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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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여느 날처럼 힐링샤워를 하고 있었다. 따뜻한 물줄기에 피로를 씻어 내던 중, 느닷없이 20여년 전 작은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그 당시, 고3 최고 막바지. 경황도 없던 어린 나이라 그 사건을 파헤치지 못하고 그냥 묻어 버린 채 십 수년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샤워 하던 중 녹슨 자물쇠 하나가 철커덕 풀려버린 일이라니.. 매듭 하나가 풀리자 신기하게도 기억은 또 사라졌던 기억을 불러내고 그 기억은 또 다른 기억들을 계속 불러 냈다. 갑자기 수면위로 둥둥 떠오른 그 기억의 파편들이 퍼즐처럼 맞아가더니 어느 한 친구로 귀결되었다. 그래. 그 친구였구나. 한때 베프였던.

 

그런데.

이 기억이 사실일까. 기억의 빈 구멍들이 어느 순간 이렇게 메꿔지는 게 있을 법한 일인가. 묻혀버렸던-묻어버렸던- 기억을 무의식중에 내가 찾고 싶었던 건가. 잃어버렸던 기억을 찾음으로서 얻게 되는 게 무엇인가. 그게 나를 찾는 것인가. 기 롤랑이 자신을 프레디라고 생각하고 기억을 찾아다녔지만 실제로는 아니었고, 페드로라 생각하고 과거를 찾아다니는 동안은 그 역시 페드로의 인생 속의 무엇인 것 같았지만, 그때의 그 페드로 맥케부아는 아니다. “이 사진 속에 보이는 남자는 나와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p. ) 그가 찾던 그가 그가 맞을까. 내가 찾은 기억이 내가 맞을까.

 

한여름 스쳐지나가던 그 해변의 사나이가 느닷없이 매우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뇌의 착각인건가. 샤워 물줄기가 내게 최면매개 효과라도 있는건가. 그러고 보니 내가 샤워할 때 특히 이성적이고 냉철해 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건 또 무슨 밑도끝도 없는.) 그래서,, 뇌의 착각이 아니라 샤워중에 발휘되는 냉철한 이성에 의해 잃어버렸던 기억의 한 조각을 논리적인 추리 끝에 발견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뭐. 그런. 이 때 또다시 떠오르는 음성 지원. “이 사진 속에 보이는 남자는 나와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

 

기억의 합이 자아인가. 그렇다면 그 기억은 어디에서 오는가. 기롤랑은 불행히도 기억의 길이 끊겼으므로 타인으로부터의 기억을 모을 수 밖에. 그렇다면 자신을 아는 타인의 기억들의 합이 자신인가. 타인이 쿠키상자에 소중히 간직해 놓는 기억들은 사람들의 겉모습, 직업이나 지위, 특이한 행동이나 버릇, 크고 작은 사건, 경험들.. 주로 외부적인 요소들이다. 내적으로 그가 어떤 심리상태였고, 어떤 고민을 했으며, 어떤 사고 변화를 겪는 중이었는지는 쿠키 상자에 담을 수도, 담겨 있지도 않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이미 희미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대학 첫 MT때 어디로 가서 무슨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고, 누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진상을 부렸는지는 사진 몇 장만 살펴보면 고스란히 다 기억이 나지만, 그때 그가 어떤 기분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날의 그 파편적인 기억이 그의 자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타인의 내적 감정이나 생각 따위는 기억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다.

 

인간의 기억은 믿을 만한 게 못된다. 뭐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인간의 본질.

역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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