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랩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출판사 / 2017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교보문고 신간매대를 둘러보던중 방송은 한 번도 못봤지만 TvN의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방송된 책들중 12권의 책을 선정한 [북킷리스트]가 눈에 띄여서 장바구니에 담궜다. 총 12권의 책중 9권은 읽었고 3권은 못 읽었기에 나머지 세 권을 전부 읽고 [북킷리스트]도 클리어하고 여세를 몰아 방송까지 보려고 한다.

세 권중 [거의 모든것의 역사]는 완독했고, 이어서 다음책은 [랩걸]로 정했다. 매달 책을 골라주는 교보샘에서 혹시나 싶어 찾아보니 전자책으로 서비스중이길래 바로 선택해서 이북으로 읽어줬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과학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인데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편견인가?) 상당히 유려한 문체와 아울러 문학적인 필체에 빠져들어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인 호프 자런은 1969년 미네소타 오스틴에서 과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역시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과학자를 꿈꾸며 많은 시행착오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온 몸으로 겪으며 형제와도 같은 동료인 빌과의 우정으로 이겨나가는 그녀의 인생을 고스란히 녹여낸 역작이다. 2016년 [타임]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린 그녀는 현재 오슬로 대학교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동료인 빌과 20년에 걸친 연구활동을 기반으로 씌여졌다. 그 기간 동안 호프와 빌은 학위를 세 개 땄고, 직장을 여섯 번 옮겼으며, 4개국에서살았고, 16개국을 여행하고, 병원에 입원하기를 다섯 번, 중고차 여덟 대를갈아치우고, 적어도 4만 킬로미터를 운전했고, 개 한 마리가 영면하는 것을지켜봤고, 약 6만 5000개에 달하는 탄소 안정적 동위원소를 측정했다고 후기에 밝힌다.

호프 자런이 식물을 관찰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축을 이루지만 이 책은 그녀의 문학적인 소양으로 인해 과학서적처럼 읽히지 않는다. 책 속의 글을 통해 내용을 잠깐만 살펴보자면,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 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 p.49

인간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 이 작은 씨앗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버틴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작은 식물의 열망이 어느 실험실 안에서 활짝 피었다. 그 연꽃은 지금 어디 있을까.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 p.52

나는 여자 교수들과 과에서 일하는 여성 비서들은 학계의 천적과 같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내가 거들을 착용하지 않는 것이 정말 큰일 날 일이지만 적어도 또다른 여자 교수 한 명보다는 나은 신세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녀는 그렇게 24시간 일만 해서는 출산 후에 빼야 할 살을 절대 못 뺄 절박한 운명에 처해 있었다. --- p.185

모두의 얼굴에는 이제 내게 익숙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저 여자가? 그럴 리가. 뭔가 실수가 있었겠지.” 전 세계 공공기관 및 사립 기구들에서는 과학계 내 성차별의 역학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이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지었다. 내 제한된 경험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바로 성차별이다. --- p.262

씨방 하나를 수정시켜 씨로 자라는 데 필요한 것은 꽃가루 단 한 톨이다. 씨 하나가 나무 한 그루로 자랄 수 있다. 나무 하나는 매년 수십만 송이의 꽃을 피운다. 꽃 한 송이는 수십만 개의 꽃가루를 만들어낸다. 성공적인 식물의 생식은 드문 일이긴 하지만, 한번 일어나면 초신성에 버금가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 p.290

과학은 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또 하루가 밝고, 이번 주가 다음 주가 되고, 이번 달이 다음 달이 되는 동안 내내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숲과 푸르른 세상 위에 빛나는 어제와 같은 밝은 태양의 따사로움을 느끼지만 마음속 깊이에서는 내가 식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오히려 개미에 가깝다. 단 한 개의 죽은 침엽수 이파리를 하나하나 찾아서 등에 지고 숲을 건너 거대한 더미에 보태는 개미 말이다. 그 더미는 너무도 커서 내가 상상력을 아무리 펼쳐도 작은 한구석밖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 --- p.397

우주에서 본 지구는 해마다 조금씩 녹색이 줄어가고 있다. 컨디션이 나쁜 날이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전 지구적인 문제들이 악화되고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 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자손들을 황폐한 폐허에 남겨두고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 지금까지 어느 때보다 더 병들고, 굶주리고, 전쟁에 시달리고, 심지어 녹색이 주는 소박한 위안마저도 박탈당한 채 사는 세상을 남기고 떠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이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 p.400

[랩걸]은 저자인 호프 자런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인정받는 과학자로 성장하기까지 지난했던 과정이 어떻게 보면 유머스럽기도 하고 지적으로 표현해낸 수작이다. 다만, 번역이 살짝 아쉬웠다. 특히 앵무새 죽이기를 다룬 부분에서 스카우트를 정찰대로 표시한건 전체적으로 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읽어볼만한 책이다. 추천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