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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평점 :
작년에 읽은 김주혜 작가님의 <작은 땅의 야수들>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대하소설이었다. 그래서 이번 신작 <밤새들의 도시>가 출간된다는 광고를 접하고, 기대감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출간 직후부터 이어진 뜨거운 SNS 프로모션을 지켜보면서 읽고 싶은 마음은 더 커졌지만, 뒤로 미루고 있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장편소설을 국제도서전을 앞두고 어수선한 심리 상태에서 섣불리 시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새들의 도시>는 러시아의 천재 무용수 나탈리아 레오노바(나타샤)와 그녀를 둘러싼 무용수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인물소설이다. 나타샤와 알렉산드르 니쿨린(사샤)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발레사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 실감 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발레 팬이라면 분명 이 작품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발레라는 예술을 좋아해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배우고, 공연까지 혼자 보러 다닐 만큼 애정이 깊은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이 작품은 매 순간이 감정이입과 몰입의 연속이었다. 나탈리아가 날아오를 때마다 나도 그녀와 함께 중력을 거스르는 기분이 들었고, 무대 조명 아래에서 환희의 순간을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사랑을 느낄 때 나도 그녀와 함께 설렜고, 괴롭힘을 당하며 좌절할 때는 함께 고통에 빠졌다. 심지어 사고와 부상, 그리고 우울의 늪에 빠지는 순간들도 마치 내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특히 마지막 무대에서 나탈리아가 지젤을 공연하기 위해 나아가는 장면. 드라마틱한 부상을 딛고, 그녀와 환상의 파트너가 이루어낸 그 무대는 나에게 심리적 절정을 선사하며 눈물까지 나오게 했다. 나탈리아의 큰 고별 무대를 관통하며, 나는 이 작품 속 그녀의 삶에 온전히 기대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환희만 남긴 작품이 아니었다. 저자가 언급했듯, 아무리 위대한 예술도 언젠가는 끝이 있다. 하지만 지젤 공연이 절정에서 끝이 나더라도, 나탈리아의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진다. 나타샤가 마린스키 최초의 여성 감독으로 도약하는 장면은 우리 삶이 하나의 예술처럼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 작품은 단순히 발레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 인간 삶과 관계의 복잡성을 드러낸 고도의 서사적 예술이다.
이성복 작가님는 “문학은 인생이라는 꿈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꾸는 또 다른 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 문학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나의 문학 읽기는 나와 다른 삶을 이해하면서, 내 삶의 방향성을 다시 점검하는 과정 같은 것이다. <밤새들의 도시>를 통해 나는 예술, 인간관계, 그리고 욕망이 얼마나 날카롭게 얽혀 있는지 깨달았다. 나탈리아처럼 뛰어난 천재라 해도, 그녀가 가진 감정과 관계의 갈등은 결국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나타샤 주위의 인물들은 사샤를 그녀의 인생에 끼어든 나쁜 남자라고 여겼지만, 결국 나타샤는 그를 자신의 사랑이자 영혼의 파트너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녀가 사샤를 용서한 장면에서 그녀의 감정을 절절히 공감했다. 나 역시 사샤가 그녀를 사랑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사랑은 서로를 태워버릴 만큼 강렬하더라도, 끝내 함께할 수 없는 관계로 남기도 한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를 살라내며 자기 자신까지 태우는 불길 같았다. 반면, 매그너스와의 관계는 서로를 감싸 안는 따스한 불꽃처럼 오래도록 조화를 이루며 타오를 수 있는 안정적인 사랑이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사샤를 보내고 그의 행복을 빌었듯, 나 역시 이 등장인물들의 행복과 안녕을 빌어주고 싶다.
저자의 전작이 민족적 뿌리를 찾는 여정이었다면, 이번 신작은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밤새들의 도시>는 단순히 예술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작품은 바로 나탈리아가 발레라는 예술을 통해 자신 안에 깃든 영혼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우리가 각자 가진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놓고 싶지 않은 꿈과 도전을 위해 나탈리아의 이야기는 보편적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서사는 천재 예술가의 삶이기에 감동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그녀 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울림이 만들어진다. 발레라는 낯선 세계를 배경으로 삼고는 있지만, 그 무대 안팎에서 무너지고 성장하는 나탈리아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 삶에 연결되는 보편적 진리가 있다.
이 책은 단지 발레 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독자가 그녀와 함께 무대에 오르고, 그녀들과 함께 날아오르는 동안 발레의 낯선 용어조차 마법의 주문처럼 마음속에 스며든다. 나는 이 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길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