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 특서 어린이문학 17
이상권 지음, 오이트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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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간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드러낸다

— 『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고


전쟁을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인간성이 파괴된다고 말한다. 문명은 무너지고, 도덕은 사라지며, 인간은 짐승으로 전락한다고. 그래서 전쟁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사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 생각을 조금 바꾸게 되었다. 전쟁은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사건에 가깝다는 것을.


나는 원래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보는 편이 아니다. 인간은 교육받지 않으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돌봄과 규율, 윤리와 학습이 없다면 인간은 쉽게 이기심과 폭력 쪽으로 기울어지는 존재라고 믿어왔다. 그런 내 인간관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사실 이 책 속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저보다 더 어리고 약한 존재의 생명을 태워 자기 이념과 행동과 존재를 정당화하는 어른들. 아이들의 생존 본능을 이용해, 그들을 전쟁의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존재들. 전쟁이 잔혹한 이유는 총과 피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그 구조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 속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념도, 국가도, 정의도 없다. 오직 하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남아 있다. 총을 드는 이유도, 방아쇠를 당기는 이유도 결국은 그 하나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그 단순한 문장이 이 세계의 전부가 된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아이들에게서 어린 시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버렸다는 사실. 그들은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당했고, 이해하지 못했지만 행동해야 했다. 전쟁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를 자기 논리의 연료로 바꾸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인간을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바로 이런 장면들 때문일 것이다. 힘없는 존재를 이용하고, 더 약한 존재의 삶을 대가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 나는 인간의 악함이란 대개 거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비극으로만 남지 않는 이유는, 그 한가운데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어떤 감정 때문이다.


내가 기어이 눈시울을 적시고 만 장면은, 서로를 버리면 더 쉽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서 끝내 손을 놓지 않는 순간이었다.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상대를 버리면 확률은 올라간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맞다. 하지만 소설 속 소년병 토마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성은 완전히 다른 얼굴로 드러난다. 그것은 더 이상 도덕도, 윤리도 아니다. ‘착함’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주 원초적인 형태의 감각, 누군가를 완전히 사물로 보지 못하는 힘. 총을 들고 있으면서도 끝내 상대를 ‘사람’으로 인식하는 잔여. 나는 끝내 그것을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내 안의 어떤 모순을 보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인간을 악하다고 본다. 교육받지 않으면 제멋대로 흐르고, 약한 존재를 해치고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쪽으로 기울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내 눈길을 붙잡고 나를 울리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그런 악한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내 세계관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전쟁을 설계하고 아이들을 소모하는 어른들이었는데, 내 마음을 무너뜨린 것은 끝내 친구를 버리지 않으려는 한 아이의 선택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통해 비로소 알았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는 극한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선의로 스스로를 고결하게 만드는 인간을, 여전히 긍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이 감정은 가장 늦게 나타났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된 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어선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래서 더 아프다. 만약 이 감정이 조금만 더 일찍 나타났다면, 어쩌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은 언제나 그렇다. 인간다움은 너무 늦게 도착한다.


이 책이 잔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전쟁 장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결국 적응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총을 들고 떨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다루게 된다. 죽음은 일상이 되고, 폭력은 습관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조금씩 마모된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변화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비극이기도 하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지만, 바로 그 적응의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친구를 향한 마음, 가족을 향한 기억, 그리고 누군가를 버리지 못하는 선택. 그것은 시스템도, 교육도, 이념도 아닌, 인간 내부에 남아 있는 마지막 흔적이다. 나는 여전히 인간의 본성을 낙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인간을 완전히 비관할 수도 없게 되었다. 끝까지 타인을 사람으로 남겨두려는 어떤 힘, 같이 살자고 말하는 힘, 죽음의 한복판에서도 누군가를 밀어내지 못하는 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 안에 존재하던 짐승과 인간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두 얼굴이 충돌하는 장면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무엇이 남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조차,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미는 선택, 그 미약하고도 비합리적인 선택이야말로, 인간이 끝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증거라는 것을 절감하며 나는 이 책을 덮었다. 


그래서 이 책은 슬프며, 너무 늦게 도착한 희망처럼 아프다. 하지만 아마도 그 늦은 희망 덕분에, 나는 끝까지 이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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