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다산책방)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는 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소설로,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마비가 된 전직 CEO 윌과 그의 간병인으로 취직한 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윌은 까칠하고 냉소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반면, 루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발랄하고 따뜻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삶과 죽음,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집중적 탐구를 가능케 하며, 동시에 로맨스라는 장르 안에서 감동과 슬픔을 전달한다.


소설의 초반부는 주로 두 주인공의 관계 형성과 감정의 변화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루와 윌의 관계는 처음에는 대립적이지만 점점 유대감을 형성하며 발전한다. 이 관계는 로맨스 장르에서 익숙한 공식에 따라 전개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안정감을 제공한다. 특히 두 인물의 설정과 관계성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잔잔한 설렘과 기대를 선사한다. 이러한 익숙함은 작품의 초반부를 읽는 데 있어 큰 장점으로 작용하며, 독자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힘은 중반부 이후에 드러난다. 윌과 루의 감정이 깊어지는 동안, 윌은 자신이 결정한 안락사 선택을 굽히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 결정은 루와 독자들에게 감정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준다. 


특히 윌이 루에게 "당신을 사랑하지만 내게는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소설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백은 루에게 큰 좌절과 슬픔을 안겨주며 독자들에게도 강렬한 감정적 몰입을 유도한다. 이는 로맨스 장르에서 흔히 기대하는 사랑과 생존의 희망적 전개와는 달리,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가장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여준다.


작품은 이러한 윌의 결정을 통해 로맨스 소설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삶을 사랑했던 윌이 생리 현상 하나 제어할 수 없는 삶 속에서 느낄 절망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 부분은 단순한 로맨스를 초월한 휴먼 드라마로 느껴진다. 윌의 선택은 독자에게 삶과 죽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의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신중한 메시지는 소설을 통속적인 감동 이상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윌은 루에게 "살아요, 루"라는 당부를 남긴다. 이는 윌에게 마음을 다했던 루가 그의 죽음을 직면하며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루는 윌과의 만남을 통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삶을 경험했고, 그의 마지막 메시지를 통해 새로운 삶의 방향성을 제시받는다. 이러한 결말은 단순한 개인적 사랑의 서사에 그치지 않고 인간 본연의 생존과 사랑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는 통속적인 로맨스의 전형성을 활용하면서도 파격적인 결말과 철학적 성찰을 통해 독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이 책은 두 사람이 나눈 사랑과 감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오늘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생명력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작품은 예측 가능한 전통적 전개 방식과 충격적 결말 사이의 균형을 통해 독자를 끌어들이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에 따라, 이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적극 추천할 만한 가치 있는 소설이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쓰는 내 인생의 페이지 - 4050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열 가지 이야기
권경애 외 지음 / 미다스북스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시 쓰는 내 인생의 페이지는 중년 세대를 위한 에세이집이다. 이 책은 총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생의 2막을 맞이하기까지의 과거를 성찰하고 새롭게 맞이하는 제2의 인생을 어떤 방식으로 설계하고 보내고 있는지를 열 명의 저자가 진솔한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 책은 각 저자가 걸어온 다양한 삶의 행로에서 얻은 통찰을 담았으며, 직장에서의 은퇴, 재취업, 건강 악화, 가족 문제, 그리고 제2의 꿈과 도전 등 실제로 우리 사회의 중년층이 직면하는 고민들을 가감 없이 다루었다. 저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도전하고 삶을 돌아본 기록을 통해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전달한다. 이 책은 제2의 인생의 기로에 서 있는 내게도 큰 위로와 용기가 되어주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는 말이 익숙할 정도로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 한국에서는 80살이 넘어선지 제법 되었고, 더 이상 60대 은퇴 이후 십 여 년 동안 인생 종막을 준비하는 방식은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 국민 언니 김미경 코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조상들보다 영양적으로나 사회적으로 15살은 더 젊다고 말하며, 나이를 단순히 물리적인 숫자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조언한 바 있다. 실제로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겉모습으로는 나이를 전혀 짐작하기 어려운 이들이 많다는 것을 체감하곤 한다. 내 시부모님께서도 90대에 가까운 연세이시지만 감사하게도 지금도 정정하시다. 이러한 점에서 4050을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부르는 것은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 


나 역시 스무 살 한철의 공부로 20년 가까이를 살아왔으니, 이제야 내가 걸어보지 않았던 다른 길을 찾아보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던 중 이 책을 만나 참으로 다행이었다.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이미 안정적인 생계 수단을 포기하고 새롭게 도전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계획대로였다면 나는 이미 올해 초에 일을 관두고 새로운 꿈을 위해 공부에 매진하고 있어야 했지만, 이사 문제로 일이 지연되면서 반년 가까이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키우던 아이들의 투병과 사고로 계획보다 지출이 늘어났고, 반복되는 인테리어와 이사 준비, 취소와 지연이 겹치다 보니 금전적 부담 또한 커진 탓이다. 먹고사는 현실에 발목 잡혀 도전이 미뤄지다 보니 처음 계획했던 일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도 커지고 말았다.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중 만난 이 책에서 저자들은 내게 이렇게 조언하는 것 같았다. ‘가장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되, 인생의 우선순위를 잃지 말라’고. 내 스스로가 건강하게 바로 서야 가정도 평화로울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나보다 먼저 인생이란 여행길을 걸어간 선배들의 진솔한 조언은 내게 온화한 격려가 되어 가슴을 따뜻하게 적신다. 


책에서는 거창한 서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이들이 정직하게 얻은 결과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가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책 속에서 보여준 전업 주부, 자영업자, 새로운 자격증을 공부하여 새 사업을 시작한 사람,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배움을 이어가며 젊게 살아가는 할머니까지 다양한 중년의 삶은 모두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책은 ‘중년 이후의 삶은 축소와 소멸이 아닌, 새로운 도약과 재창조의 시기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나에게도 커다란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라떼는 말이야’를 반복하는 초라한 삶을 긍정하는 방식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힘차게 살아가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현재의 나를 긍정하며 미래의 나를 기대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큰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쓰는 내 인생의 페이지>는 그리하여 모든 중년에게 자신을 돌아보며 인생을 새롭게 그려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따뜻하고 다정한 에세이라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강보라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저자인 강보라 작가님을 알게 된 건 지난 4월에 읽은 2025년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작 <바우어의 정원>을 통해서였다. <바우어의 정원>의 주인공은 지난 삼년 간 세 번의 유산을 하고 배우 활동을 접었다가 오디션을 계기로 간만에 사회로 나온다. 눈이 내리는 도로 위에서 낡은 모닝 차를 서툴게 조작하면서 운전하는 장면은, 그녀가 꽤나 사회와 깊게 단절되어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인 은화가 참여한 연극의 오디션 주최측은 그녀에게 여성의 몸과 상처에 대한 자기고백적 연기를 요구한다. 은화는 삼년 간의 칩거의 근원이었던 유산에 대한 고백으로 오디션을 참여한다.


지난 삼년 간 저는 세 명의 아이를 잃었습니다.

 

 다시 읽어도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독백.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나도 작중 주인공처럼 지난 3년간 7명의 아이를 잃었다. 저자는 스스로 겪지 않은 이야기를 썼노라 고백했지만, 작중 은화의 이야기는 내게는 나의 이야기였다. 작년에 나는 6년 만에 힘들게 들어선 태아를 뱃속에서 잃었고, 재작년 봄에는 3개월을 기다려서 가까스로 데려올 수 있었던 입양 딸냥이를 고작 두 달만에 병마로 떠나 보내야 했으며, 재작년 가을에는 14년을 키워온 내 장남 아들 냥이를 3개월에 걸친 시한부 심장, 신장 투병 끝에 잃었다. 재작년 겨울에는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사산된 두 마리의 손주 냥이를 보내줘야 했고, 올해 봄에는 또 한 마리를 태내에서, 또 한 마리의 증손주냥이를 태어난지 보름도 되지 않아 떠나보내야 겠다. 내 고양이들과 태아는, 모두 내게는 하등 다를 바 없는 자식이고, 새끼를 잃은 어미에게 상실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다시 시간을 돌이켜도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발버둥을 치면서 최선을 다했어도, 떠나버린 생명의 무게는 내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되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는 결코 지울 수 없는 회한들.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을 앞세우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들은 바 있는데, 근 삼년 사이에 너무 많은 내 새끼들을 보내면서 나는 그걸 몇 번이나 깨우쳤다. 그 와중에 몇 번이나 사선을 넘나들다가 가까스로 살린 내 애기들이 나를 이 땅에 잡아두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이 기나긴 슬픔의 여정에서 어느 순간 나를 놓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안으로 침잠하면서, 온갖 것을 곱씹으면서 만약을 거듭하던 절망과 슬픔의 순간들. 시간을 돌이킨다 해도 그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반추되던 시간들. 아이들과의 이별은, 나를 죄 없이도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할퀴어대던 시간들. 나는 은화의 담담한 고백 속에서 그녀가 되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로 들이마신 상한 우유 속의 벌레가 저의 몸을 근원적으로 망쳐놓았을 지 모른다는 그녀의 비합리적인 고백이 너무도 잘 공감이 되었다. 원래 아이를 잃은 어미란 그런 존재이다. 온갖 미신과 비합리와 맹신 속에서 스스로를 다그치고 몰아세우게 되는, 못나고도 슬픈 존재 말이다. 짧은 단편을 지나간 고통과 함께 읽어서일까. 저자가 등단 후 4년 간 쓴 글을 곱게 갈무리하여 소설집으로 출간한 이 소설집에서 역시나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작품은 역시나 일전에 읽고 재독하게 된 '바우어의 정원'이었지만, 그 작품 외에도 인상적인 글들이 아주 많았다. 


단편집 말미에 수록된 작품 해설서를 보니 저자의 작품이 자기 정체성과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는 자기 서사, 타자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불편함을 직시하는 용기를 드러낸 작품이란 표현이 직간접적으로 반복되던데, 나도 일정 부분 공감하게 되었다. 저자의 글은 결코 쉽고 술술 읽히지 않는다. 작중 화자들은 어딘가 꼬여있는 느낌이다.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곧고 다정하지 않다. 상처 입은 과거에 여즉 붙들려 있거나 혹은 풀리지 않은 욕망을 숨기고 있거나, 혹은 아직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까닭에, 조금씩 삐딱하게 사회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흡사 인생의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관찰자인 조연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글 같다는 인상이 들었달까. 그렇기에 작중 인물이 그려내는 세상은, 그 세상에서 나름의 가치를 실현하며 반듯하게 서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는 불편한 감각을 자아낸다. 하지만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이어지는 우리네 삶을 반영하듯, 저자의 작중 세계가 덜어낼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삶 그 자체의 투영이란 생각이 들었다. 


표제작이기도 한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이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저자의 글은 낯선 감각을 자아낸다. 그저 생경할 뿐더러 어떤 의미로는 이상하기도 한, 그래서 나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글들이랄까. 하지만 반듯하지 않으면 어떠하고, 익숙하지 않으면 또 어떠한가. 이해하기 쉽고 공감하기 쉬운 인물이 나오는 글이 아니라 이해가 안 되지만 한 번쯤 이해해보고 싶은 인물들이 나오는 글이 독자의 읽기 경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신형철 평론가님의 발언에 나도 공감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글이 가진 이색적인 감각은, 한 번쯤 경험해보고 내 것으로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부추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이들 속에서 내 삶을 반추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그녀가 제시하는 불편함은 깊은 사유와 통찰의 기회로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하지 않을 용기 - 일해야 산다는 강요에 맞서는 사람들
데이비드 프레인 지음, 장상미 옮김 / 끌리는책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데이비드 프레인의 <일하지 않을 용기>는 현대의 일 중심 사회 구조를 분석하여 현대인이 일에 대해 갖게 된 노동 윤리의 맹점을 파헤치고, 우리가 바라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제공하는 사회과학서이다. 


이 책은 총 8장의 목차로 되어 있다. 하지만 더 건강한 삶, 자율적인 자기 계발을 통한 행복감 획득을 위하여 소모적 노동을 줄이는 대안적 삶의 방향을 고찰해보자는 주장 아래, 이 책의 목차는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분류 가능하다. 첫번째 부분은 일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의 도덕화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주류 사회에 대항하여 탈 노동을 선택한 사람들에 대한 사례 연구이다. 마지막 부분은 덜 벌고 더 자유로운 삶을 위한 사회적 연대와 전략 검토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인생의 80%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과 직업에 대해 정말 굉장히 많은 편견들이 깨지는 걸 느꼈다. 내게 일은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삶의 일부이며, 자아실현의 도구이고, 자원 획득을 위한 수단이다. 당연히 일을 통해서 스트레스도 받지만, 보람도 느끼기에, 일을 관둔다는 선택지는 애당초 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이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저자는 제자들에게 '로또에 당첨되면 일을 할 거냐'고 묻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렇다'라고 답한 것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충격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저자의 책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일이란 용어는 저자가 서장을 통해 길게 설명했듯이, 맥락에 따라 다채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실제로 직업을 통해서 자아를 구현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저자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자아실현 및 자기계발의 도구이자 금전적 대가를 동시에 안겨주로, 인간적이며 좋은 환경의 일자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개인을 거대한 소비형 자본주의의 거대한 시스템의 미미한 부속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래서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7-8시간을 참고 견뎌야 탈출할 수 있는, 여가조차 다음 날의 생산성을 위해서 소모적 휴식으로 저당잡히는, 나쁜 일자리를 말한다. 저자는 독자에게 묻는다. 이렇게 나쁜 일자리를, 왜 박차고 나오면 안되는가.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실직자는, 실패자나 사회부적응자 내지는 성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인격과 동의어가 되었느냐고 반문한다. 이에 대해 답을 하기 전에, 우리가 소위 청교도적 질서에서 기원한 노동 윤리에 오랜 세월 지배당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종교 개혁에서 기원한 청교도적 입장에서는 직업을 하느님의 소명, 소위 calling이라고 부르며 노동을 신성시하였다. 당연히 일을 하지 않는 잉여 인력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저주 받은 종족이 되는 건 이와 같은 논리 구조하에서는 자명하다. 현대로 들어오며 종교적 색채는 자본주의의 탈을 쓰고 인간을 세뇌한다. 케인즈를 비롯한 저명한 사회경제학자들은 인류의 생산성 증대가 노동시간의 감축을 불러 올 것이라 예측하였다. 하지만 현대의 비대한 자본주의는 기존 소비의 영역이 아닌 지대까지 세력을 확장해 가며, 노동의 대가로 여가가 아닌 더 다채롭고 더 편리한 소비 기회를 제공한다. SNS와 미디어는 이러한 소비를 삶의 질 향상이란 명분 아래 한층 더 부추긴다. 그 결과 우리는 꼭 필요하지 않은 소모품으로 집을 가득 채우고, 기업은, 부당한, 심지어 저자의 비판으로라면 불필요하기까지 한 소모품을 생산하기 위한 나쁜 일자리를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동을 대가로 물건을 사고, 불쾌한 소비 경험에 좌절하며, 또 카드값을 메꾸기 위해 개인의 시간을 돈으로 바꾸게 된다는 통찰은 매우 날카롭고도 설득력 있어서 글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노동이 과연 내 인생의 중심이어야만 하는가. 노동을 당연시 하고, 이 거대한 소비 시스템에 매몰되는 노동구조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비생산적 인력이 어찌하여 부도덕하고 형편 없는 계급으로 매도되어야만 하는가. 아침 8시 출근, 저녁 8시 퇴근 후 지쳐서 집에 오면 유튜브나 하다가 언제 잠드는지도 모르는 채 잠들었다가 같은 일과를 반복하고, 주말에는 사회적 활동을 할 여력도 없어서 종일 침대에 뒹굴며 게임과 SNS 따위에 빠져 사는 삶이, 과연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렇게 쉬는 퇴근 후의 시간과 주말이, 회사에, 직장에 저당잡힌 삶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책을 통해 저자가 묻는 목소리에, 나는 당당히 답할 수가 없었다. 과연 이 책을 읽는 수많은 유급 노동자들은 얼마나 많이 일이 있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답할 것인가. 


딸냥이의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입원 시킨 후 일을 하다가 수술대에서 아이를 떠나보낸 일이 작년에 있었다. 그 날이 내 딸의 마지막 날이었을 줄 알았다면, 나는 과연 일 따위를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 점이 너무 괴로웠고, 죄스러웠으며, 속상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울컥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일 이후 느끼는 바가 컸던 나는 오랜 결심 끝에 올해부터는 차라리 덜 먹고 덜 쓰더라도 시간을 확보하겠다는 일념 하에 주말과, 평일 하루를 온전히 비웠다. 이 책에 나오는 탈노동을 선택한 수많은 이들처럼 확실히 금전적으로는 쪼들리는 느낌이 있지만, 삶의 만족도는 올라갔다. 


만족스러울 만큼은 아니어도, 아이들과 교감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투자할 최소한의 내 시간과 기력을 확보한 나는 내가 내 인생을 갈아서 맞바꾼 것들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목도할 수 있었다. 소위 내 또래의 평균적인 삶의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 내가 밤에 들어가 잠만 자는 집을 위해 쓰던 막대한 주택자금, 일할 시간 확보를 위해서 인스턴트와 패스트푸드 위주의 부실한 식단으로 인한 건강 악화, 산더미 같이 쌓인 포장도 뜯지 못한 온갖 소비재들. 내 인생은 고작 그런 것들을 위해 공중분해되고 있었다. 저자가 말했듯, 삶의 만족은 소비에 있지 않고, 통제 가능한 시간이 많아질수록 소비지출은 감소한다. 나는 그걸 바뀐 내 삶, 탈노동까지는 아니어도 노동 감소를 통해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노동은 선택가능한 삶의 한 요소이지, 노동이 우리 존재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노동을 삶의 가치 척도로 삼고 있는 현대의 일중심 사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덜 일하고 더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부족한 인간의 일탈적 선택이 아니라, 정당한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사회적 담론은 꼭 필요하다. 우리 삶에는 노동 이외에도 가치 있는 순간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일 필요는 없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사회의 구조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최소로 일해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본소득을 보장해줌으로써, 적은 노동으로도 개인이 자유롭고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 외 노동시간의 단축, 탈노동 연대의 네트워크 구축을 저자는 시스템적 개선책으로 주장한다. 나는 이에 더해 공공 돌봄 및 평생교육 및 문화 예술 활동 지원 같은 사회적 서비스의 확대, 자동화 시스템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기업에 일부 환수하는 조세 개혁과 돌봄과 자원봉사, 창작과 체험농장 같은 비노동 영역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일 외에도 의미 있는 삶이 있을 수 있음을 공감하는 열린 사회를 위해서 우리는 한번쯤 저자와 더불어 일의 의미에 대해서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끊임없이 일해야 생존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기존의 가치관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다. 실업을 개인의 실패로 간주하는 사회적 편견에 회의를 느끼거나, 생산성 외의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고 싶다면, 이 책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 교양 100그램 7
김준형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준형 교수의 저서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는 트럼프 시대를 기점으로 변화한 미국의 외교 전략과 국제 정치의 구조적 변화를 분석한 국제정치·외교 교양서이다. 저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과 태도를 중심으로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 노선이 국제 질서에 미친 영향을 탐구하며, 이를 통해 세계정세의 불안정성을 심도 있게 조명한다. 나아가 급변하는 국제 정치 환경 속에서 한국 외교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균형 잡힌 성찰을 제시한다.

 

국제 정세는 역사, 문화, 경제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분야로, 일반 대중에게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적 내용을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창비 교양100그램 시리즈의 특성에 맞게 핵심 사항을 간결하게 정리하며 자국 중심주의로 급선회한 미국의 외교 전략이 파행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집중한다. 이러한 접근은 독자들에게 명료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한다.

 

책의 내용은 세 가지 주요 부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균열되며 신냉전 체제가 도래한 원인과 그 파급효과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는 미국이 트럼프 행정부 이후 더 이상 세계 패권국가로서 국제 사회의 조정자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WHO 탈퇴, WTO의 자유무역지대 정신과는 상충되는 일방적 관세 부과, 그리고 유엔 탈퇴 논의까지 언급하며, 미국 스스로가 만든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가당착적 행태를 비판한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여전히 세계 경제 및 안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은 한층 더 심화된다. 저자는 이로 인해 세계는 다시금 미국·중국·러시아에 의해 삼분되는 신냉전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두 번째는 한국 외교의 방향성을 탐구하는 부분이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주요 교역국 사이에서 경제와 안보 측면 모두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저자가 제안하는 한국 외교 노선은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실용주의적 접근이다. 그는 미국과 경제적·군사적 동맹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평화를 중심으로 한 협업 외교 전략을 모색하며, 미국이 만들어낸 분열 상황에서 제3국과의 연대를 통해 대안적 외교 경로를 탐색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비용 대비 실효성을 갖춘 현실적 지침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부분은 민주 국가에서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정부의 외교 정책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시민사회가 이를 견제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교가 국가만의 전유물이 아닌 시민 의식과 참여를 통해 더욱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외교 정책에 대한 시민 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전례가 여럿 있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 당시 김종필-오하라 메모 협정을 둘러싼 대규모 시민 시위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가 바로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시민의 외교 정책 견제를 통해 더욱 책임 있는 정부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국회 의원으로서 활동 중인 저자가 이와 같은 시민 참여를 법제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시민 감시의 실효성을 강화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된다.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는 변화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이 자주적이고 균형 잡힌 외교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체계적이고 날카로운 분석을 제공한다. 외교와 국제정치에 관심을 가진 독자,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역할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관점과 사고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미국 외교의 변화를 탐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이 직면한 국제적 도전과 기회, 그리고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폭넓게 논의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변화하는 세계 속 우리의 위치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으로서, 깊은 독서를 권하고 싶다.

 

#미국의배신과흔들리는세계 #김준형 #외교 #교양100그램 #그램독서 #창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