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 40년 - 4판 범우문고 20
변영로 지음 / 범우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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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첫 독서는 수주 변영로 선생의 음주기인 명정 40년이었다. 양주동 박사의 [문주반생기]와 셋트로 구입했던 책인데 한국을 대표하는 주당이셨던 변영로 시인의 다양한 음주 경험을 즐겁게 글로 만났다.

올해는 술 좀 적당히 마실 계획이다. 감마 지티피 수치가 몇 년간 상당히 높았는데 2020년은 제대로 돌려볼 계획이다. 주변에 굳은 결심을 말했더니 아무도 안 믿던데 달라진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말거라는 굳은 결심을 했다. 변영로 선생도 자신의 음주행각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무려 6년간이나 단주를 하셨는데, 솔직히 절주는 금주보다 훨씬 어렵다. 차라리 끊는게 답이지만 더 어려운일이니만큼 FMD기간에는 금주 그리고 평소는 주중 1회, 주말 1회를 목표로 매진할 생각이다.

책을 읽다보면 5살때 음주를 시작해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시절에도 음주때문에 결석이 잦아다고 하시니 그저 대단할 따름이다. 영문학자이자 시인기도 하셨던 선생의 생애를 잠깐만 살펴보자면,

˝서울 재동·계동 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 마찰이 일어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가 같은 해 평창 이씨(平昌李氏) 이흥순(李興順)과 결혼하였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및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일도 있다. 1920년에 ‘폐허(廢墟)’,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신민공론(新民公論)』 주필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기자, 1934년 『신가정(新家庭)』 주간을 지내다 광복 뒤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으로 부임하였다. 1953년에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이사장에 취임, 1955년에는 제27차 비엔나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 『청춘(靑春)』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 『폐허』 제2호에 평문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신천지(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 「꿈많은 나에게」·「나의 꿈은」 등 5편을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1922년에는 『신생활(新生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창작 활동 초기부터 과작(寡作 : 작품을 적게 제작함.)의 시인이었다.

『신생활』·『동명』·『개벽(開闢)』 등을 통하여 한 해에 5, 6편 정도를 발표하였을 뿐이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이 평문관(平文館)에서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는 「버러지도 싫다하올 이몸이」를 비롯한 28편의 시와 수상 8편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시화집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하여 압수되어 폐기처분된 바 있다.

그의 시작품들은 가락이 부드럽고 말씨가 정서적이어서 한때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1기는 시집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기까지인데, 민족시인으로서의 의식이 표출된 시기이다.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 「논개」를 들 수 있다.

2기는 그 뒤부터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실제(失題)」·「사벽송(四壁頌)」 등을 들 수 있다. 3기는 광복부터 죽기까지의 시기로 「돐은 되었건만」과 같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적 시를 주로 썼다.

시작 활동 이외에도 우리 문단에 영미문학(英美文學)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하였으며, 남궁 벽(南宮璧)의 유고 일문시(日文詩)를 『신생활』에 소개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등 시사(詩史)에 공헌한 바가 크다. 1948년에는 서울시문화상(문학부분)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수필집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1953)·『수주시문선(樹州詩文選)』(1959)·영문시집 『진달래동산(Grove of Azalea)』(1948) 및 1981년 유족들이 간행한 『수주변영로문선집(樹州卞榮魯文選集)』 등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폐허의 동인지 활동을 하면서 문인들과 다양한 교류를 나눴는데 또 한 명의 주당인 공초 오상순, 염상섭등 그가 생애 같이 술잔을 나눴던 술동지들과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었다.

한 번은 낮술을 밤 늦게까지 마시니 주인이 견디다 못해 차를 태워서 집으로 보냈는데 열이 받아 달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린 일화가 소개된다. 그냥 뛰어내린게 전부가 아니고 다음날 일어나보니 발목이 부러져 있어서 지팡이를 잡고 다시 마시러 가셨다는 말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정한 주신이 아닌가 싶다.

평소 두주불사에 한 번도 약을 먹지 않았을만큼 건강했던 수주도 60을 조금 넘겨서 돌아가셨으니 술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 진실인것 같다. 아무튼 2020년은 정신 좀 차리고 감마지피티 정상화에 총력을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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