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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엔 모두 남남이 되기로 해
오영은 지음 / 김영사 / 2025년 11월
평점 :
〈오후엔 모두 남남이 되기로 해〉
: 감각·주의·자기조절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일상의 회복 기술
오영은님의 《오후엔 모두 남남이 되기로 해》는 표면적으로는 일상의 소소한 장면을 기록한 에세이지만,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감각 조절, 주의 전환, 자기조절(self-regulation)이라는 핵심적인 인간 정신 기능을 다루는 흥미로운 텍스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독자의 감정적 위로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로, 과부하, 성취 압박, 창작적 공백 등 현대인이 공통적으로 겪는 심리적 현상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우리가 매일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정신적 조절의 메커니즘을 탐구하도록 안내한다.
책에서 저자는 종종 “글을 쓰고 싶은데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는 단순한 작가의 고민이 아니라,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실행 기능(executive function) 과부하의 대표적 현상과 닿아 있다.
실행 기능은 작업 전환, 계획 수립, 억제 조절, 지속적 주의 등을 담당하는데, 이 기능이 피로하거나 감각 자극으로 과도하게 소모될 경우 실제 능력보다 훨씬 낮은 퍼포먼스를 보인다. 즉, “꾸준히 하고 싶은데 되지 않는다”는 경험은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에너지 배분 실패에 가깝다.
책은 이를 명확히 설명하진 않지만, 저자의 일상 묘사는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창작의 공백을 자책하는 대신, 몸과 마음의 여유가 회복되었을 때 다시 문장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꾸준히 하지 못함”을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지적 리듬의 일부로 재해석하게 만든다.
책 전반에 흐르는 중요한 정조는 ‘아날로그적 감각’이다. 저자는 현금 결제의 촉감, 종이의 질감, 오프라인 쇼핑의 천천한 리듬 등 디지털 환경에서 사라진 감각적 경험을 자주 언급한다.
인지과학에서는 이를 감각 통합(sensory integration) 혹은 감각 조절(sensory modulation)의 영역으로 설명한다. 특히 디지털 환경은 주의 자원을 빠르게 소모시키는 반면, 아날로그 환경은 예측 가능하며 느린 감각 자극을 제공한다. 이런 자극은 뇌의 생리적 각성도를 낮춰 안정감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저자가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유난히 소중하게 묘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과정이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과부하된 신경계를 재조정하는 ‘안전 신호(safety cue)’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계획을 모두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 “오늘은 금요일이니 쉬어도 된다” 이런 메시지는 자기 완화(self-soothing)의 언어이다. 이 문장들은 단순한 감성적 위로가 아니라, 심리학적 분류로 보면 인지 재평가(cognitive reappraisal) 전략에 가깝다. 목표 실패를 실패로 규정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조정 가능한 목표’로 재해석하는 것, 이는 감정 조절 연구에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며, 스트레스 반응을 줄이고 자기 효능감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의 에세이는 생활의 실패를 정당화하는 대신, “실패를 조정 가능한 변이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제시한다. 그 결과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자비(self-compassion)를 학습하게 된다.
저자는 일상의 사소한 지점을 오래 들여다보는 방식을 사용한다. 예컨대 카페 직원의 표정 변화, 쇼핑을 하며 느끼는 촉각, 자동차의 진동 등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이것은 주의의 방향성과 깊이(attentional style)를 보여주는 사례다.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러한 집중 방식은, 실제로는 감정 회복의 중요한 요소다.
심리학에서 명상(mindfulness)이 그러하듯,현재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은 전전두엽의 활동을 안정시키고 스트레스 지표를 낮춘다. 저자가 ‘천천히 관찰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일상을 정교하게 살기 위함이 아니라, 주의를 세밀하게 조절함으로써 자기 감정을 재정렬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책은 기록의 역할에 대해 깊이 언급하지 않지만, 저자의 글 전체가 보여주는 바는 명확하다.글쓰기는 감정 표현의 도구를 넘어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을 보조하는 외부 저장장치로 기능한다. 일상의 감정·감각·판단을 텍스트로 외부화함으로써 저자는 인지적 부하를 줄이고 자기 정체성을 재구성한다. 이 과정은 인간의 뇌가 원래 수행하기 어려운 기능을 글이라는 외부 도구가 대신하는 사례다.
따라서 이 책은 ‘일상의 감정 기록’이라는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라, 감정 조절·주의 전환·자기 이해를 학습하는 인지적 도구로도 읽힌다.
《오후엔 모두 남남이 되기로 해》는 견고한 논리로 조언을 제공하는 심리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힐링 에세이’이라는 감성적 장르를 넘어, 내게는 지쳐 있는 개인이 자기조절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의 사례집으로 보였다. 읽고 나면 큰 위로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의 신경계는 분명히 조금 더 조용해지고, 머릿속의 혼탁함은 약간 사라지며, “오늘 하루는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감각이 다시 돌아온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현대적 피로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형태의 따뜻함을 제공하는 텍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