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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밖의 이름들 - 법 테두리 바깥의 정의를 찾아서
서혜진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8월
평점 :
서혜진 변호사님의 『법정 밖의 이름들』 서평
1. 들어가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마주하다
서혜진 변호사님의 『법정 밖의 이름들』은 단순히 피해자의 고통을 나열하거나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책이 아니다. 이는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면서 법의 한계를 고발하고,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인간의 고통을 관찰자로서 바라보는 경향이 커져버린 시대에, 이 책은 피해자들의 불완전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법적·사회적 치유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노력한다.
책은 피해자의 말하기와 그 말이 처한 법 제도적·사회적 장애물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저자는 피해자가 법정 안에서조차 자신의 목소리에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형식적인 절차에 머물러야 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동시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대처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질문하며, 피해와 가해가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다.
2. 피해자 말하기의 본질과 사회적 침묵
저자가 가장 강렬하게 던지는 질문 중 하나는 우리는 피해자의 말을 믿는다 하면서도 과연 제대로 듣고 있는가? 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듣는 능력을 상실했다. 각자의 목소리가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다채롭게 확산되는 시대지만, 정제된 말조차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상처받은 자의 발언은 더더욱 무시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디지털 성범죄, 데이트 폭력, 스토킹 사건 등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발화하려 하지만, 그들의 말이 의심받거나 공적 담론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다움이라는 틀에 갇힌 사회는 피해자의 말에서 감정의 격렬함을 문제 삼거나, 피해자의 신체적 증거만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특히 심리적 고통은 법적 가치 판단 영역에서 배제되며, 입증되지 않은 고통은 가해자 처벌이나 피해자 치유에서 무력해진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기술적 환경과 피해자 말하기의 충돌을 강조한다. 말은 많지만, 듣는 귀는 없는 시대에서 피해자의 발언은 단순한 증언이나 고발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개인적이고 연약한 요청이며, 우리의 공감과 행동을 요구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말하기가 단순히 법적 절차를 위한 증거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연대의 출발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3. 보수적 법제도의 한계와 피해자의 이중적 고통
우리나라의 법 제도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고통은 증거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리적 증거 없이 고통을 입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은 법적 절차에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책은 디지털 성범죄인 딥페이크 사건, 데이트 폭력, 스토킹 등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다루며 법과 제도의 문제를 지적한다.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는 자신의 영상이 유포되는 과정과 그것이 사회적 차별로 연결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한다.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에서도 가까운 관계에서 발생한 피해는 가족적 혹은 개인적 문제로 치부되며 제대로 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저자는 특히 판사들이 자의적 작량감경을 통해 가해자에게 유리한 형량을 부여하고, 피해자에게는 거의 아무런 실질적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가해자가 구속 수감되지 않고 집행유예로 풀려났을 때, 피해자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법적 처벌을 기다린 피해자는 수치심과 불안에 휩싸인 채 자신의 삶과 안전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
법의 미흡함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의학적 영역이나 심리 상담으로 밀어내고, 본질적으로 법이 보호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게 만든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피해의 증폭과 피해자 고립을 낳으며, 법적 정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고착화한다.
4. 해외 입법례와 우리가 꿈꾸는 정의
서혜진 변호사는 법적 제도와 한계를 논하는 과정에서 해외 입법례에 주목한다. 특히 가해자가 자살했을 때 사건이 종료되지 않고 심리가 계속되는 입법례는 피해자 보호와 사회적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혁신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법제도는 대개 가해자의 죽음을 사건 종료의 이유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비난을 받으며, 분명히 정당한 권리 행사를 했음에도 이중적인 사회적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과 사회 정의 구현이 가해자의 생존 여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례의 도입은 우리나라가 법적 책임과 정의의 원칙을 재정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가해자가 죽음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법적 틀은 피해자의 심리적 치유를 돕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책임 윤리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살아서 반성과 책임을 다하는 가해자들을 늘리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5. 책임 윤리와 연대가 필요한 이유
책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책임 윤리'를 강조한다. 법정에서 감정의 격렬함이 배제되고, 피해자의 고통이 공적 논의의 장에서 왜곡되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분노나 임시적인 정의 구현이 아니다. 대신 피해자 곁에 조용히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끝까지 듣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연대가 필요하다.
저자는 피해자를 구조해내는 드라마틱한 법정 싸움이 아니라, 무력하고 외로운 피해자 곁에 서서 책임 있는 윤리를 다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법적 정의를 확장하려면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폭력을 끝내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치유와 안전을 제공하는 구조적 대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6. 나가며: 함께 서는 책임의 시작
서혜진 변호사의 『법정 밖의 이름들』은 피해자의 말을 드러내고, 법과 제도에 이를 정당하게 반영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고통에 책임과 연대로 답하는 것이야말로 사회 정의의 시작이다.
이 책은 단순한 고발에 머물지 않는다. 피해자와 사회의 관계, 법의 책임과 공동체 윤리를 고민하며, 법정 밖에서도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근본적인 태도를 일깨운다. 피해자와 함께 서고, 법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책임 윤리가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아 있음을 책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