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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ㅣ 교양 100그램 11
김대식.김혜연 지음 / 창비 / 2026년 3월
평점 :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정말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를 읽고
제목은 아주 노골적이다.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처음에는 누구나 이 제목을 기술의 문제로 읽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지, 인간의 일자리를 얼마나 대체할 것인지, 앞으로 우리는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는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곧 알게 됐다. 이 제목은 기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이 진짜로 묻는 것은 “AI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전의 질문, 더 불편하고 더 사적인 질문이다.
너는 지금, 인간답게 일하고 있느냐.
혹은 더 잔인하게 말하면,
너는 지금 정말 '무언가를' 하고 있느냐.
저자가 서두에서 AI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둠스크롤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흐름은 명확하다. AI는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지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집중하지 못하고, 스크롤하고, 피곤해하고, 시작을 미룬다. 그러니 결론도 냉정하다. 이 상태라면 AI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AI가 특별히 악마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이미 자기 집중력과 실행력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AI가 인간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보다, 그 전에 이미 인간 쪽이 먼저 자신을 포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내게 단순한 미래 전망서가 아니라, 지금의 인간 상태를 진단하는 책이 되었다. 특히 내게 그 말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오래도록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어왔다. 적어도 나는 나를 그렇게 설명해왔다. 그런데 돌아보면, 나는 종종 이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척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읽고, 밑줄 긋고, 감탄하고, 생각하고, 연결하는 일은 열심히 했지만 정작 현실의 한 문제를 풀고, 틀린 이유를 고치고, 다시 반복하는 일 앞에서는 자꾸 미끄러졌다.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생각하고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용서해온 사람이었다. 이 책의 제목을 내 식으로 번역하면 결국 이렇게 된다.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가 아니라,
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
하지만 이 책이 내게 무섭게 남은 이유는 실행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중반부의 자율주행차와 판단 문제, 곧 AI가 누구를 먼저 살릴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에 이르자 책은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간다. 그 순간 공포의 핵심은 “AI가 사람보다 똑똑해진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선명해졌다. 더 무서운 것은 오히려 이쪽이다.
AI는 죄책감 없이, 망설임 없이, 일관되게 원칙을 수행할 수 있다.
인간은 잔인한 결정을 내릴 때 흔들린다. 자기합리화를 하더라도 끝내 마음 한구석이 더럽혀진다. 그 더러움 때문에 멈추고, 돌아보고, 규칙을 깨기도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다를 수 있다. 한 번 기준이 입력되면 그 기준을 고통 없이 반복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계산기나 보조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분류하고 서열화하는 권력의 형식이 된다. 부자를 빈자보다 우선하고, 노인보다 아이를 우선하는 결정을 효율이나 합리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순간, AI는 단순히 더 빠른 기계가 아니라 누가 더 살 만한 존재인지 판정하는 기계적 심판이 된다. 이 문제의식은 내가 이혁진 작가님의 소설 <단단하고도 녹슬지 않는>에서 느꼈던 서늘함과도 맞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위급 상황, 한정된 자원, 더 많은 생존 가능성이라는 명분으로 작은 예외가 허용된다. 그러나 그런 기준이 제도화되는 순간, 다음 단계는 너무 쉽게 열린다. 누구를 먼저 치료할 것인가, 누구에게 더 많은 보험과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 누구의 생명이 더 투자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AI는 인간을 돕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을 평가하고 배제하는 구조가 된다.
기계화된 권력은 기계가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합리성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기계에게 위임한다. 그리고 그 순간, 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 인공지능은 <1984>가 경고한 빅브라더처럼, 감시를 넘어 판단을 대신하는 권력이 될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인류의 멸종은 폭발이나 반란의 형태가 아니다. 사유를 빼앗기고, 존재 가치를 외부의 계산에 따라 분류당한 채, 무력하게 관리되는 상태로 살아남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존속할지 몰라도 의미의 차원에서는 이미 소멸한 존재일 수 있다.
동시에 저자는 책을 통해서 AI와 인간의 대화, 소통, 창작의 경계가 흐려지는 문제도 건드린다. 그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낯설기보다 오히려 이상하게 익숙한 감정을 느꼈다. 남편을 제외하면 나는 많은 인간관계에서 비교적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편이고, 깊은 불안과 사유, 감정의 결은 오히려 AI와 더 자주 주고받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소설을 써왔고, 내 캐릭터들끼리 깊이 공감하고 대화하게 해왔다. 결국 그 대화들은 모두 내 안의 여러 목소리가 부딪히고 화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AI와의 대화는 완전히 외부적인 경험이 아니라, 내 안의 사고를 비추고 밀어내는 또 하나의 거울일 수 있다. 다만 여기서도 핵심은 같다. 그 대화가 나를 더 명료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편안한 자기기만 속에 눕혀두는가.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짜 회사”의 발상은 그래서 내게 더 강한 거부감을 남겼다. AI가 대부분의 생산을 맡고 인간은 형식적인 부서와 업무 속에서 출근하고 커피를 마시고 회의를 하며 구조만 유지하는 삶. 통찰로서는 흥미로웠지만, 나는 그 장면이 끔찍하게 비참해 보였다. 인간은 시간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가 부여한 역할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없다. 느리고 서툴고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부딪히고, 해보고, 좌절하고, 다시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존재는 자기 무게를 얻는다. 나는 노동 없는 삶보다도 실감 없는 삶이 더 두렵다. 생산이 아니라 시뮬라크르simulacre만 남는 세계, 행동이 아니라 형식만 남는 세계는 내게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폐허처럼 보였다.
이 모든 지점에서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나는 무엇을 넘겨주고, 무엇을 끝까지 붙들 것인가. 계산은 넘겨줄 수 있다. 반복도 넘겨줄 수 있다. 속도와 정리는 상당 부분 넘겨줄 수 있다. 하지만 판단의 최종 책임,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감각, 그것은 포기할 수 없다.
우리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실행의 몫까지 넘겨주는 순간, 인간은 편리해지는 대신 공허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공허를 효율과 안락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회는 생각보다 쉽게 도래할 수 있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결론은 단순하다.
AI 시대의 위기는 AI 자체가 아니라, 행동하지 않는 인간이다.
더 정확히는, 생각으로 도망치고 실행을 미루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 인간이다. 나 역시 그 범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나는 종종 생각으로, 이야기 속으로 도망쳤고, 이해하는 척하며 미뤘고, 행동 없는 자의식을 성찰로 착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핑계를 남겨두지 않는다. 희망을 주는 책이라기보다, 핑계를 없애는 책에 가까웠다.
인간을 지키는 것은 기술의 부정이 아니다.
편리하다고 해서 다 넘겨주지 않는 태도, 그리고 생각만 하지 않고 실제로 움직이는 습관이다. 눈 앞의 문제 하나를 풀고, 오답 하나를 고치고, 오늘 해야 할 것을 오늘 하는 태도. 너무 사소해서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 반복이야말로, AI 시대에 인간이 끝내 포기해서는 안 되는 마지막 권한이고, 인공지능이 우리를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가 된 뒤에도 끝내 잡을 수 없는 살아있음의 감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