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다 2 - 역사의 변곡점을 수놓은 재밌고 놀라운 순간들 역사를 보다 2
박현도 외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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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잃으면 미래를 잃는다>


  


나는 박물관 덕후이다. 유물 앞에 서면 그 시대를 상상하며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좋아한다. 깨진 토기 조각은 그 시대에 살았던 한 사람이 만든 쓸모 있는 생활용품이었을 테고, 녹슨 청동검은 누군가가 손에 쥐고 자신의 운명을 걸었던 무기였을 것이다. 유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의 우리에게,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나는 그 메시지를 읽고 싶어서, 박물관에서 유리 진열장 너머에 있는 유물의 설명문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곤 한다. 이 작은 조각에서 역사의 숨결과 사람들의 흔적을 느끼고 싶어서다.  


<역사를 보다 2>를 읽으면서 나는 마치 책으로 만들어진 박물관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은 역사 유튜브 채널을 통해 선보인 흥미로운 역사적 순간들을 풍부한 시각 자료와 함께 풀어낸 작품이다. 역사적 사건과 그 맥락을 풀어내면서도, 단순한 사실 나열에 머물지 않는다. 이 책이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은 유물이나 사건 자체보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있다.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겼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히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박물관에서 유물 앞에 서 있던 나 자신을 떠올렸다. 단지 오래된 물건을 눈으로 보며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이 물건은 왜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사용되었을까?”를 상상하던 순간들. 그 상상은 과거 속 사람들과 나를 연결 시켰고, 유물은 생명력을 띤 채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역사를 보다 2>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책 속에서 느끼게 만들어준다. 각 사건의 맥락과 자세한 해설은 독자로 하여금 단순히 재미를 넘어, 역사적 책임과 성찰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또 하나의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이것은 과거의 메시지를 통해 현재를 배우고,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깨닫게 하는 책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학교 교육에서 세계사와 같은 과목은 선택 과목으로 밀려나 있고, 청소년들은 역사가 “외울 것이 많고 시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멀리하고 있다. 한때 나는 역사와 박물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 차이로 치부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교육 현실의 문제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오늘날 한국의 교육 현실을 직시해 보면, 세계사 교육은 이제 필수 과목이 아니다. 선택 과목으로 축소된 결과, 많은 학생들이 세계사를 배우지 않고도 학업을 마칠 수 있다. 물론 교사와 학생의 입장을 고려하면 선택 과목으로 만든 정책적 이유는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세계사는 외울 것도 많고, 교과서 한 권에 축약된 세계의 역사를 깊이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입시에 빨리 답을 써야 하는 시험 구조 속에서는 역사를 깊이 알려고 하기보다 외워서 ‘통과’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세계사는 가장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과목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세계사적 관점 없이 어떻게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기후 위기, 난민 문제, 신자유주의로 인한 빈부격차, 지정학적 갈등 같은 문제들은 모두 국경을 초월한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지 않은 채 이 문제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금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조차 우리는 역사를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고려 대장경판의 사례를 통해, 세계사와 한국사의 연결성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고려의 대장경판은 단순히 한 민족이 남긴 위대한 성취로만 볼 수 없다. 그 판을 제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아시아 불교 네트워크를 통한 지식 교류와 중세 인쇄술의 발전이라는 커다란 맥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이 역사의 본질이다. 역사는 단절되지 않는다. 우리 주변의 한 사건은 곧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으로 얽혀 있다. 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현재를 더 정확히 읽고,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갈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외울 게 많아서 싫어요.” 하지만 역사는 시험 과목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아갈 길을 안내하는 지침서와 같다. 역사를 아는 것은 단순한 상식이 아니라, 인간됨을 배우고, 더 나은 길을 선택할 힘을 기르는 일이다. 과거의 시간들을 단순히 ‘옛날 이야기’로 묶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현재를 이해할 틀을 잃고 만다.  


제국의 흥망을 이해하면 오늘날 초강대국의 부상과 쇠퇴를 설명할 수 있다. 고대 종교와 사상의 흐름을 배우면 현대의 갈등과 연대의 뿌리를 이해하게 된다. 한국사의 작은 장면조차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재조명될 때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드러난다. 역사를 이해하는 일은 한 사회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놓아야 할 필수적인 초석과도 같다.  



다행히도 이 책은 역사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작은 희망이 된다. 이 책은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면서도 어렵지 않게 읽히며, 마치 박물관에 걸어 들어가 유물의 설명을 읽는 것 같은 흥미를 준다. 학교에서 모든 역사 교육이 축소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대중은 여전히 박물관과 책을 통해 역사와 만나고자 한다. 여전히 역사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더 깊은 성찰로 이끄는 힘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역사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했다. 역사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도구이다. 과거는 우리에게 생생한 메시지를 남긴다.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 번영과 쇠퇴, 평화와 갈등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가르쳐 준다.  


이제는 역사를 배울 기회를 되찾아야 한다. 역사를 외면하는 사회는 현재를 오해하고 미래를 잃는다. 역사를 보다 2는 박물관처럼 열린 교실로,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잃지 않을 때, 우리의 미래도 올바르게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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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0-23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사를 몰라도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심지어 조선시대 사람들은 세계의 역사는 알지도 못했죠. 그렇지만 잘만 살았습니다. 세계사 교육은 근대 이후인데...그나마 제대로 교육하는 나라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고교 교과과정에서는 전부 선택과목이죠. 물론 역사를 배우면 도움이 되는 면이 아주 많지요. 하지만 관심이 없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님이 물리학을 필수로 배우지 않은 것처럼요. 물리학도 배우면 도움이 아주 많이 되지요. 그렇다고 그걸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고 배우고 싶은 사람이 배우게 하면 되는데...그게 교육에 대한 철학이지 않을까 합니다..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 나라다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까
백낙청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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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백낙청 선생님의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는 2016~2017년 촛불항쟁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정치적·역사적 맥락에서 제시하는 정치 비평서이다. 이 책은 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제도화된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불평등과 분열, 혐오의 정치로 인해 어떻게 망가져왔는지를 냉철하게 분석한 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으로 '변혁적 중도'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전통적인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뛰어넘는 변혁적 중도는 단순한 타협의 정치가 아닌, 근본적 변화를 열망하면서도 지속 가능하고 통합적인 사회 발전을 추구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비전이다.


저자는 촛불항쟁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거울삼아 이 개념을 뒷받침한다. 특히, 촛불항쟁을 변혁적 중도의 구체적 실천이라 규정하며, 이것이 민주주의 심화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한다. 하여 나는 저자의 논지를 중심으로 변혁적 중도 개념이 촛불항쟁과 한국 민주주의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변혁적 중도란  단순한 절충이 아닌 통합적 비전이다


저자가 말하는 중도는 기계적 중립이나 온건한 타협과는 거리가 멀다. 진보와 보수라는 양 극단이 만들어 낸 소모적 대립을 초월하고, 근본적 사회 변화를 목표로 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방식의 연대와 공존을 중시하는 개념이다. 변혁적 중도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옥죄어 온 양극화와 혐오를 넘어, 분열된 사회를 아우르는 실천적 패러다임이다. 특히 이 개념은 민주주의가 단순히 제도의 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일상 속에서 내면화되고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통해 변혁적 중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1987년 항쟁 이후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는 정착되었지만, 신자유주의적 경제 재편 속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가치인 평등과 연대는 약화되었다. 보수 정권은 효율성과 경쟁의 논리로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해 왔으며, 진보 진영은 급진적 구호와 분열적 투쟁으로 효과적인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데 실패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저자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적 도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이 도전의 핵심을 변혁적 중도에서 발견한다.


2. 촛불항쟁 ― 변혁적 중도의 대표적 구현


저자는 촛불항쟁을 변혁적 중도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대표적 사건으로 평가한다. 2016년부터 약 4개월간 진행된 촛불 항쟁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수백만 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평화적 저항운동이었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 요구를 넘어,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진화시키고자 하는 시민적 열망의 표출이었다.


촛불항쟁은 급진성과 평화성이 공존했다. 시민들은 권위주의적 권력의 퇴진이라는 급진적 요구를 비폭력적이고 절제된 방식으로 관철하였다. 이는 저자가 강조한 변혁적 중도의 핵심적 특징인 급진적 변화와 지속 가능성의 조화를 잘 보여준다. 또한 촛불항쟁은 진보와 보수라는 기존의 이념적 틀을 초월한 범시민적 연대의 장이었다. 학생, 노동자, 중산층,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광장에서 함께한 것은 구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와 동시에 새로운 연대를 향한 열망을 상징한다.


3.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 ― 촛불의 사회경제적 기반


촛불항쟁은 단순한 정치 부패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확산된 신자유주의는 비정규직 노동의 증가, 사회적 양극화, 중산층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청년 세대는 고용 불안과 취업난에 시달렸고, 경제적 불안정성은 기존 권위주의 정권을 지지하던 계층마저 광장으로 이끌었다. 이처럼 촛불항쟁의 배경에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단순히 부패한 정권의 교체를 넘어, 더 나은 삶을 위한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이는 곧 변혁적 중도가 추구하는 정치적 상상력, 즉 기존 체제의 구조적 개혁과 모든 시민이 배제되지 않는 사회를 향한 지향과 일치한다.



4. 촛불 이후의 우리의 과제는 분열과 혐오의 정치를 넘어선 연대이다


촛불항쟁은 권위주의적 정권을 탄핵하고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최종적 목표로 보지 않는다. 촛불항쟁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작점이었을 뿐이다. 이후 한국 사회는 정치적 분열과 혐오의 확산,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의 고착화라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촛불항쟁이 제기한 근본적인 질문이 아직 온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변혁적 중도의 실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이는 제도적 변화와 시민적 참여의 심화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혐오의 정치로 퇴행하지 않기 위해, 또다시 촛불이 불타오르지 않도록, 촛불의 연대 정신을 제도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대립을 넘어서는 포용적 정치 문화를 만드는 것, 그리고 시민들의 일상적 참여를 제도화하는 과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5. 글을 마치며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는 한국 민주주의의 변곡점에서 촛불항쟁을 새로운 방향의 모범적인 사례로 제시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안한다. 급진성과 평화성의 공존, 특정 이념을 초월한 연대, 그리고 시민적 각성은 1987년 체제 이후 공고화된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저자가 제시한 변혁적 중도는 단지 정치와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한국 사회 모든 영역에서 배제와 대립을 넘어 연대와 통합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시대정신이다.


이 책을 대한민국 현대사의 전환점을 이해하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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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십 대를 위한 토닥토닥 책 처방전
권희린 지음 / 생각학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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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십대를 위한 토닥토닥 책 처방전』은 학생들이 흔히 겪는 고민과 혼란에 귀 기울이며, 책을 통해 답을 찾도록 돕는 독서 지도서이다. 저자 권희린은 청소년의 심리적 위기를 중심으로 맞춤형 책을 추천하고, 이를 통해 아이들이 자기 삶을 재해석하고 내면의 자아를 탐구하도록 안내한다. 이 책은 전통적인 교양도서 목록이나 필독서 추천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저자는 독서를 지식 축적이나 성취의 도구가 아닌, 마음을 돌보고 공감하는 수단으로 바라본다. 독서가 청소년 독자를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처방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서툴지만 책 속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갈 용기를 북돋아 준다.


책은 총 18가지 사춘기 고민을 네 가지 큰 주제로 나눠 다룬다. 각각의 섹션은 감정, 관계, 정체성, 미래라는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이 매일 느끼는 고민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고민과 닮은 책을 처방해주며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수년간 강사로서 마주했던 학생들의 표정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면, 이 책에서 다룬 고민들이 교실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 체감하지 않을 수 없다.


1. 비교하며 초라해질 때


학생들이 자주 토로하는 공통적인 고통 중 하나는 비교로 인한 열등감이다. 이 문제는 우리 교육 시스템과 SNS 문화에서 더욱 심화된다. 아이들은 성적, 외모, 가정환경 등 모든 면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한다. SNS를 통해 친구와 지인의 "편집된" 삶을 보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충분치 않다고 느끼곤 한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현대의 문화와 시스템이 만들어낸 고질적인 문제이다.


『토닥토닥 책 처방전』의 "비교하며 초라해질 때" 파트는 이 문제를 다룬다. 이 섹션에서 소개된 『나를 팔로우하지 마세요』는 SNS 상의 비교로 인한 악순환을 반영하며, 성취와 우월성을 넘어 존재의 고유성을 드러내도록 돕는다. 학생들에게 단순히 “너는 충분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선생님의 말은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 속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깨닫는 자각은 훨씬 강력하다. 책은 아이들의 자아를 지탱할 든든한 토대가 되어줄 수 있다.


2. 무기력할 때


최근 내가 교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말이다. 종종 이 표현은 단순한 습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무기력과 탈진은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게으르거나 무책임하지 않다. 그들이 느끼는 무기력은 현실적으로 숨 쉴 공간 하나 허락되지 않는, 지나치게 성취 지향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기억전달자』는 무기력함 속에서도 스스로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을 발견하게 해준다. 책 속 주인공이 사소한 선택과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는,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말없이 큰 용기를 준다. 학생들이 이 책을 통해 하루하루의 소소한 순간들이 가진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말 끝에 잠재된 희망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3. 시간에 쫓길 때


입시, 수행평가, 각종 활동에 치이는 학생들에게도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럴 때 많은 어른이 시간 관리 기술이나 효율적인 공부법을 전수하려 하지만, 이는 한계가 분명하다.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남는 시간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 아닌, 쫓기는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토닥토닥 책 처방전』의 "시간에 쫓길 때" 파트는 이러한 고민에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특히 『시간을 파는 상점』은 목표와 생산성에 매몰된 현대의 삶에서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독특한 관점을 제공한다. 시간을 단순히 통제나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삶의 리듬을 회복하는 자원으로 여기는 태도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이 책은 기존의 틀에 갇힌 시간 개념을 깨고, 학생들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4. 지금 내 상황이 싫을 때


십대의 본질적인 고민은 대부분 정체성의 위기와 불안으로 집약된다. 아이들은 종종 "지금 내 상황이 싫다", "내가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냐"는 말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짜증이나 충동적인 발화가 아니다. 이는 현재를 버리고 싶다는 깊은 갈등의 표현이며, 학생들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이다.


이 책은 "지금 내 상황이 싫다"는 마음에도 다정하게 응답한다. 『위저드 베이커리』와 『그리스인 조르바』는,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준다. 두 책 속 주인공은 현재의 고난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삶의 소중한 의미로 바꿔 놓는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지금의 자신도, 있는 그대로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까칠한 십대를 위한 토닥토닥 책 처방전』은 단순히 책을 추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청소년들이 고민을 넘어 자신의 삶을 해석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다. 오늘날의 문해력 위기는 단순히 기술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이야기와 삶을 연결하는 통로가 부재한 데서 발생한다. 이 책은 학생들이 책 속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재해석하고, 스스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도록 도와준다.


강사로서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독서는 학습의 도구가 아니라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아이들과 책을 매개로 소통할 때, 교사는 더 이상 지식 전달자가 아니다. 교사는 아이들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반자가 된다. 『토닥토닥 책 처방전』은 학생과 교사 모두를 위한 소중한 안내서이다. 이 책이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나침반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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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자 선언 - 99%의 풍요를 위한 자본주의 경제를 열다
요한 노르베리 지음, 김종현 옮김 / 유노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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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자 선언과 한국경제>

 

요한 노르베리의 자본주의자 선언은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사회과학서로, 통계와 여러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빈곤을 줄이고 물질적 번영을 확산한 과정을 추적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유 시장 경제의 가장 큰 강점을 "자발적 교환과 협력"에서 찾는다. 물론, 이러한 경제 시스템이 불평등을 초래할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유 시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창의성과 혁신을 북돋우며, 결과적으로 더 큰 경제적 효용을 창출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를 둘러싼 논쟁에서 흔히 간과되는 사실들을 드러내고, 번영의 제도적 기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자유 시장의 작동 원리를 밝히는 데 있어, 저자는 세계 각국의 경제 성장 데이터와 빈곤 감소 추세를 제시하면서 개방, 무역, 시장 경쟁이 경제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논증한다. 이러한 주장의 설득력은 제시된 수치와 사례의 적절성에서 비롯된다.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경제적 풍요와 절대적 빈곤의 축소가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에 힘입은 결과라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주장을 한국 경제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질서 정연하게 대입해 볼 수 있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가 경험한 급격한 변화와 성장은 바로 노르베리가 제시한 '자유 시장의 동력'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자유 시장의 기본 원리를 수용하면서도 이를 자국의 상황에 맞게 독창적으로 적용해 온 바, 자본주의의 성공과 한계를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한국 경제의 역사적 발전과 자유 시장>

 

한국 경제는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박정희 정부는 수출 주도형 경제 모델을 채택하여 중공업과 제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다. 당시의 정책은 정부 주도의 계획 경제에 가까웠으나, 시장 개방과 무역 확대라는 방향성만큼은 분명히 자유 시장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산업화는 한국 경제의 기반을 다지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독점적 재벌들의 형성과 이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초래했다.

 

특히, 1970년대 통일벼의 개발과 같은 농업 혁신은 한국 경제 발전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통일벼는 국가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으며, 국민의 기본적 생계가 안정되자 경제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분식을 강요하며 외화를 아껴야 할 정도로 극심한 빈곤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는 GATTWTO를 비롯한 국제 자유무역 체제에 편승하며 빠르게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고 물질적 풍요를 이룩하게 된다.

 

1997년 외환 위기는 한국 경제가 또 한 번 구조적 전환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IMF 체제하에서 대대적인 규제 완화와 시장 개방을 추진하며 경제 위기 극복에 나섰다. 이는 현재 한국이 세계적인 IT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반도체, 모바일 산업, 인터넷 기반 기술 등은 바로 이 시기에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렇게 한국 경제는 오일쇼크, 외환위기, 금융위기와 같은 외부 충격 속에서도 개방성과 혁신을 통해 끊임없이 적응하며 번영을 이루어냈다. 이는 저자가 책에서 주장한 "개방 시장이 혁신과 번영을 촉진한다"는 메시지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는 여전히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현재 한국은 1인당 GDP 3만 달러 수준에 머물며,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다. 경제적 성장은 둔화되고 국민들은 점차 더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자본주의 시장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개혁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노르베리가 제시한 자유 시장의 지속적 개혁과 발전이라는 방향성을 한국적 맥락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현대 한국 경제의 과제와 방향성>

 

현재 한국 경제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자유 시장 원리가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우선, 시장 개방을 더욱 확대하고, 무역의 다변화를 꾀해야 한다. 현재 한국은 중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이는 중국의 수출 규제나 혐한 정책 등이 시행될 때마다 한국 경제가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새로운 성장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신흥시장으로의 진출을 전략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는 노르베리가 강조했던 "시장 확장은 국가의 생존 전략"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둘째, 규제 샌드박스 제도의 확대와 노동 시장 유연화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산업 구조는 특정 분야(반도체, 자동차, 2차 전지)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분야조차도 국제적 경쟁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 인공지능(AI), 바이오 기술, 디지털 콘텐츠와 같은 첨단 산업 분야에서는 아직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다. 이에 더해 창업 친화적 환경의 부족과 과도한 노동 규제 또한 산업의 다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창의적인 신산업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정착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규제 완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노동 교육 시스템을 통해 장기적인 기술 유망성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로, 한국 특유의 만성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 강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의 불가피한 결과인 분배 왜곡을 극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시장의 자율적 조정만으로는 빈부 격차, 세대 간 불평등, 그리고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와 민간 부문이 협력하여, 경제 성장률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기회의 재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방안들을 마련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미래, 균형의 추구>

 

한국 경제는 이미 자유 시장 원리의 성공적인 모델을 보여 주었다. 20세기 중후반 동안 개방과 무역, 혁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룬 눈부신 성장은 노르베리가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가치의 힘을 입증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에게는 더 큰 도전과 과제가 주어져 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산업 구조를 다변화하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노르베리가 말하는 "창의적이고 포용적인 경제 체제"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본주의자 선언은 단지 과거 자본주의의 성취를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성공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통찰은 이 점이다. 자본주의는 단일한 해답이 아니라, 꾸준히 조율하고 개혁해야만 작동할 수 있는 "동적 체제"라는 사실 말이다. 한국 경제를 위해서도 개방의 확장과 공정한 경쟁, 그리고 지속 가능한 사회적 합의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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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밖의 이름들 - 법 테두리 바깥의 정의를 찾아서
서혜진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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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진 변호사님의 법정 밖의 이름들서평

 

 

1. 들어가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마주하다

 

서혜진 변호사님의 법정 밖의 이름들은 단순히 피해자의 고통을 나열하거나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책이 아니다. 이는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면서 법의 한계를 고발하고,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인간의 고통을 관찰자로서 바라보는 경향이 커져버린 시대에, 이 책은 피해자들의 불완전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법적·사회적 치유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노력한다.

 

책은 피해자의 말하기와 그 말이 처한 법 제도적·사회적 장애물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저자는 피해자가 법정 안에서조차 자신의 목소리에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형식적인 절차에 머물러야 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동시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대처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질문하며, 피해와 가해가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다.

 

 

2. 피해자 말하기의 본질과 사회적 침묵

 

저자가 가장 강렬하게 던지는 질문 중 하나는 우리는 피해자의 말을 믿는다 하면서도 과연 제대로 듣고 있는가? 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듣는 능력을 상실했다. 각자의 목소리가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다채롭게 확산되는 시대지만, 정제된 말조차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상처받은 자의 발언은 더더욱 무시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디지털 성범죄, 데이트 폭력, 스토킹 사건 등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발화하려 하지만, 그들의 말이 의심받거나 공적 담론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다움이라는 틀에 갇힌 사회는 피해자의 말에서 감정의 격렬함을 문제 삼거나, 피해자의 신체적 증거만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특히 심리적 고통은 법적 가치 판단 영역에서 배제되며, 입증되지 않은 고통은 가해자 처벌이나 피해자 치유에서 무력해진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기술적 환경과 피해자 말하기의 충돌을 강조한다. 말은 많지만, 듣는 귀는 없는 시대에서 피해자의 발언은 단순한 증언이나 고발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개인적이고 연약한 요청이며, 우리의 공감과 행동을 요구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말하기가 단순히 법적 절차를 위한 증거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연대의 출발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3. 보수적 법제도의 한계와 피해자의 이중적 고통

 

우리나라의 법 제도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고통은 증거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리적 증거 없이 고통을 입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은 법적 절차에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책은 디지털 성범죄인 딥페이크 사건, 데이트 폭력, 스토킹 등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다루며 법과 제도의 문제를 지적한다.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는 자신의 영상이 유포되는 과정과 그것이 사회적 차별로 연결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한다.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에서도 가까운 관계에서 발생한 피해는 가족적 혹은 개인적 문제로 치부되며 제대로 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저자는 특히 판사들이 자의적 작량감경을 통해 가해자에게 유리한 형량을 부여하고, 피해자에게는 거의 아무런 실질적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가해자가 구속 수감되지 않고 집행유예로 풀려났을 때, 피해자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법적 처벌을 기다린 피해자는 수치심과 불안에 휩싸인 채 자신의 삶과 안전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

 

법의 미흡함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의학적 영역이나 심리 상담으로 밀어내고, 본질적으로 법이 보호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게 만든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피해의 증폭과 피해자 고립을 낳으며, 법적 정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고착화한다.

 

 

 

4. 해외 입법례와 우리가 꿈꾸는 정의

 

서혜진 변호사는 법적 제도와 한계를 논하는 과정에서 해외 입법례에 주목한다. 특히 가해자가 자살했을 때 사건이 종료되지 않고 심리가 계속되는 입법례는 피해자 보호와 사회적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혁신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법제도는 대개 가해자의 죽음을 사건 종료의 이유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비난을 받으며, 분명히 정당한 권리 행사를 했음에도 이중적인 사회적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과 사회 정의 구현이 가해자의 생존 여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례의 도입은 우리나라가 법적 책임과 정의의 원칙을 재정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가해자가 죽음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법적 틀은 피해자의 심리적 치유를 돕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책임 윤리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살아서 반성과 책임을 다하는 가해자들을 늘리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5. 책임 윤리와 연대가 필요한 이유

 

책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책임 윤리'를 강조한다. 법정에서 감정의 격렬함이 배제되고, 피해자의 고통이 공적 논의의 장에서 왜곡되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분노나 임시적인 정의 구현이 아니다. 대신 피해자 곁에 조용히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끝까지 듣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연대가 필요하다.

 

저자는 피해자를 구조해내는 드라마틱한 법정 싸움이 아니라, 무력하고 외로운 피해자 곁에 서서 책임 있는 윤리를 다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법적 정의를 확장하려면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폭력을 끝내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치유와 안전을 제공하는 구조적 대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6. 나가며: 함께 서는 책임의 시작

 

서혜진 변호사의 법정 밖의 이름들은 피해자의 말을 드러내고, 법과 제도에 이를 정당하게 반영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고통에 책임과 연대로 답하는 것이야말로 사회 정의의 시작이다.

 

이 책은 단순한 고발에 머물지 않는다. 피해자와 사회의 관계, 법의 책임과 공동체 윤리를 고민하며, 법정 밖에서도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근본적인 태도를 일깨운다. 피해자와 함께 서고, 법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책임 윤리가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아 있음을 책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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