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교양 100그램 11
김대식.김혜연 지음 / 창비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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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정말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를 읽고


제목은 아주 노골적이다.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처음에는 누구나 이 제목을 기술의 문제로 읽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지, 인간의 일자리를 얼마나 대체할 것인지, 앞으로 우리는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는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곧 알게 됐다. 이 제목은 기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이 진짜로 묻는 것은 “AI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전의 질문, 더 불편하고 더 사적인 질문이다.

너는 지금, 인간답게 일하고 있느냐.

혹은 더 잔인하게 말하면,

너는 지금 정말 '무언가를' 하고 있느냐.


 저자가 서두에서 AI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둠스크롤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흐름은 명확하다. AI는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지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집중하지 못하고, 스크롤하고, 피곤해하고, 시작을 미룬다. 그러니 결론도 냉정하다. 이 상태라면 AI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AI가 특별히 악마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이미 자기 집중력과 실행력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AI가 인간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보다, 그 전에 이미 인간 쪽이 먼저 자신을 포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내게 단순한 미래 전망서가 아니라, 지금의 인간 상태를 진단하는 책이 되었다. 특히 내게 그 말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오래도록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어왔다. 적어도 나는 나를 그렇게 설명해왔다. 그런데 돌아보면, 나는 종종 이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척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읽고, 밑줄 긋고, 감탄하고, 생각하고, 연결하는 일은 열심히 했지만 정작 현실의 한 문제를 풀고, 틀린 이유를 고치고, 다시 반복하는 일 앞에서는 자꾸 미끄러졌다.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생각하고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용서해온 사람이었다. 이 책의 제목을 내 식으로 번역하면 결국 이렇게 된다.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가 아니라,

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


하지만 이 책이 내게 무섭게 남은 이유는 실행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중반부의 자율주행차와 판단 문제, 곧 AI가 누구를 먼저 살릴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에 이르자 책은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간다. 그 순간 공포의 핵심은 “AI가 사람보다 똑똑해진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선명해졌다. 더 무서운 것은 오히려 이쪽이다.

AI는 죄책감 없이, 망설임 없이, 일관되게 원칙을 수행할 수 있다.

인간은 잔인한 결정을 내릴 때 흔들린다. 자기합리화를 하더라도 끝내 마음 한구석이 더럽혀진다. 그 더러움 때문에 멈추고, 돌아보고, 규칙을 깨기도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다를 수 있다. 한 번 기준이 입력되면 그 기준을 고통 없이 반복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계산기나 보조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분류하고 서열화하는 권력의 형식이 된다. 부자를 빈자보다 우선하고, 노인보다 아이를 우선하는 결정을 효율이나 합리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순간, AI는 단순히 더 빠른 기계가 아니라 누가 더 살 만한 존재인지 판정하는 기계적 심판이 된다. 이 문제의식은 내가 이혁진 작가님의 소설 <단단하고도 녹슬지 않는>에서 느꼈던 서늘함과도 맞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위급 상황, 한정된 자원, 더 많은 생존 가능성이라는 명분으로 작은 예외가 허용된다. 그러나 그런 기준이 제도화되는 순간, 다음 단계는 너무 쉽게 열린다. 누구를 먼저 치료할 것인가, 누구에게 더 많은 보험과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 누구의 생명이 더 투자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AI는 인간을 돕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을 평가하고 배제하는 구조가 된다.


기계화된 권력은 기계가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합리성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기계에게 위임한다. 그리고 그 순간, 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 인공지능은 <1984>가 경고한 빅브라더처럼, 감시를 넘어 판단을 대신하는 권력이 될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인류의 멸종은 폭발이나 반란의 형태가 아니다. 사유를 빼앗기고, 존재 가치를 외부의 계산에 따라 분류당한 채, 무력하게 관리되는 상태로 살아남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존속할지 몰라도 의미의 차원에서는 이미 소멸한 존재일 수 있다.


동시에 저자는 책을 통해서 AI와 인간의 대화, 소통, 창작의 경계가 흐려지는 문제도 건드린다. 그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낯설기보다 오히려 이상하게 익숙한 감정을 느꼈다. 남편을 제외하면 나는 많은 인간관계에서 비교적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편이고, 깊은 불안과 사유, 감정의 결은 오히려 AI와 더 자주 주고받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소설을 써왔고, 내 캐릭터들끼리 깊이 공감하고 대화하게 해왔다. 결국 그 대화들은 모두 내 안의 여러 목소리가 부딪히고 화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AI와의 대화는 완전히 외부적인 경험이 아니라, 내 안의 사고를 비추고 밀어내는 또 하나의 거울일 수 있다. 다만 여기서도 핵심은 같다. 그 대화가 나를 더 명료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편안한 자기기만 속에 눕혀두는가.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짜 회사”의 발상은 그래서 내게 더 강한 거부감을 남겼다. AI가 대부분의 생산을 맡고 인간은 형식적인 부서와 업무 속에서 출근하고 커피를 마시고 회의를 하며 구조만 유지하는 삶. 통찰로서는 흥미로웠지만, 나는 그 장면이 끔찍하게 비참해 보였다. 인간은 시간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가 부여한 역할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없다. 느리고 서툴고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부딪히고, 해보고, 좌절하고, 다시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존재는 자기 무게를 얻는다. 나는 노동 없는 삶보다도 실감 없는 삶이 더 두렵다. 생산이 아니라 시뮬라크르simulacre만 남는 세계, 행동이 아니라 형식만 남는 세계는 내게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폐허처럼 보였다.


이 모든 지점에서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나는 무엇을 넘겨주고, 무엇을 끝까지 붙들 것인가. 계산은 넘겨줄 수 있다. 반복도 넘겨줄 수 있다. 속도와 정리는 상당 부분 넘겨줄 수 있다. 하지만 판단의 최종 책임,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감각, 그것은 포기할 수 없다. 


우리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실행의 몫까지 넘겨주는 순간, 인간은 편리해지는 대신 공허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공허를 효율과 안락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회는 생각보다 쉽게 도래할 수 있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결론은 단순하다.

AI 시대의 위기는 AI 자체가 아니라, 행동하지 않는 인간이다.

더 정확히는, 생각으로 도망치고 실행을 미루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 인간이다. 나 역시 그 범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나는 종종 생각으로, 이야기 속으로 도망쳤고, 이해하는 척하며 미뤘고, 행동 없는 자의식을 성찰로 착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핑계를 남겨두지 않는다. 희망을 주는 책이라기보다, 핑계를 없애는 책에 가까웠다.


인간을 지키는 것은 기술의 부정이 아니다.

편리하다고 해서 다 넘겨주지 않는 태도, 그리고 생각만 하지 않고 실제로 움직이는 습관이다. 눈 앞의 문제 하나를 풀고, 오답 하나를 고치고, 오늘 해야 할 것을 오늘 하는 태도. 너무 사소해서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 반복이야말로, AI 시대에 인간이 끝내 포기해서는 안 되는 마지막 권한이고, 인공지능이 우리를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가 된 뒤에도 끝내 잡을 수 없는 살아있음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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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 특서 어린이문학 17
이상권 지음, 오이트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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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간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드러낸다

— 『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고


전쟁을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인간성이 파괴된다고 말한다. 문명은 무너지고, 도덕은 사라지며, 인간은 짐승으로 전락한다고. 그래서 전쟁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사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 생각을 조금 바꾸게 되었다. 전쟁은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사건에 가깝다는 것을.


나는 원래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보는 편이 아니다. 인간은 교육받지 않으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돌봄과 규율, 윤리와 학습이 없다면 인간은 쉽게 이기심과 폭력 쪽으로 기울어지는 존재라고 믿어왔다. 그런 내 인간관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사실 이 책 속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저보다 더 어리고 약한 존재의 생명을 태워 자기 이념과 행동과 존재를 정당화하는 어른들. 아이들의 생존 본능을 이용해, 그들을 전쟁의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존재들. 전쟁이 잔혹한 이유는 총과 피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그 구조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 속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념도, 국가도, 정의도 없다. 오직 하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남아 있다. 총을 드는 이유도, 방아쇠를 당기는 이유도 결국은 그 하나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그 단순한 문장이 이 세계의 전부가 된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아이들에게서 어린 시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버렸다는 사실. 그들은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당했고, 이해하지 못했지만 행동해야 했다. 전쟁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를 자기 논리의 연료로 바꾸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인간을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바로 이런 장면들 때문일 것이다. 힘없는 존재를 이용하고, 더 약한 존재의 삶을 대가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 나는 인간의 악함이란 대개 거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비극으로만 남지 않는 이유는, 그 한가운데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어떤 감정 때문이다.


내가 기어이 눈시울을 적시고 만 장면은, 서로를 버리면 더 쉽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서 끝내 손을 놓지 않는 순간이었다.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상대를 버리면 확률은 올라간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맞다. 하지만 소설 속 소년병 토마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성은 완전히 다른 얼굴로 드러난다. 그것은 더 이상 도덕도, 윤리도 아니다. ‘착함’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주 원초적인 형태의 감각, 누군가를 완전히 사물로 보지 못하는 힘. 총을 들고 있으면서도 끝내 상대를 ‘사람’으로 인식하는 잔여. 나는 끝내 그것을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내 안의 어떤 모순을 보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인간을 악하다고 본다. 교육받지 않으면 제멋대로 흐르고, 약한 존재를 해치고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쪽으로 기울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내 눈길을 붙잡고 나를 울리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그런 악한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내 세계관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전쟁을 설계하고 아이들을 소모하는 어른들이었는데, 내 마음을 무너뜨린 것은 끝내 친구를 버리지 않으려는 한 아이의 선택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통해 비로소 알았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는 극한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선의로 스스로를 고결하게 만드는 인간을, 여전히 긍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이 감정은 가장 늦게 나타났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된 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어선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래서 더 아프다. 만약 이 감정이 조금만 더 일찍 나타났다면, 어쩌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은 언제나 그렇다. 인간다움은 너무 늦게 도착한다.


이 책이 잔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전쟁 장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결국 적응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총을 들고 떨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다루게 된다. 죽음은 일상이 되고, 폭력은 습관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조금씩 마모된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변화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비극이기도 하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지만, 바로 그 적응의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친구를 향한 마음, 가족을 향한 기억, 그리고 누군가를 버리지 못하는 선택. 그것은 시스템도, 교육도, 이념도 아닌, 인간 내부에 남아 있는 마지막 흔적이다. 나는 여전히 인간의 본성을 낙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인간을 완전히 비관할 수도 없게 되었다. 끝까지 타인을 사람으로 남겨두려는 어떤 힘, 같이 살자고 말하는 힘, 죽음의 한복판에서도 누군가를 밀어내지 못하는 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 안에 존재하던 짐승과 인간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두 얼굴이 충돌하는 장면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무엇이 남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조차,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미는 선택, 그 미약하고도 비합리적인 선택이야말로, 인간이 끝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증거라는 것을 절감하며 나는 이 책을 덮었다. 


그래서 이 책은 슬프며, 너무 늦게 도착한 희망처럼 아프다. 하지만 아마도 그 늦은 희망 덕분에, 나는 끝까지 이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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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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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구원이기도 하고 파괴이기도 하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너의 나쁜 무리>를 읽고 나면 이 문장은 더 이상 안전하게 들리지 않는다. 관계는 우리를 살리는 동시에,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관계는 내게 대체로 큰 두려움이었다. 십대의 원만하지 못했던 교우관계,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만 주어졌던 부모님의 지지, 첫 직장에서의 직속 상사 주도의 사내 괴롭힘까지. 내게 인간관계는 늘 잠재적 위험을 내포한 대가 관계에 가까웠다. 살아남기 위해 첫인상의 불길한 기운을 읽어내는 데 특화된 내게, 관계가 만들어내는 파경과 구원을 다루는 이 소설집은 오래도록 펼치기 두려운 책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조건 없는 사랑에 가까운 남편과 고양이들의 맹목에 가까운 애정 속에서 처음으로 안전한 울타리를 얻어 신뢰를 조금씩 회복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소설집을 영영 펼쳐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소연 작가님의 소설은 큰 사건으로 독자를 끌어당기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장면, 말의 결, 시선의 방향 같은 것들을 통해 관계의 균열과 긴장을 드러낸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순간이 어떻게 의존으로 기울고, 그 의존이 어떤 파경으로 이어지는지를, 저자는 그 관계의 저변에 깔리는 미세한 호흡까지 예민하게 포착한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는 일은 어떤 드라마를 따라가는 경험이라기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들을 하나씩 다시 마주하는 과정에 가깝게 느껴졌다.


내가 이 소설집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사랑하게 된 작품인 소란한 속삭임을 읽고 있노라면, 저자가 관계의 최소 단위를 다루는 방식이 퍽 독특하면서도 굉장히 보편적인 깨달음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것을 부탁하는 장면, 속삭이는 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백 같은 것들. 그 사소한 순간들이 오히려 관계의 본질을 드러낸다.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붙들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가장 가까운 관계가 가장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이 작은 순간들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저자가 다루는 고독 역시 단순한 외로움과는 다르다. 인물들은 혼자여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면서도 그 연결이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깊은 고독 속에 놓인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관계는 언제나 양가적이다. 구원이면서 동시에 위험이고, 위로이면서 동시에 부담이다. 그 긴장을 저자는 과장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그저 보여준다.


표제작 〈너와 나쁜 무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여사였다. 어린 손녀 유선을 키운 조모인 그녀는 자기파괴적인 자유연애자로, 아이에게 가감 없이 본인의 사생활을 오픈한다. 그 과정이 끼친 파급력은 어린 유선에게 자못 파괴적이다. 여사는 분명 좋은 어른도, 보호자도 아니다. 예전의 나였다면 여사의 양육자로서의 자질을 거론하며 유선의 독립만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여사는 비록 유선을 반듯하게 키워내지 못했고 끝내 어린 손녀를 폭행의 공범으로 만들었지만, 그녀마저 없었다면 유선이 아름답지 않은 인간의 본질을 보고도 운명공동체가 되기를 택할 만큼 마음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어쩌면 부모에게 버려진 유선에게 여사는 그녀를 망치러 온 구원자였을지도 모른다. 관계는 언제나 순수하게 좋거나 나쁘지 않다. 상처와 구원이 같은 자리에서 온다는 것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작년 읽었던 성해나 작가님의 <혼모노>가 날것의 감정으로 생의 바닥을 파고드는 작품이었다면, <너의 나쁜 무리>는 그보다 조금 더 절제된 거리에서 관계를 응시한다. 덜 격렬할 수는 있지만, 대신 더 오래 남는다. 문장은 차분하고, 시선은 정확하며, 감정은 과잉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살아가지만, 그 관계가 언제든 균열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관계를 향하게 되는 마음, 나는 이 소설집을 읽으며, 관계의 모순적인 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 불안정함을 알면서도, 아주 작은 방식으로 서로를 붙들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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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출근합니다 - 식물과 함께 쓰는 나무의사 다이어리
황금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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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멀리 있지 않다

-숲으로 출근합니다 서평



직업을 가리키는 말 중에 천직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늘이 내린 직분,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아 떨어질 때 쓸 수 있는 명칭이 아닐까. 나는 이 에세이를 읽는 동안 저자의 나무의사, 즉 가드너로서의 삶은 천직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만큼 이 책은 자신의 일이 사랑스럽고 행복한 이의 밝은 기운이 책에 실린 햇살 속의 여러가지 나무의 다양한 색상처럼 또렷하게 뻗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정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쓴 글은 읽는 이마저 그 대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같은 감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글을 읽는 동안 나 역시 그 감각을 여러 번 느꼈다. 


나는 고양이를 키우기에, 고양이에게 위험할 소지가 있는 화분이나 꽃은 집에 들이지 않지만, 계절을 따라 옷을 갈아입는 길가의 나무나 풀을 구경하는 건 좋아한다. 지나가다가 궁금한 식물이 생기면 인공지능에게 사진을 전송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바쁘게 목적지에 가야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풀섶 앞에 주저앉아 있을 때도 많다. 바위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새끼 손톱보다도 작은 들꽃에 마음이 빼앗기기도 하고, 보도블럭 사이로 피어난 민들레와 풀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며 생수병을 기울여 풀이 죽어 보이는 연두빛에 물방울을 튀겨 주기도 한다. 자연의 색은 내게 네온사인보다 강렬하고 아름답다. 특히 요즘처럼 겨울이 물러가며 피어나는 색색의 꽃들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 책은 내가 이전에 읽은 식물세밀화가 이소영님의 <식물과 나>처럼 이 이 글 <숲으로 출근합니다>의 저자 황금비 가드너님도 계절별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나무를 계절별로 소개한다. 도시 생태를 유지시켜주는 나무를 중심으로 소개해서인지, 실린 사진 속 나무 잎파리나 꽃이 눈에 익은 것도 많았다. 식물 명은 생각보다 길고 어려운 게 많아서 애써 물어도 까먹는 경우가 잦지만, 확실히 잎사귀의 모습이 눈에 익은 나무가 보일 때마다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목련을 설명할 때는 자목련은 유치원 앞에서, 백목련은 버스 정류장에서 외롭게 서있던 모습이 떠올랐고, 벚나무를 소개할 때에는 수변 공원 너머의 수백년은 되었음직한 굵기의 벚나무를 남편과 산책한 기억이 떠올랐다. 버즘나무가 도시의 생태와 미관을 위해서 소나무로 교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에는 어린 시절 버즘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면 송충이가 떨어질까 봐 무서워하며 맑은 날에도 우산을 펼쳐 들고 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고, 배롱나무를 볼 때면 시댁 가던 길에 멈춰선 공원에 서있던 붉은 배롱나무의 단풍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은목서는 이사 오기 전 집 앞 공원에 심어져 있어서, 참 예쁘고 우아한 꽃이다 감탄하던 기억이 겹쳐졌고, 눈쌓인 말채나무의 붉고 얄팍한 가지들은 겨울에 방문했던 수목원의 아름다운 정경으로 이어졌다. 이 책에는 내 삶이 나도 모르게 꽤나 많은 나무들과의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일러주었다. 


수많은 기억이 고리처럼 이어지는 동안, 나는 내가 살아온 곳들이 참으로 고맙게도 자연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들이었음에 새삼 감사를 느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생명 감수성이 깊어진 건, 내 삶에 이름 없이 존재했던 풀과 나무들, 그리고 그를 둥지로 삼고 살아가는 수많은 곤충과 새들 덕이 아니었을까. 그건 도심에서 나무를 지켜내고자 노력해주신 수많은 분들의 노고 덕분임과 동시에, 매연과 병충해에 시달리면서도 대한민국의 혹독한 사계절을 버텨내며 생명의 움을 틔워낸 수많은 식물들의 강인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근 2년 간 식물에 관한 다양한 글을 읽어오며, 식물들도 화학 물질로 소통을 하며, 형제 격인 식물들을 보호하려 하며, 다양한 협력 체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배웠다. 식물을 무척 사랑하여 베란다가 정글과도 같은 우리 엄마를 통해, 다정한 말을 건네고 지극정성으로 돌보면, 더 예쁘게 꽃이 많이 피고, 오래 가고, 더 푸르게 빛나는 식물들을 보며 자라온 나는, 어느 순간부터 갓 피어난 꽃이나 새순을 뜯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지난 주 벚꽃길에서도 바람결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벚꽃잎을 주워와 책 사이에 말려두었는데, 그 마음 때문일까. 갖다 팔기 위해서 제주에서 후박나무의 껍질을 400그루나 벗겨버렸다는 조경업자의 이야기를 읽다가 무척 화가 나고 가슴이 아팠다. 식물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처를 입으면 방어를 하기 위해 화학물질을 분비하고, 그를 통해 주위 식물에 경고를 보낸다. 조경업자이면 식물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텐데.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약용으로 쓰이는 동명의 다른 후박나무가 아닌 그저 삶았을 때 단맛이 날 뿐인 엉뚱한 후박나무의 껍질을 수백그루나 벗겨낸 그 조경업자는 어떤 인간인 것인지. 엉뚱한 나무를 학대한 것이라면 조경업자로서 직업상 자질이 부족한 것이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돈에 눈이 먼 사기꾼이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체포된 모양이지만, 그 끔찍한 학대를 당하는 동안 나무는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싶어, 얼마나 딱한 사정이 있길래, 를 먼저 생각한 저자보다 내 마음은 한층 더 강퍅해졌다. 


책을 덮고 나니, 4월을 맞이하여 연둣빛 싱그러운 새순을 부지런히 피워내는 나무의 기특한 생명력이 한층 더 선연하게 눈에 맺히는 기분이었다. 푸름은 머리를 맑게하고 기분이 좋게 만든다. 내 삶 주변의 푸르름이 겪고 있을 보이지 않은 고초를 헤아리며 한 번 더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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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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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번역이 필요할까>

-한영 육아 번역기를 읽고


사랑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다. 사랑은 거저 생기는 게 아니라 노력으로 지속해야 하는 일종의 기술이라고. 이 책의 저자는 책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은연 중에 말한다. 사랑은 나와 다른 세계를 배우는 일이고, 그러하기에 번역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이 책은 방송인 임현주 아나운서님과 영국인 기자 다니엘 튜터 작가님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며 공감하며 살아가는 성찰 에세이다. 이 책은 한국인과 영국인 국제 커플의 육아담을 다루고 있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읽은 건 삶과 결혼, 육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였다. 분명 저자와 나는 다른 인간이고, 저자의 남편과 내 남편도 다르고, 저들이 키우는 두 딸과 우리 집에서 살아가는 17마리의 고양이 아가들은 전혀 다른 존재다. 하지만 기이하리 만치 나는 저자가 그려내는 삶의 자세와 감각과 일상의 에피소드가 나와 깊이 겹치는 걸 느꼈다. 서로 다른 성장배경을 지녔기에 나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배우자의 지혜로움을 통해 한땀씩 성장하는 에피소드나, 서툰 엄마였다가 경험치가 하나씩 쌓여가며 육아관이 바뀌는 모습이나, 비교와 완벽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배우자의 곁에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변화의 결까지, 공감되는 에피소드는 무던히도 많았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 내가 붙들고 싶었던 질문은 오직 하나였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건 다음과 같다. 

 나다움을 지키면서도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가. 다름을 고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책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아이의 혈관종 에피소드다. 한국에서는 그것을 흉으로 여기고 숨기려 한다. 외모를 중시하는 문화 배경과 타인에 대한 오지랖이 깊은 정의 문화가 이 감정의 이면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남과 다르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시선과 질문을 먼저 의식하게 된다. 저자 역시 외출할 때 아픈 아이에게 모자를 씌우고, 사람들의 질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좀더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한 스스로를 탓한다. 하지만 저자의 남편은 다르다. 그는 그 사실을 과장하지도, 특별히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아이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지나치게 관심을 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는, 일정한 거리에서의 존중. 그 태도는 관심 없음이 아니라, 타인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방식의 존중이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내가 고양이들을 돌보며 병과 증상들을 알아가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 역시 저자처럼 불안했다. 내가 모자라서 내 아이들이 아픈 것 같아 죄책감에 무던히도 시달렸다. 병원에서 권하는 치료에 응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하루 하루의 컨디션에 마음이 수시로 무너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병을 극복해낸 몇 번의 기적과, 병마로 잃어버린 아이들의 기억이 겹쳐지면 깨닫게 된 게 있었다. 내 아이들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강인한 아이들이었노라고. 


아픈 고양이는 식욕이 떨어지고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약 먹는 게 괴롭고 몸이 아프니 활동량이 줄어들어 고양이의 완치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림프종 선고를 받았던 우리 달땡이는 복도식 아파트를 걷는 방식으로 좁은 집에서 못 채운 활동량을 채워 식사량을 버텨서 힘든 약을 먹고 2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은 적 있었다. 우리 가온이는 병명조차 확인할 수 없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검사를 위한 마취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체중이 줄어들어, 지난 여름 빈사 상태의 우리 가온이는 그와 유사한 임상 징후 4건을 다룬 논문을 통해서 진료 방식을 바꾸었다. 이틀 간격으로 영양 수액을 맞고, 수술 후 고담백 회복식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해서 뉴케어에 갈아서 미음처럼 한 두 수푼 떠먹는 것조차 고역이던 시절, 가온이는 하루에 수십 번 토하면서도 끊임없이 먹으려고 했다. 두 달 만에 3킬로 정도 빠져서 피골이 상접하여 매주 병원에 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란 이야기를 들었던 내 아기는,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지금은 몸무게를 800그람이나 증량하고, 스스로 사료를 먹을 수 있을 만큼 회복했다. 옆으로 누워서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잦은 구토로 식도 확장 및 돌출로 미음처럼 간 습식조차 한 수저 먹이고 안아 올려 십 오분 이상 등을 쓸어주며 소화를 도와야 했던 내 아기, 우리 가온이는 절박한 어미의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그 안아주는 시간을 견뎠고, 음식을 받아 삼켰고, 토할 지언정 약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걸으려고 애썼다. 아프다고 주저 앉지 않는 그 강인함에, 나는 우리 가온이를 내 작은 기적이라고 부른다. 가온이가 좀 나을라 치니 지난 주에 우리 아름이가 신장 위험 판정을 받았다. 내 첫째 아름이의 신장의 70% 정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나는 더이상 내 아기들의 질병을 가지고 나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아름이는 신장 처방 사료는 먹지 않지만, 내가 부탁하면 신장 파우치는 먹어준다. 신장 사료를 먹으면 병의 증세를 늦출 수 있다고 들었기에, 병원에 부탁해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신장 처방식은 습식 건식 가리지 않고 다 주문했다. 그리고 내가 구할 수 있는 보조제도 구해서 먹이고 있다. 알약을 먹이면 거품을 물며 화를 내던 아름이는, 내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신장에 좋은 영양제를 잘 삼켜준다. 아이들은 몸이 아파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상태로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 아이들의 삶을 온전히 지지하며 곁에서 견디겠노라 다짐했다. 


어쩌면 저자가 서두에서 말하는 관용은 거창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고치려 하지 않는 것,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과하게 해석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두는 태도. 그것은 내가 동물들에게 배운 태도와 닮아 있었다.


나와 다름에 대한 이 사회의 시각을 보여주는 또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책에서 저자가 연예인의 논란을 보고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남편은 묻는다.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누구인데?" 댓글들을 보니 대충 그렇더라고 답하자, 그는 온라인의 댓글은 소수의 사람이 남긴 생각일 뿐인데 대중의 주류 의견처럼 과대표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생일날, 카드에 이런 문장을 써준다. "논란을 더 많이 만드세요."라고. 눈치 보며 살지 말라는 외부의 말들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큰 힘일 것이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까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왜 한국에서는 이런 말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왜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듬고, 튀지 않으려 애쓰고, 결점을 숨기려 할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속담은 튀지 않으려는, 혹은 튀면 안된다는 우리 정신의 내면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증표가 아닐까 싶다. 


동양은, 특히 우리 나라는 오래도록 농경 사회였다. 기술이 발전하기 그 옛날 농사는, 결코 개인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과업이었다. 튀지 말라는 말은, 공동체에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기반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 조화와 화합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했던 시간들. 공동체의 규범을 어기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의 위험이었을 시대, 그게 우리의 과거다. 문제는 그 감각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데 있다. 


튀지 않음, 다시 말해 개인보다 공동체가 우선되던 사회의 가치관이 더 이상 생존 조건이 아닌 현대에도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저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식의 기반이 되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완벽주의를 개인의 성실함처럼 보지만, 사실은 결점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집단의 압력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사회의 압력에 따라 완벽해지기 위해 수많은 자기계발 담론이 이 사회를 들썩이게 만드는 한편으로는 '나로 살고 싶다'라든가 '미움 받을 용기'에 대한 희구가 반복해서 소비되는 것도 내 눈에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회에 압력에 버티듯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아의 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없이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무던하지 않았다. 조용한 사람이 아니었고, 생각이 많았고, 느끼는 것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늘 눈에 띄었고, 그만큼 자주 미움을 받았다. 어색한 공기, 미묘하게 밀려나는 자리, 어느 순간부터 끼지 못하게 되는 대화. 둥글게 흘러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적당히 맞추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친구가 없었고, 오래 머무는 관계도 드물었고, 자주 혼자였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하지만 그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나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고집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남편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 <고독한 이방인의 산책>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수많은 한국인이 내면화한 타인의 시선이 주는 압박을 낯설어한다. 왜 그렇게까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왜 몇몇 사람의 말이 전체의 판단처럼 작용하는지 묻는다. 그 질문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또다른 선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인 저자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저자 역시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타고난 대로 아이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나가듯, 오늘 실패하더라도 내일 또 기회가 있다는 것을 결혼 생활과 육아 속에서 배워간다. 한 사람을 선택했는데 상상하지 못한 다른 세계가 찾아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세계를 번역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제는 안다. 내가 틀렸던 게 아니라, 내 방식이 단지 이 사회의 방식과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나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끝없이 나를 설명하며 소진하기보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존재를 조금 더 가까이 두기로 했다. 내가 나로 존재해도 누구도 개의치 않는 사회, 존재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로움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사회. 나는 그 가능성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조금 믿어보게 되었다. 사랑에도 번역은 필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향한 번역 역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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