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베는 듯한 강바람에 어둠까지 내려앉아 주변엔 아무 인기척이 없다. 어디선가 토해내듯 터져나오는 쓸쓸한 트럼펫 소리. 차갑고 강렬하다. 내겐 그렇다. 그의 그림이. 그렇게 후벼 판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집 앞 작은도서관에서 빌린 <인간 실격(다자이 오사무, 민음사)>의 표지였다. 표지 그림이 당연히 주인공 요조의 초상화인 줄 알았다. 선한 듯 잘생긴 외모에 불안하고 나약한 눈매. 퇴폐적이고 암울한 분위기에 곧 망가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그냥 언뜻 봐도 딱 요조였다. 거 누가 그렸는지 참 잘그렸네그려 했지 유명 작품일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반납후 표지 그림이 마음에 들어 소장을 해야 할 것 인가를 고민을 하면서, 다음으로 내게 간택된 책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아고다 크리스토프, 까치)>. 이 또한 <인간실격>과 비슷하게도 어둠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주인공 쌍둥이 아이들이 기괴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실제로 내가 읽은 건 3권짜리 구판이라 옛날 아이템플(앗, 옛날사람..) 학습지 커버가 연상되는 표지였지만, 알라딘에 검색해본 합본의 표지그림은 참으로 강렬했다. 헐벗은 남자 두 명이 깡마르고 기괴한 몰골로 서로 겹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인데, 인간 실격의 요조의 자화상의 느낌과 뭔가 겹치는 거다. 그리곤 검색의 결과로 알게 된 에곤 쉴레의 존재. 영화도 있었다. 이름하야 <에곤 쉴레:욕망이 그린 그림>. 배우 사진을 보니 남주가 참으로 아름다운게 도저히 안볼래야 안볼 수가 없는거다. 영화까지 보고나니 갈수록 점점 더 허전해 오는게.. 그의 작품들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열망이 뱃속에서 부글부글거렸다. 아 오스트리아로 가야 하나. 이따금 이렇게 나의 숨겨왔던 예술혼이 뱃속에서 불타오른다. 내가 직접 할 능력이 안되니 오로지 감상뿐. 아 나의 슬픈 똥손.  

 

 

 

 

 

 

 

 

 

 

 

 

 

 

 

그.래.서.

차선책으로 찾은 아트북. 작품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고, 당대의 유명인사들(히틀러, 클림트, 고흐 등)을 언급하며 그들의 삶과 작품을 에곤쉴레와 비교해가며 소개하여 그닥 지루하지도 않다. 처음에는 오히려 집중이 분산되는 느낌에 구성이 마음에 안들었는데, 읽다보니 한권의 책으로 펼치기에 작가의 생이 너무 짧아서 겠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울퉁불퉁 무심히 거칠게 그린 선, 보통 사람이라면 드러내고 싶지 않을 부자연스럽고 기괴한 표정과 자세. 우울하고 어두운 모습의 그림이 많지만 그런 감정조차 아이처럼 거침없이 표현해내는 그가 가슴 떨릴 정도로 부럽고 부럽다.

그의 뒤에 항상 따라다니는 외설성과 미성년유인 혐의 논란들. 육체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누구나 다 가지는 거지만 실레는 그것을 천재적인 재능으로 ‘그렸다’는 것만 다를 뿐. 어떤 이는 글로, 어떤 이는 음악으로, 어떤 이는 유머로, 쉴레는 그림으로. 자신의 재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곧 예술인거고. 미성년유인 혐의는 결국 기각되었으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런 논란은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천재는 역시나 요절인건가. 재능도 인생의 총량의 법칙에 적용되는 걸까. 그럼 난 무병장수 할 운명인게냐.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여 28살의 작품까지 밖에 볼 수 없다. 저 무심하고 강렬한 그림체에 그 만의 세월이 묻어 간다면 어떤 대작들이 탄생했을지 정말 너무너무 안타까울뿐..ㅠㅠ

에곤쉴레 전시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비나이다비나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식쟁이 2019-01-0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모리슨도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28세에 그 빛이 꺼졌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