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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경다양성 커플일까요 - ADHD를 포함한 독특한 사람들의 관계 맺기
로나 헤커 지음, 성주연 외 옮김 / 학지사 / 2025년 11월
평점 :
『우리는 신경다양성 커플일까요?』
— NT인 줄 알았던 내가, 신경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에 대하여
오랫동안 나는 스스로를 ‘평균적인 신경전형 사람’이라고 규정해왔다. 사회 활동도 가능했고, 감정 표현이나 관계 유지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었으며, 겉보기에는 일상 기능에도 큰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경다양성 커플일까요?>를 읽으며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사용해온 뇌의 운영체제가 사실은 전혀 다른 매뉴얼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근본적 질문을 마주했다.
이 책은 단순한 관계 심리서가 아니라, 인지과학·신경심리학·감각처리 연구의 최신 통찰을 바탕으로 짜여 있다. 각 장면은 “왜 어떤 사람은 과도하게 피곤해지고, 왜 어떤 관계는 오해를 반복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신경계의 정보처리 방식, 감각 민감성, 실행 기능의 차이로 설명해낸다. 그리고 그 설명 구조가 놀라울 정도로 내 삶의 경험과 맞아떨어졌다.
나는 언제나 스몰토크가 불편했다. 너무 가볍거나 의미 없는 대화를 할 때면 에너지가 빠르게 고갈되고, 대화의 맥락을 붙잡으려 애쓰는 동안 머리가 과열되는 느낌을 자주 경험했다. 책은 이를 감각 정보 처리 차원의 현상으로 설명한다.
신경다양인은 언어를 ‘연결의 장치’보다 ‘정보 단위’로 처리한다. 의미 없는 말은 처리 비용만 높인다.
즉, 가벼운 소통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 부하가 증가해 피로도가 오르는 것이다. 이 설명은 내가 스몰토크를 회피하던 이유를 단번에 명쾌하게 보여줬다.
또한 나는 오래전부터 씹는 소리, 반복되는 소리, 먹방 같은 것들에 극심한 불쾌감을 느껴왔다. 책에서 제시하는 ‘미소포니아’는 단순한 예민함이 아니라, 청각 피질과 편도체의 과활성으로 인해 특정 소리를 위협으로 오인하여 과도하게 반응하는 신경학적 현상이라고 알려준다. 나는 그 설명을 읽으며 처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뇌가 특정 감각을 다르게 처리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배우자와의 신체적 접촉에서 과부하를 느끼는 경험도 설명되었다. 난 피로할 때 신체 접촉이 고통에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책에 따르면 일부 신경다양인에게는 촉각 자극이 과도하게 증폭되어 들어오며, 이는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감각 신경계의 과흥분 상태에서 기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그동안 설명하기 어려웠던 내 몸의 반응들이 모두 하나의 지도로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저자는 반복적으로 실행 기능의 개별 요소—주의 조절, 작업 기억, 시간 관리, 우선순위 설정—가 어떻게 관계에서 충돌을 만들 수 있는지 설명한다. 나는 종종 하루에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한 번에 계획하고, 잘 해내지 못하면 자책에 빠지고, 또다시 과한 계획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패턴을 반복해 왔다. 배우자는 이를 ‘욕심’으로 해석했지만, 책은 이를 명확히 ADHD 스펙트럼 혹은 ND 특유의 실행기능 부하로 본다. 시간 감각이 흐려짐, 해야 할 일을 작업 기억에 오래 붙잡아 두지 못함, 과업을 쪼개지 못하고 한 번에 거대한 단위로 시도함, 성취-좌절-보상 추구가 반복되는 루프, 이 모든 것이 내가 평생 겪어온 패턴과 거의 일치했다. 이때 느껴지는 충동성 역시 "의지 부족"이 아니라, 인지적 부하를 줄이기 위한 빠른 우회 전략이었다는 설명은 나를 깊이 안도하게 했다.
내가 특정 유형의 사람, 경계선을 쉽게 넘거나, 타인을 미묘하게 무시하거나, 자신을 과하게 포장하는 사람에게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설명되었다. 신경다양인은 사회적 위협 신호를 과민 탐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과거 대인관계에서 겪은 상처 경험(왕따, 소문 피해 등)과 결합되면 빠른 ‘패턴 인식 시스템’이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첫인상에 대한 촉’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 왔고, 실제로 문제적 인간 관계 대부분에서 그 촉은 정답이었다.
책을 통해 나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감정·표정의 미세 신호를 고해상도로 감지하는 신경 시스템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즉, 내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 정보량이 많은 방식으로 세상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파트는 사회적 가면 파트였다. 나는 새로운 관계에서는 극도로 친절하고 사회적 규범을 충실하게 따르며, 때로는 역할 수행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친해질수록 그 가면을 벗고 본래의 흡수식 감각 처리와 직설적 사고가 드러나는 편이었다. 책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경다양인은 신경전형의 언어 체계를 분석하여 모방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적응해왔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본래의 신경 패턴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많은 ND들은 “연애 초반과 달라졌다” “네가 처음만큼 다정하지 않다” 라는 오해를 받기 쉽다. 나는 이 진술을 읽는 순간, 오랜 상처의 구조가 설명되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신경다양성과 신경전형성이 짝을 이뤘을 때 가장 흔히 발생하는 문제들을 ‘책임 분배의 불균형’과 ‘인지 처리 방식의 차이’로 설명한다. ND는 실행 기능 부담을 과도하게 떠안게 되고 NT는 계획 과부하를 제어하지 못하는 ND를 보며 답답함을 느끼고 ND는 피로와 감각 과부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오해를 낳는다. 이 설명은 나와 남편의 갈등 패턴을 거의 그대로 재현했다. 특히 터치 과부하나 성적 자극의 민감도 차이는 단순한 취향 문제가 아니라 감각 처리 체계의 구조적 차이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우리 관계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 둘이 서로의 신경계를 모른 채 살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이 책은 ‘내가 누구인가’를 신경과학적으로 명명해준 첫 책이다.
<우리는 신경다양성 커플일까요?>는 심리적 공감의 차원을 넘어서, 감각 처리, 실행 기능, 사회적 처리, 정서 조절, 신경계의 부하 패턴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단지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신경구조를 가진 사람이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한 감각 자극들에는 뇌의 생물학적 이유가 있었다.
관계 속에서 반복되던 오해는 의도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차이였다.
내가 살아오며 느끼던 소외감, 에너지 고갈, 패턴 집착, 첫인상의 정확성은 한 가지 언어로 설명될 수 있었다. 즉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 신경계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이해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에게 훨씬 더 너그러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순히 커플 문제 해결서가 아니다. 자신의 뇌의 작동 방식을 처음으로 구조적으로 이해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깊은 해방감을 선물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