은 기록의 역할에 대해 깊이 언급하지 않지만, 저자의 글 전체가 보여주는 바는 명확하다.글쓰기는 감정 표현의 도구를 넘어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을 보조하는 외부 저장장치로 기능한다. 일상의 감정·감각·판단을 텍스트로 외부화함으로써 저자는 인지적 부하를 줄이고 자기 정체성을 재구성한다. 이 과정은 인간의 뇌가 원래 수행하기 어려운 기능을 글이라는 외부 도구가 대신하는 사례다.

 

따라서 이 책은 일상의 감정 기록이라는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라, 감정 조절·주의 전환·자기 이해를 학습하는 인지적 도구로도 읽힌다.

 

오후엔 모두 남남이 되기로 해는 견고한 논리로 조언을 제공하는 심리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힐링 에세이이라는 감성적 장르를 넘어, 내게는 지쳐 있는 개인이 자기조절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의 사례집으로 보였다. 읽고 나면 큰 위로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의 신경계는 분명히 조금 더 조용해지고, 머릿속의 혼탁함은 약간 사라지며, “오늘 하루는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감각이 다시 돌아온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현대적 피로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형태의 따뜻함을 제공하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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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읽기 5 - 구약역사 : 사무엘서 단테의 신곡 읽기 5
진영선 지음 / 메이킹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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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정치학, 기억되지 않은 몸들, 현대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사무엘서, 단테의 신곡읽기

 

 

구약 사무엘서는 흔히 이스라엘의 왕정 수립과 국가 형성이라는 역사적 전환기를 기록한 문헌으로 읽혀 왔다. 그러나 현대 여성이, 그리고 여성 주의적 관점으로 이 성서 속 여성 인물들에게 눈길을 돌릴 때, 사무엘서는 단순한 고대 종교 서사를 넘어 여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지워지고, 침묵이 어떻게 제도화되었는지를 폭로하는 고고학적 텍스트가 된다. 단테의 신곡 읽기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내가 주목한 건 바로 성서 속에 스치듯이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이었다.

 

사무엘서 속 여성은 드물게, 그것도 매우 짧게만 등장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등장할 때조차 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나, 밧세바, 미갈, 다말 등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서사 전개의 핵심적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이들을 이야기의 주체로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은 사건을 일으키는 배경’, ‘남성 주인공의 영적·정치적 전환의 매개’, 혹은 도덕적 교훈의 장치로 기능한다. 그들의 몸은 서사를 움직이지만, 그들의 의지·감정·판단·세계관은 거의 기록되지 않는다.

 

이 침묵은 우연한 서술적 결함이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 구조가 여성의 욕망과 경험을 삭제하는 방식을 반영한다. 사무엘서를 여성주의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 억압의 구조를 해체하고, 기억되지 않은 여성의 존재를 다시 드러내는 작업이다.

 

사무엘서의 첫 장면은 난임으로 고통받는 여인 한나의 침묵이다. 그녀의 입술은 움직이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이는 여성의 고통이 제도로부터 어떻게 침묵으로만 승인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한나는 분명 자신의 삶에 대한 요구를 표현하지만, 그의 기도는 사회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으나,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의 소망은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신을 위한 아이’, ‘국가의 지도자 탄생이라는 종교적 목적을 통해서만 정당화된다.

 

여성의 욕망은 신의 계획안에서만 승인된다. 이것이 고대의 일만은 아니다. 현대 여성 또한 여전히 결혼·출산·육아 같은 사회적 틀 속에서만 여성의 선택이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 사무엘서 속 한나의 침묵은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구조적이다.

 

사무엘서에서 가장 논쟁적인 여성은 밧세바다. 왕 다윗은 자신의 권력을 기반으로 그녀를 소유한다. 이후 밧세바의 남편은 왕의 명령에 의해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성서는 이 사건을 다윗의 죄라고 규정할 뿐, 밧세바의 피해 경험을 한 번도 서술하지 않는다.

 

밧세바는 철저히 객체화된다. 그녀의 몸은 권력이 사용하는 도구이며, 그녀의 감정은 역사 서술 밖으로 완전히 추방된다. 이 침묵은 단지 성서적 서술 방식의 특성일까? 그보다는 성폭력을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권력의 정치적 사건으로만 다루는 오래된 전통의 일부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미투 운동이 폭발적이었던 이유도 여기 있다. 너무 오랫동안 여성의 고통은 사건 뒤의 공백으로만 남아 있었다. 밧세바의 침묵은 텍스트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여성에게 왜 우리는 이렇게 늦게까지 말할 수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말은 사무엘서에서 거의 유일하게 스스로 말하는 여성이다. 동침을 요구하는 이복오라비 암논에게 그녀는 이렇게 선을 긋는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고대 문헌에서 보기 드문, 여성의 분명한 경계 설정이다. 그러나 결과는 비극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무 힘도 갖지 못한다. 성폭력은 일어나고, 텍스트는 곧바로 다말의 목소리를 삭제한다. 이후 서사는 다말의 슬픔을 앗살롬의 복수라는 남성 영웅 서사로 전환시켜버린다.

 

여성의 고통은 남성의 분노로 전유된다. 이 구조는 현대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다. 여성의 피해가 남성의 정치적 논쟁으로 대체되거나, ‘가족의 명예사회적 파장으로 환원되는 경우는 여전히 많다. 다말은 그 원형이다.

 

미갈의 서사는 여성에게 주어진 감정 노동의 고전적 사례다. 사울의 딸인 그녀는 다윗을 사랑하여 목숨을 걸고 그를 돕지만, 이후 그녀의 감정은 다윗의 종교적 권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을 받는다. 미갈의 불임은 흔히 신적 심판으로 해석되었으나,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비판적 여성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상징적 장치다.

 

여성이 남성을 비판하면 사랑의 실패로 해석되고, 여성이 공적 영역을 비판하면 오만함으로 규정된다. 미갈의 침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여성 혐오의 오래된 구조를 비춘다.

 

사무엘서의 여성들은 모두 말을 빼앗긴다. 그러나 이 침묵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가 여성의 말하기를 어떻게 제한하는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신곡 읽기 사무엘서가 내게 준 가장 큰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누가 기록을 작성하는가? 여성은 텍스트의 중심에 있음에도 기록의 중심에는 없다. 이는 오늘날 뉴스, 정치, 직장에서 여성의 경험이 종종 통계나 사건으로만 환원되는 구조와 맞닿아 있다.

그 다음은 누구의 고통이 정의의 기준이 되는가? 이다. 밧세바와 다말의 고통은 주류의 고민거리가 되지 못한다. 대신 남성 인물의 회개, 복수, 권력 정당화가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오늘날에도 피해자보다 가해자와 사회적 파장에 더 초점을 맞추는 보도 방식이 반복된다.

마지막은 여성은 어떻게 존재는 있지만 주체는 아닌위치로 배치되는가?이다. 한나와 밧세바는 이야기의 중심을 움직인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현대 여성도 종종 비슷한 위치에 놓인다. 여성은 가정, 직장, 사회에서 기능적 핵심이지만, 구조적 권한은 남성에게 있다.

 

우리가 해설서의 이름을 빌려서 성서, 사무엘서를 다시 읽는 의의는 무엇일까. 내게 이 책은 단순히 성서의 내용을 알고 싶기 때문도 아니었고, 역사서나 고대 문학으로 읽히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사무엘서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워진 여성의 자리를 복원하는 역사적·윤리적 시도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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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경다양성 커플일까요 - ADHD를 포함한 독특한 사람들의 관계 맺기
로나 헤커 지음, 성주연 외 옮김 / 학지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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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경다양성 커플일까요?

 

NT인 줄 알았던 내가, 신경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에 대하여

 

오랫동안 나는 스스로를 평균적인 신경전형 사람이라고 규정해왔다. 사회 활동도 가능했고, 감정 표현이나 관계 유지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었으며, 겉보기에는 일상 기능에도 큰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경다양성 커플일까요?>를 읽으며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사용해온 뇌의 운영체제가 사실은 전혀 다른 매뉴얼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근본적 질문을 마주했다.

 

이 책은 단순한 관계 심리서가 아니라, 인지과학·신경심리학·감각처리 연구의 최신 통찰을 바탕으로 짜여 있다. 각 장면은 왜 어떤 사람은 과도하게 피곤해지고, 왜 어떤 관계는 오해를 반복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신경계의 정보처리 방식, 감각 민감성, 실행 기능의 차이로 설명해낸다. 그리고 그 설명 구조가 놀라울 정도로 내 삶의 경험과 맞아떨어졌다.

 

나는 언제나 스몰토크가 불편했다. 너무 가볍거나 의미 없는 대화를 할 때면 에너지가 빠르게 고갈되고, 대화의 맥락을 붙잡으려 애쓰는 동안 머리가 과열되는 느낌을 자주 경험했다. 책은 이를 감각 정보 처리 차원의 현상으로 설명한다.

 

신경다양인은 언어를 연결의 장치보다 정보 단위로 처리한다. 의미 없는 말은 처리 비용만 높인다.

 

, 가벼운 소통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 부하가 증가해 피로도가 오르는 것이다. 이 설명은 내가 스몰토크를 회피하던 이유를 단번에 명쾌하게 보여줬다.

 

또한 나는 오래전부터 씹는 소리, 반복되는 소리, 먹방 같은 것들에 극심한 불쾌감을 느껴왔다. 책에서 제시하는 미소포니아는 단순한 예민함이 아니라, 청각 피질과 편도체의 과활성으로 인해 특정 소리를 위협으로 오인하여 과도하게 반응하는 신경학적 현상이라고 알려준다. 나는 그 설명을 읽으며 처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뇌가 특정 감각을 다르게 처리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배우자와의 신체적 접촉에서 과부하를 느끼는 경험도 설명되었다. 난 피로할 때 신체 접촉이 고통에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책에 따르면 일부 신경다양인에게는 촉각 자극이 과도하게 증폭되어 들어오며, 이는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감각 신경계의 과흥분 상태에서 기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그동안 설명하기 어려웠던 내 몸의 반응들이 모두 하나의 지도로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저자는 반복적으로 실행 기능의 개별 요소주의 조절, 작업 기억, 시간 관리, 우선순위 설정가 어떻게 관계에서 충돌을 만들 수 있는지 설명한다. 나는 종종 하루에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한 번에 계획하고, 잘 해내지 못하면 자책에 빠지고, 또다시 과한 계획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패턴을 반복해 왔다. 배우자는 이를 욕심으로 해석했지만, 책은 이를 명확히 ADHD 스펙트럼 혹은 ND 특유의 실행기능 부하로 본다. 시간 감각이 흐려짐, 해야 할 일을 작업 기억에 오래 붙잡아 두지 못함, 과업을 쪼개지 못하고 한 번에 거대한 단위로 시도함, 성취-좌절-보상 추구가 반복되는 루프, 이 모든 것이 내가 평생 겪어온 패턴과 거의 일치했다. 이때 느껴지는 충동성 역시 "의지 부족"이 아니라, 인지적 부하를 줄이기 위한 빠른 우회 전략이었다는 설명은 나를 깊이 안도하게 했다.

 

내가 특정 유형의 사람, 경계선을 쉽게 넘거나, 타인을 미묘하게 무시하거나, 자신을 과하게 포장하는 사람에게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설명되었다. 신경다양인은 사회적 위협 신호를 과민 탐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과거 대인관계에서 겪은 상처 경험(왕따, 소문 피해 등)과 결합되면 빠른 패턴 인식 시스템이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첫인상에 대한 촉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 왔고, 실제로 문제적 인간 관계 대부분에서 그 촉은 정답이었다.

 

책을 통해 나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감정·표정의 미세 신호를 고해상도로 감지하는 신경 시스템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 내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 정보량이 많은 방식으로 세상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파트는 사회적 가면 파트였다. 나는 새로운 관계에서는 극도로 친절하고 사회적 규범을 충실하게 따르며, 때로는 역할 수행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친해질수록 그 가면을 벗고 본래의 흡수식 감각 처리와 직설적 사고가 드러나는 편이었다. 책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경다양인은 신경전형의 언어 체계를 분석하여 모방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적응해왔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본래의 신경 패턴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많은 ND들은 연애 초반과 달라졌다” “네가 처음만큼 다정하지 않다라는 오해를 받기 쉽다. 나는 이 진술을 읽는 순간, 오랜 상처의 구조가 설명되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신경다양성과 신경전형성이 짝을 이뤘을 때 가장 흔히 발생하는 문제들을 책임 분배의 불균형인지 처리 방식의 차이로 설명한다. ND는 실행 기능 부담을 과도하게 떠안게 되고 NT는 계획 과부하를 제어하지 못하는 ND를 보며 답답함을 느끼고 ND는 피로와 감각 과부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오해를 낳는다. 이 설명은 나와 남편의 갈등 패턴을 거의 그대로 재현했다. 특히 터치 과부하나 성적 자극의 민감도 차이는 단순한 취향 문제가 아니라 감각 처리 체계의 구조적 차이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우리 관계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 둘이 서로의 신경계를 모른 채 살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이 책은 내가 누구인가를 신경과학적으로 명명해준 첫 책이다.

<우리는 신경다양성 커플일까요?>는 심리적 공감의 차원을 넘어서, 감각 처리, 실행 기능, 사회적 처리, 정서 조절, 신경계의 부하 패턴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단지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신경구조를 가진 사람이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한 감각 자극들에는 뇌의 생물학적 이유가 있었다.

관계 속에서 반복되던 오해는 의도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차이였다.

내가 살아오며 느끼던 소외감, 에너지 고갈, 패턴 집착, 첫인상의 정확성은 한 가지 언어로 설명될 수 있었다. 즉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 신경계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이해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에게 훨씬 더 너그러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순히 커플 문제 해결서가 아니다. 자신의 뇌의 작동 방식을 처음으로 구조적으로 이해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깊은 해방감을 선물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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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 - 더 이상 불안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키렌 슈나크 지음, 김진주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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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시대의 징후다

 

 

현대의 불안을 더 이상 개인의 내면적 취약성으로 환원해 바라보던 오래된 시각은 이미 시대착오적이 되었다. 불안은 더 이상 개인의 성격 문제의지박약으로 규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불안 장애의 급증, 우울증의 만연, 스트레스 관련 질환의 폭발적 증가는 일종의 개인적 결함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구조가 만들어낸 집단적 현상에 가깝다. 키렌 슈나크의 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전제로 출발하며, 불안을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생리·사회 구조·심리적 환경이 맞물린 총체적 현상으로 다룬다.

 

책의 효용은 불안을 해석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불안을 다루는 체계적 도구들을 소개하면서, 불안이 인간의 생존 시스템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반응임을 강조한다. 오늘날의 불안은 주로 사회경제적 구조 속에서 배양된다. 불안정 노동의 확대, 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자영업자의 급증, 고용 안전망의 붕괴, 경기 침체, 과도한 경쟁 체제, 핵가족화를 넘어 1인 가구가 다수가 된 사회의 고립감, SNS가 만든 비교와 감시의 문화, 비대면 접촉의 증가 등은 불안을 정상화시키는 환경적 조건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형태로든 예측 불가능성을 삶에 내장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고용은 더 유연해졌지만 동시에 더 취약해졌고, 관계는 더 다양해졌지만 더 불안정해졌으며, 기술은 더 발전했지만 정서적 고립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은 개인의 심리적 기반을 뒤흔들며, 불안을 하나의 시대 징후로 만든다. 저자는 이러한 맥락을 감지한 것처럼 개인이 불안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 당신이 약해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무력감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을 다루는 방식이 충분히 훈련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불안을 없애려 하지 말고 불안에 대한 반응을 배울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인지적 접근뿐 아니라 신체 기반·감각 기반 조절 기법을 폭넓게 소개한다.

 

책에서 강조하는 첫 번째 전환은 불안을 생각의 문제로만 다루지 말라는 것이다. 불안은 감정 이전에 신경계의 생리적 반응이며, 공포 회로가 켜지는 과정이 신체에서 먼저 일어난다. 심박수 증가, 근육 긴장, 열감, 메스꺼움, 손 떨림 등은 모두 신경계의 전형적 반응이다. 책을 통해 저자는 신체 감각을 기록하는 과제를 제시하며, 불안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이 내 몸이 무엇을 말하는지 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분명한 인문학적 전환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인간은 이성을 중심으로 자아를 구성해왔지만, 현대의 불안은 그 서사를 무너뜨린다. 몸은 이성보다 먼저 감정을 읽고 드러낸다. 그렇기에 불안을 다루는 방법은 결국 신체 감각을 회피하지 않고 관찰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책의 독창성은 단순히 상담적 조언을 넘어서 실제로 신경계를 낮추는 간단한 기술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껌씹긴, 얼음 찜질, 간단한 신체활동, 운동, , 노래 등 다채로운 방식의 쉽고 일상적인 긴장 완화 방식을 책은 꼼꼼하게 소개한다.

 

껌을 씹는 행위는 턱의 리듬성 움직임을 통해 과도한 에너지를 방출하고, 뇌의 혈류량을 높여 집중력과 기억력을 증진시키며, 긴장을 완화한다. 이는 생존 반응에서 벗어나 보다 안정된 상태로 신경계를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또 얼음의 강한 감각은 신경계를 순식간에 현재로 끌어당긴다. SNS·뉴스·경제 위기·미래 불확실성으로 과열된 신경계는 빠른 온도 자극에 반응하며 과도한 각성 상태에서 빠져나온다. 이것은 현대인의 불안을 진정시키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도구이다.

 

허밍, 노래 부르기, 낮은 목소리의 발성 반복은 미주신경을 자극해 신체를 진정 모드로 전환한다. 사회적 고립과 비대면 접촉 증가로 인해 감정 표현이 줄어든 현대인에게 특히 유용한 조절 방식이다. 목소리는 자기 자신을 달래는 언어 이전의 언어이다.

 

춤추기나 운동 같은 신체의 큰 움직임은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하고 코르티솔을 낮춘다. 불안이 깊을수록 몸이 웅크리는 성향이 강해지는데, 춤은 그 반대를 요구한다. 고립, 정서적 침잠,좌식 노동으로 체화된 긴장을 해소하는 데 탁월하다. 인류는 원시 시대부터 음악과 움직임을 통해 집단적 스트레스를 조절해왔다.

 

이러한 기술들은 단순한 팁을 넘어서, 현대인이 상실한 신체 감각을 회복하는 과정에 가깝다. 우리의 불안은 주로 머릿속에서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감당하지 못하는 과부하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의 불안은 아래의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확산되고 있다. 플랫폼 노동, 프리랜스 확산, 고용 불안정, 자영업의 수익 구조 악화와 종속성 심화, 장기간 이어진 경제 불황과 미래 예측 불가능성, 핵가족, 1인가구 증가로 인한 정서적 고립, SNS 비교 문화, 감정의 과잉 노출, 대면 관계의 축소, 팬데믹 이후 강화된 거리감, 사회적 고립감 증가 등, 개인의 불안을 부추기는 요소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는 개인의 불안이 사적 경험을 넘어 사회 구조 자체가 불안정을 내장하고 있는 시대임을 시사한다. ‘노력하면 된다는 낡은 서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저자가 불안을 비난하지 않고, 이해하고, 재조절하도록 안내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불안은 개인이 만들어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이 견디기 어려운 세계의 구조적 조건이 불러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안을 다루는 첫걸음은 자기 비난을 멈추는 것이다. 불안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며, 더 강한 정신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도 아니다. 불안은 생존을 위해 설계된 신경 시스템이 현대 사회의 과도한 속도와 압력에 맞서 피로해진 결과다.

 

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안을 제거하거나 통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반응 방식을 다시 배워 몸의 감각을 신뢰하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개인의 회복 탄력성이 아니라, 개인과 신체, 감각과 환경, 사회 구조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인문학적으로 통찰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현대인은 더 많은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더 많은 불안정성을 떠안게 되었다. 이 책은 그 불안을 개인 내부의 결함으로 환원하는 대신, 불안을 몸과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시 바라보게 해준다. 불안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이해하는 일이다.

 

이 책은 불안이라는 감정 뒤에 숨겨진 신체의 언어, 사회의 구조, 시대의 흐름을 동시에 읽도록 이끄는 드문 안내서다. 불안이 깊은 사람일수록 이 책의 실천적 조언은 몸에 빠르게 가닿을 것이다. 이 책은 불안을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동시에 불안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시대적 폭력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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