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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읽기 5 - 구약역사 : 사무엘서 ㅣ 단테의 신곡 읽기 5
진영선 지음 / 메이킹북스 / 2025년 10월
평점 :
〈침묵의 정치학, 기억되지 않은 몸들, 현대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사무엘서, 단테의 신곡읽기〉
구약 사무엘서는 흔히 이스라엘의 왕정 수립과 국가 형성이라는 ‘역사적 전환기’를 기록한 문헌으로 읽혀 왔다. 그러나 현대 여성이, 그리고 여성 주의적 관점으로 이 성서 속 여성 인물들에게 눈길을 돌릴 때, 사무엘서는 단순한 고대 종교 서사를 넘어 여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지워지고, 침묵이 어떻게 제도화되었는지를 폭로하는 고고학적 텍스트가 된다. 『단테의 신곡 읽기 –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내가 주목한 건 바로 성서 속에 스치듯이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이었다.
사무엘서 속 여성은 드물게, 그것도 매우 짧게만 등장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등장할 때조차 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나, 밧세바, 미갈, 다말 등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서사 전개의 핵심적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이들을 이야기의 주체로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은 ‘사건을 일으키는 배경’, ‘남성 주인공의 영적·정치적 전환의 매개’, 혹은 ‘도덕적 교훈의 장치’로 기능한다. 그들의 몸은 서사를 움직이지만, 그들의 의지·감정·판단·세계관은 거의 기록되지 않는다.
이 침묵은 우연한 서술적 결함이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 구조가 여성의 욕망과 경험을 삭제하는 방식을 반영한다. 사무엘서를 여성주의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 억압의 구조를 해체하고, 기억되지 않은 여성의 존재를 다시 드러내는 작업이다.
사무엘서의 첫 장면은 난임으로 고통받는 여인 한나의 침묵이다. 그녀의 입술은 움직이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이는 여성의 고통이 제도로부터 어떻게 침묵으로만 승인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한나는 분명 자신의 삶에 대한 요구를 표현하지만, 그의 기도는 사회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으나,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의 소망은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신을 위한 아이’, ‘국가의 지도자 탄생’이라는 종교적 목적을 통해서만 정당화된다.
여성의 욕망은 신의 계획안에서만 승인된다. 이것이 고대의 일만은 아니다. 현대 여성 또한 여전히 결혼·출산·육아 같은 사회적 틀 속에서만 여성의 선택이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 사무엘서 속 한나의 침묵은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구조적이다.
사무엘서에서 가장 논쟁적인 여성은 밧세바다. 왕 다윗은 자신의 권력을 기반으로 그녀를 소유한다. 이후 밧세바의 남편은 왕의 명령에 의해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성서는 이 사건을 ‘다윗의 죄’라고 규정할 뿐, 밧세바의 피해 경험을 한 번도 서술하지 않는다.
밧세바는 철저히 객체화된다. 그녀의 몸은 권력이 사용하는 도구이며, 그녀의 감정은 역사 서술 밖으로 완전히 추방된다. 이 침묵은 단지 성서적 서술 방식의 특성일까? 그보다는 성폭력을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권력의 정치적 사건으로만 다루는 오래된 전통의 일부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미투 운동이 폭발적이었던 이유도 여기 있다. 너무 오랫동안 여성의 고통은 “사건 뒤의 공백”으로만 남아 있었다. 밧세바의 침묵은 텍스트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여성에게 “왜 우리는 이렇게 늦게까지 말할 수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말은 사무엘서에서 거의 유일하게 스스로 말하는 여성이다. 동침을 요구하는 이복오라비 암논에게 그녀는 이렇게 선을 긋는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고대 문헌에서 보기 드문, 여성의 분명한 경계 설정이다. 그러나 결과는 비극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무 힘도 갖지 못한다. 성폭력은 일어나고, 텍스트는 곧바로 다말의 목소리를 삭제한다. 이후 서사는 다말의 슬픔을 ‘앗살롬의 복수’라는 남성 영웅 서사로 전환시켜버린다.
여성의 고통은 남성의 분노로 전유된다. 이 구조는 현대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다. 여성의 피해가 남성의 정치적 논쟁으로 대체되거나, ‘가족의 명예’나 ‘사회적 파장’으로 환원되는 경우는 여전히 많다. 다말은 그 원형이다.
미갈의 서사는 여성에게 주어진 감정 노동의 고전적 사례다. 사울의 딸인 그녀는 다윗을 사랑하여 목숨을 걸고 그를 돕지만, 이후 그녀의 감정은 다윗의 종교적 권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받는다. 미갈의 불임은 흔히 신적 심판으로 해석되었으나,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비판적 여성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상징적 장치다.
여성이 남성을 비판하면 사랑의 실패로 해석되고, 여성이 공적 영역을 비판하면 오만함으로 규정된다. 미갈의 침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여성 혐오의 오래된 구조를 비춘다.
사무엘서의 여성들은 모두 말을 빼앗긴다. 그러나 이 침묵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가 여성의 말하기를 어떻게 제한하는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신곡 읽기 – 사무엘서』가 내게 준 가장 큰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누가 기록을 작성하는가? 여성은 텍스트의 중심에 있음에도 기록의 중심에는 없다. 이는 오늘날 뉴스, 정치, 직장에서 여성의 경험이 종종 통계나 ‘사건’으로만 환원되는 구조와 맞닿아 있다.
그 다음은 누구의 고통이 정의의 기준이 되는가? 이다. 밧세바와 다말의 고통은 주류의 고민거리가 되지 못한다. 대신 남성 인물의 회개, 복수, 권력 정당화가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오늘날에도 피해자보다 가해자와 사회적 파장에 더 초점을 맞추는 보도 방식이 반복된다.
마지막은 여성은 어떻게 “존재는 있지만 주체는 아닌” 위치로 배치되는가?이다. 한나와 밧세바는 이야기의 중심을 움직인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현대 여성도 종종 비슷한 위치에 놓인다. 여성은 가정, 직장, 사회에서 기능적 핵심이지만, 구조적 권한은 남성에게 있다.
우리가 해설서의 이름을 빌려서 성서, 사무엘서를 다시 읽는 의의는 무엇일까. 내게 이 책은 단순히 성서의 내용을 알고 싶기 때문도 아니었고, 역사서나 고대 문학으로 읽히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사무엘서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워진 여성의 자리를 복원하는 역사적·윤리적 시도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