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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지구라는 놀라운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아이작 유엔 지음, 성소희 옮김 / 알레 / 2025년 5월
평점 :
자연 서사 작가인 아이작 유엔의 <지구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생물학과 생태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문학적인 언어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명한 독특한 자연 에세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포유류, 양서류, 곤충과 식물, 고대 생물과 화석 등 다양한 생명체의 생존 전략을 마치 그들을 인간처럼 생각의 주체로 삼는 의인법을 사용하여 기술하여 굉장히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최선보다는 차선을 택하거나, 주목받지 않는 방식으로 번성하는 생존전략 같은 건 무조건 눈에 띄기를 바라는 현대의 삶을 반추하게 만들었다. 최고가 되어 주목 받으면 생존에 불리해지는 생명들처럼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면 적도 늘어나는 건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라 흥미로웠다.
의인법을 통해 나무늘보, 삼엽충, 지의류, 카피바라나 거북 같은 포유류를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인류를 바라보는 서술 방식은, 과학계에 요즘 트렌드를 보여주는 느낌이라 세련된 인상이었다. 지구의 중심이 인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최근 과학계에는 각각의 개체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공존하는 생물권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이 책의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서술은 가독성을 높이고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최근 과학계의 트렌드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시각을 상상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행성이 인류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매우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서양식 사고가 팽배해지면서, 우리 내면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선조들의 지혜를 상당 부분 상실했다. 인공적으로 정원을 만들지 않고, 땅과 엇비슷한 높이에 정자를 지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모두의 정원으로 삼았던 동양의 지혜가, 나는 지금과 같이 더 높이, 더 많은 사람들을 살 수 있게 만드는 국토 곳곳이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현대에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넓지도 않은 땅 곳곳을 파헤쳐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동물들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건 이 책이 보여주는 것 같은 느리고 꾸준히 이어지는 생명체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이 아닐까. 편의성의 이름으로, 효율성과 가성비의 논리로 점철된 우리 삶에 자연이란 그저 이용과 착취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깎아내린 헐벗은 산과 비탈은 폭우시 산사태의 원인이 된다. 빠르게, 더 많이 지어 올린 빼곡한 아파트들은 닭장이란 비난을 받으며 대량 미분양 사태에 직면해 있지 않은가. 매년 태풍과 지진 같은 대형 재해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혹독한 방식으로 자연을 학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도로 곳곳에 로드킬을 당한 고라니, 길고양이, 새들의 사체를 볼 때마다, 그리고 한순간의 무분별로 수백년 간 빼곡하게 숲을 가득 채웠던 산이 전소되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참담한 기분을 억누르기 어려운 내게, 이 책은 반가운 산소통 같았다.
이름조차 몰랐던, 우리 곁에 늘 존재했지만, 우리가 제대로 바라봐 주지 않았던 자연에 대한 경외와 감탄을 획득하는 기회는 실로 소중하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처럼, 지구는 인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하나 하나에게 각자의 삶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주변의 자연물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존재한다. 생물권에 대한 총체적 관심의 확장은 더 나아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공동체적 윤리 의식의 함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불어 지의류의 느린 삶이나, 지구의 역사와 함께 해온 존재들에 대한 찬탄은, 채 백년 남짓의 길지도 않는 삶 내내 아등바등 좀 더 많이 움켜쥐고자 몸부림치는 인간의 탐욕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할 것이다.
정신없이 바뀌고 발전하는 빠른 삶에서 가끔은 벗어나, 발 밑에 핀 손톱만한 파란 꽃잎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기고 싶은 이들에게, 새벽녘 싱그러운 푸른 잎사귀에 맺힌 이슬의 영롱함에 감탄하고 싶은 이들에게 산소통 같이 싱그러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이 책은 이를 읽는 모든 이들에게 한숨 돌릴 여유와 강퍅한 마음에 단비 같은 촉촉함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