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강보라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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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자인 강보라 작가님을 알게 된 건 지난 4월에 읽은 2025년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작 <바우어의 정원>을 통해서였다. <바우어의 정원>의 주인공은 지난 삼년 간 세 번의 유산을 하고 배우 활동을 접었다가 오디션을 계기로 간만에 사회로 나온다. 눈이 내리는 도로 위에서 낡은 모닝 차를 서툴게 조작하면서 운전하는 장면은, 그녀가 꽤나 사회와 깊게 단절되어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인 은화가 참여한 연극의 오디션 주최측은 그녀에게 여성의 몸과 상처에 대한 자기고백적 연기를 요구한다. 은화는 삼년 간의 칩거의 근원이었던 유산에 대한 고백으로 오디션을 참여한다.


지난 삼년 간 저는 세 명의 아이를 잃었습니다.

 

 다시 읽어도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독백.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나도 작중 주인공처럼 지난 3년간 7명의 아이를 잃었다. 저자는 스스로 겪지 않은 이야기를 썼노라 고백했지만, 작중 은화의 이야기는 내게는 나의 이야기였다. 작년에 나는 6년 만에 힘들게 들어선 태아를 뱃속에서 잃었고, 재작년 봄에는 3개월을 기다려서 가까스로 데려올 수 있었던 입양 딸냥이를 고작 두 달만에 병마로 떠나 보내야 했으며, 재작년 가을에는 14년을 키워온 내 장남 아들 냥이를 3개월에 걸친 시한부 심장, 신장 투병 끝에 잃었다. 재작년 겨울에는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사산된 두 마리의 손주 냥이를 보내줘야 했고, 올해 봄에는 또 한 마리를 태내에서, 또 한 마리의 증손주냥이를 태어난지 보름도 되지 않아 떠나보내야 겠다. 내 고양이들과 태아는, 모두 내게는 하등 다를 바 없는 자식이고, 새끼를 잃은 어미에게 상실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다시 시간을 돌이켜도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발버둥을 치면서 최선을 다했어도, 떠나버린 생명의 무게는 내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되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는 결코 지울 수 없는 회한들.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을 앞세우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들은 바 있는데, 근 삼년 사이에 너무 많은 내 새끼들을 보내면서 나는 그걸 몇 번이나 깨우쳤다. 그 와중에 몇 번이나 사선을 넘나들다가 가까스로 살린 내 애기들이 나를 이 땅에 잡아두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이 기나긴 슬픔의 여정에서 어느 순간 나를 놓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안으로 침잠하면서, 온갖 것을 곱씹으면서 만약을 거듭하던 절망과 슬픔의 순간들. 시간을 돌이킨다 해도 그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반추되던 시간들. 아이들과의 이별은, 나를 죄 없이도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할퀴어대던 시간들. 나는 은화의 담담한 고백 속에서 그녀가 되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로 들이마신 상한 우유 속의 벌레가 저의 몸을 근원적으로 망쳐놓았을 지 모른다는 그녀의 비합리적인 고백이 너무도 잘 공감이 되었다. 원래 아이를 잃은 어미란 그런 존재이다. 온갖 미신과 비합리와 맹신 속에서 스스로를 다그치고 몰아세우게 되는, 못나고도 슬픈 존재 말이다. 짧은 단편을 지나간 고통과 함께 읽어서일까. 저자가 등단 후 4년 간 쓴 글을 곱게 갈무리하여 소설집으로 출간한 이 소설집에서 역시나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작품은 역시나 일전에 읽고 재독하게 된 '바우어의 정원'이었지만, 그 작품 외에도 인상적인 글들이 아주 많았다. 


단편집 말미에 수록된 작품 해설서를 보니 저자의 작품이 자기 정체성과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는 자기 서사, 타자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불편함을 직시하는 용기를 드러낸 작품이란 표현이 직간접적으로 반복되던데, 나도 일정 부분 공감하게 되었다. 저자의 글은 결코 쉽고 술술 읽히지 않는다. 작중 화자들은 어딘가 꼬여있는 느낌이다.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곧고 다정하지 않다. 상처 입은 과거에 여즉 붙들려 있거나 혹은 풀리지 않은 욕망을 숨기고 있거나, 혹은 아직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까닭에, 조금씩 삐딱하게 사회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흡사 인생의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관찰자인 조연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글 같다는 인상이 들었달까. 그렇기에 작중 인물이 그려내는 세상은, 그 세상에서 나름의 가치를 실현하며 반듯하게 서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는 불편한 감각을 자아낸다. 하지만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이어지는 우리네 삶을 반영하듯, 저자의 작중 세계가 덜어낼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삶 그 자체의 투영이란 생각이 들었다. 


표제작이기도 한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이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저자의 글은 낯선 감각을 자아낸다. 그저 생경할 뿐더러 어떤 의미로는 이상하기도 한, 그래서 나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글들이랄까. 하지만 반듯하지 않으면 어떠하고, 익숙하지 않으면 또 어떠한가. 이해하기 쉽고 공감하기 쉬운 인물이 나오는 글이 아니라 이해가 안 되지만 한 번쯤 이해해보고 싶은 인물들이 나오는 글이 독자의 읽기 경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신형철 평론가님의 발언에 나도 공감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글이 가진 이색적인 감각은, 한 번쯤 경험해보고 내 것으로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부추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이들 속에서 내 삶을 반추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그녀가 제시하는 불편함은 깊은 사유와 통찰의 기회로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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