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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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를 읽으며 - 팽나무가 인간의 역사를 바라볼 때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특정 인물의 비극도, 극적인 사건도 아니었다. 600년을 살아온 팽나무가 마지막 장면에서 내뱉는 단 한 문장이었다.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

 

이 말은 위로도, 고발도, 교훈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인간을 부르는 방식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이 건조하고 감정 절제된 소설이 놀라울 만큼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역사를 자연의 시간 속에 다시 배치하기 때문이다.

 

1. 왜 하필 팽나무여야 했는가

 

팽나무는 한국의 생태·문화사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점한다. 수백 년을 사는 장수목이자, 마을 어귀에 서서 사람의 출입과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는 존재. 서낭신으로 모셔지며 인간의 삶과 죽음, 탄생과 이주를 모두 보아온 나무다. 저자가 팽나무를 화자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토속적 상징 때문이 아니다. 팽나무는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 단위로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다. 인간의 왕조 교체, 종교의 흥망, 전쟁과 학살은 팽나무에게 하나의 계절 변화처럼 지나간다. 이 소설에서 팽나무는 기억하는 신이 아니라, 지켜보는 자연이다. 그래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더 잔혹하고 정확하다.

 

2.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고리

 

이 소설은 개똥지빠귀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새의 죽음으로 그 뱃속의 씨앗인 팽나무가 탄생한다. 팽나무의 탄생은 버려진 아이 몽각의 생과 사로 이어진다. 몽각은 자신의 사체를 자신이 먹고 살게 해준 대자연에 보시한다. 몽각의 사체 위로 기어오르는 게는 수많은 새들의 먹이가 되고, 팽나무에 깃든 도요새 무리의 번식과 죽음은 생합의 탄생의 기반이 된다. 생합으로 대표되는 갯벌 위에서 다시 인간의 역사가 쓰여진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의 이 교차 구조는 인간이 특별할 것 없는 존재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작품 속에서 몽각의 죽음에 감정적 서술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몸에 바닷물이 밀려들고, 칠게들이 몰려드는 장면은 애도 없는 죽음이 아니라, 자연으로의 회귀 그 자체다. 이는 <사피엔스><, , >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자연주의적 관점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자연의 정점이 아니라, 그 일부일 뿐이라는 인식 말이다. 이 소설은 그 명제를 서사로 구현한다.

 

3. 특별할 것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

 

이 소설에서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몽각은 수행자도, 영웅도 되지 못한다. 당골네, 춘삼, 경순, 경수, 동수로 이어지는 계보 역시 위대한 진보를 이루지 않는다. 그들은 떠나고, 속하고, 배신하고, 믿고, 죽는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거부하려는 인간의 태도다. 갯벌을 막고, 바다를 죽이고, 새떼를 몰살시키는 행위는 생존의 전략이 아니라 오만이다. 이 소설이 인간을 비판하지 않고 연민하는 이유는, 인간이 악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어리석은 존재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저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다양한 종교, 하늘과 연결되려는 인간의 몸부림

 

이 소설 속에는 참 많은 종교인이 등장한다. 불교, 무속, 천주교, 동학. 이 소설에 종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종교는 모두 하늘과 연결되려는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절에서 자란 몽각, 서낭신을 모시는 당골네, 박해 속에서도 신을 선택한 유 도사공, 하늘님을 품고 죽어간 동학군 경수. 그러나 어떤 종교도 소설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대신 종교는 시대마다 소외된 인간들의 선택지로 등장한다. 이는 초월을 향한 믿음이라기보다, 구조적 폭력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다. 흥미로운 점은 마지막에 신부가 마주하는 존재가 신이 아니라 팽나무라는 사실이다. 구원은 하늘에 있지 않고,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 곁에 머물던 자연에 있었다.

 

5. 허무주의가 아닌, 관계의 윤리

 

이 소설은 어떤 면으로 봐도 희망적이지 않지만, 놀랍게도 그 결말이 허무주의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저자는 감정의 고조를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저자는 삶과 자연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글 속에 그려지는 인간의 고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를 때 비극이 구조화될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팽나무가 유신부를 부르는 목소리는 심판이 아니라, 오래 기다린 존재의 확인이다. “인제 오냐라는 말에는 분노보다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다.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은 너무 많은 것들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쳐왔으나, 자연은 늘 그 자리에서 그 자신의 회복력으로 기다리고, 스스로를 달래며 인간을 품어준다. 오래된 팽나무 할매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인간에게 묻는다. 우리가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는 동안, 자연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느냐고. 사피엔스가 인간의 허구를 해체하고, , , 가 환경의 힘을 드러냈다면, 할매는 그 모든 사유를 한 그루 나무의 시선으로 내려놓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고, 울리지 않는다. 대신 독자를 자연의 시간 속으로 잠시 끌어당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에 내 안에 남은 것은 감동이 아니라, 먹먹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였는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사실까지 후회 한편으로는, 팽나무 할매가 쓰러지지 않은 아직은, 조금 더 제대로 살아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다짐이 고개를 든다.

 

인간의 문제를 인간 존재에 국한하지 않은 장구한 서사 속에서 나는, 그리고 이 소설을 접하는 모든 독자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지구를 살아가는 운명 공동체로서의 우리의 한계를, 그리고 공존의 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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