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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하게 사는 법
고미 타로 지음, 강방화 옮김 / 한림출판사 / 2009년 3월
평점 :
역사, 지리, 문화적으로 우리나라와 가까워서 그런지 일본의 아동 그림책을 보면 정서적으로 쉽게 공감되는 등 참 좋은 책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무섭다. 어린 아이들은 선입견이나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흡수한다. 그래서 더욱 숨겨진 의도가 무섭고, 우리 어른들은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아이가 어렸을 때 난 고미 타로의 책을 참 좋아했다. 왜냐면 쓱쓱 가볍게 그린 만화체 그림에 익살과 재치와 톡톡 튀는 참신성까지. 초등생이 되어서 다시 봐도 참 재미있고, 어른의 눈으로 보면 그 깊이가 철학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늘 재미있게 읽어오던 이 책을 무심히 넘겨보던 중에 정말이지 깜짝 놀라 잠시 얼어붙었던 거 같다. 그림 속의 한 남자 아이가 낑낑거리며 아주아주 큰 연을 날리고 있는데, 그 연에는 욱일기가 떡하니 그려져 있었다. 와, 이런.. 이 출판사 이거 뭐지? 욱일기가 그려진 그림책을 우리 아이들 보라고 판권을 사오고 번역해서 저 따위로 출간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페이지만(6컷) 그냥 빼면 될 것을. 그리고 큰 연 속에 굳이 욱일기를 그려 넣은 작가만의 문학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각주로라도 따로 설명을 달아 놓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닌지. 그만큼 사회역사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므로. 하지만 맨 뒷장 작가소개란에 첨부된 한 줄에서 나는 혹시나 하는 순진한 마음을 접었다. ‘본문의 연 그림은 풍어를 기원하는 만선기의 모양을 담아 그렸습니다.’ 라는 문장은 ‘욱일기가 좋아서 그냥 그렸습니다.’ 라고 읽힌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엄청 큰 연에 그려진 그림이 되게 멋진 해님이라고 생각하고서 미술시간에 여름 바다를 그린다며 저 욱일기를 떠올리며 빨간 햇살이 힘차게 쭉쭉 뻗어나가는 태양을 그릴지도 모른다. 욱일기 문양의 옷을 입고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 무대에 오르고 sns에 텅 빈 머리를 셀프 인증하는 그 아이돌들처럼. 저들은 그걸 바라는 거겠지. 그런데 더 어이가 없는 건, 편집자와 옮긴이(재일교포 3세란다. 그럼 그냥 일본인인거다.)가 저걸 어떻게 아무런 여과 없이 우리나라에서 그냥 그대로 출판을 하냐는 거다. 고미타로가 그림은 절대 수정할 수 없다고 했을까. 그렇다면 결국 고미 타로는 극우파라는 거지.
자.. 본격적으로 나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 책을 책장에서 뺄 것인가 말 것인가. 당연히 빼야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욱일기가 그려진 그림책을 어떻게 꽂아놔? 근데 솔직히.. 봐도봐도 재미있고 까무러치게 창의적인 책이잖아. 이런 책 어디서 본적 있어? 없지. 너도 자꾸자꾸 들춰보게 되잖아. 그럼 어떡할 거야? …… 한창 고민하던 며칠 동안에는 일단 책장에서 빼놓았다. 그리고 현재 이 책은 책장에 다시 꽂혀 있다. 단, 욱일기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에 이런 메모장을 붙여놓았다.
“ ← 이 연에 그려진 태양은 일본의 ‘욱일기’ 무늬란다. ‘욱일기’가 뭐냐하면, 지금의 일본의 국기 처럼 일본을 상징하는 깃발인데, 옛날에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며 전쟁을 벌이며 잔인한 범죄를 많이 저지르던 때에 사용했던 깃발이란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잔인한 욕심 때문에 고통 받으며 처참하게 죽었고, 지금까지도 그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단다. 그런데도 일본은 옛날에 자신이 저질렀던 나쁜 짓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거나 반성을 하지 않는구나.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채 여전히 오직 일본만이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 깃발의 무늬를 아직도 사용한단다. 슬프게도 이 그림책을 만든 일본인 작가 아저씨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 중 한 명 인 것 같아. 바보 같은 아저씨가 쓴 ‘똑똑하게 사는 법’이라니.. 넌 어떻게 생각하니? ”
욱일기가 그려져 있다고 곧바로 없애버리기 보다는, 아이들에게 그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를 먼저 바르게 알려주고, 욱일기 문양이 왜 그저 간지나는 디자인으로서 받아들여져서는 안되는 것인지 아이들이 직접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똑똑하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