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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마이클 매커디 판화,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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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현자'와 같은 삶을 산 양치기를 모델로 ,작가가 짧지만 임팩트 강한 또 깊이를 담은 교훈서, 잠언집 같은 책이다. 그러나 책은 전혀 교훈적 티를 내지 않는다. 그건 이 책의 최대의 장점이고 작가의 뛰어난 역량이기도 하다.


이 책은 관념적이지 않다. 구체적 삶의 모습을 담담히 평이하게 그러나 함축적 표현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교설이 없고 겉멋이 느껴지지 않는 건강한 책이다.


또한 이 책은 지극히 정치적인 책이다. 저자는 주인공의 나무 심는 행위를 통해 정치란 무엇인가? 즉 정치란 우리 일상적 삶이란 것을 조용한 웅변으로 은유하고 있다.


주인공의 사심없는 나무 심는 행위는 숲을 이루어 탐욕과 싸움, 경쟁으로 해체된 공동체를 복원시켰다. 바로 그 공동체를 복원시킨 주인공의 '나무 심는 행위'는 우리에게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즉 정치적 행위를 고민하게 하는 은유적 상징행위인 것이다.


주인공의 나무심기가 공동체 복원에 이르게 한 데는 두가지의 행운이 있었다. 한 가지는 숲의 사냥꾼들이 숲을 인공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무시하고 넘어갔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무원들이 간섭하지 않고 숲을 보호해 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건 시스템이고 정치가 개입된다. 한 개인의 고독한 삶도 결국은 사회의 시스템과 관련되는 것이고 전체와 분리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시스템의 건강성에 늘 관심을 보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이 이야기 혹은 소설이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 배경이다.


주인공은 나무를 그냥 심은 게 아니고 토양에 맞는 나무를 선택해 심었다.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일까? 


얼마전 모 유명대학 교수가 세월호 학생들이 생각하는 힘이 부족해 죽었다는 발언을 했다는 믿을 수 없는 뉴스가 있었다. 더 문제는 그 이야기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로 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가 진짜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무를 심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나무를 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정치는 곧 우리의 삶이다. 우리가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할 것이냐는 곧 우리의 삶이 어떤 삶이 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가 또 인문학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인문학이 무엇인가를 이 책은 '자기를 속이지 않았고', 또 '자기가 성취한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던' 한 현자의 삶을 통해 진솔하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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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무늬 - 욕망하는 인문적 통찰의 힘
최진석 지음 / 소나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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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 책 속에는 저자의 생각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류의 책들은 쉽게 저자의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면 대개 이미 나와 있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변형시켜 서술하는 경우가 많아 비슷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경우 저자의 생각은 저자가 예로 든 것을 통해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몇가지 예를 보자. 


우선 애플의 스티브 잡스의 성공사례, 삼성전자 윤종웅 회장의 예를 긍정적 사례로 들고, 운동권 출신 정치인과 과거 경부 고속도로, 인천공항 건설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부정적 예로 들고 있다. 이 것만 떼내 가지고 본다면 저자의 평소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저저는 책에서  이념, 가치관, 신념을 뚫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저자는 어떤 이념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지방 교육청의 구호에 '창조적이고 도덕적인 시민'이라는 것이 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창조'와 '도덕'은 공존할 수 없는 명제이다. 창조적이기 되기 위해서는 도덕이라는 가치관, 신념을 돌파해야 한다. 그 가치관, 신념은 결국 사회의 시스템일 수 밖에 없다. 즉 권력화한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게는 '질문하라'고 하면서도 그 질문하는 것을 막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즉 무엇(what)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how)라는 문제의식에서는 결국 자신이 갖고 있는 정치적 신념(책 속에는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때문에 한게를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질문하라'에서 예를 오바마 대통령 기자회견 때 질문을 하지 않은(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기자들의 예를 든 것이 적절했을까?  차라리 질문을 못하게 하는, 아니면 해봐야 득 될 게 없는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이나 사회 혹은 정치시스템을 짚어 봤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을 보며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를 생각했다. 기시미는 책에서'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다.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바탕한 글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공동체'를 언급하고 있다.


사실 개인은 어떤 경우에도 사회를 벗어나 살기는 힘들다. '사람이 그리는 무늬' 저자는  인문을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인간(人間)이고 인간은 곧 사회다. '독립적 주체가 된 사람'은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 '자기를 사회나 국가에 양보하지 마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종내 사회나 국가를 벗어나 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주체적 삶, 고유명사로 돌아가기, 지식만 쌓고 실천이 없는 삶이 안되기 위해서는, 좋다 나쁘다의 정치적 판단 대신 '질문'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필연코 그것을 방해하는 정치, 사회, 교육적 시스템에 대한 고민과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책에서는 정작 그런 질문은 없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왜 고고학 인류학이 발달했는지 그 이면에 대한 고민이 없기에 스티브 잡스의 성공에만 관심이 있고 그 이면의 인문학적 문제는 그저 간단히 '...지만'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사실은 그  '...지만'이 진짜 인문학이 살펴봐야할 지점이 아닐까?


이 책은 인문학과 자기계발을 결합한 겉보기에 매력적인 책이지만 사실은 저자의 자기 경험이 담긴 책은 아니라고 본다. 자신의 지식을 그럴듯 하게 포장하고 그 안에 교묘하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숨기고 있는 그래서 진정성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책으로 내겐 느껴졌다.    


이런 류의 책은 많다. 그러기에 이 책만이 있다면 모를까 그것이 아니기에 나는 이 책에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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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국정화, 왜 문제인가 - 교과서 국정화의 역사와 현 단계 쟁점 읽기
김한종 지음 / 책과함께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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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역사교육학 부문에서 인정받는 실력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논문이나 저술, 각종 글을 볼 때면 혼란에 빠지곤 한다. 왜냐면 예전의 좋지 못한 기억 때문이다.

 

몇 년 전 모 일간신문에 저자는 칼럼을 쓰고 있었는데, 그 중 조선 영조와 정조에 관한 글이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영조와 정조가 왕호에 조자가 붙은 것은 그들의 문화적 공적 때문이라고 썼다.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은 사실과 다르고 실은 이러하다고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공개적으로 질문할까 했지만 사실이 아님이 명백했음으로 혹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올까 염려해서 개인 이메일로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답변의 요지는 이랬다.  

 

1. '선생님(즉 나이다)의 지적이 맞을 것이다'. '것이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역사교육학 전공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사관계 학자로서는 적절하지 못한 멘트다. 스스로 확인해 보고 답을 했어야 했다.

  

2. 그리고 '그렇지만 (즉 내말이 맞을 것이지만)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었다. 그 자체야 -즉 임금 이름이 조냐 종이냐 하는 문제 - 별 문제가 아닌게 맞다. 그러나 잘못된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신문을 통해 기술한 것은 별 문제가 아닌 게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사실을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다.

 

이상하게 사람들 - 전문학자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 자신의 잘못을 좀히 솔직히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문학자라면 더욱이나 존경받는 학자라면 그래서는 안된다. 더욱이 무엇보다 사실과 역사적 가치를 중시하는 역사관계 학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실망이 더 컸다.

 

그 이후 나는 그의 학자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어지간해서는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생각을 했다. 학자적 명성과 개인적 경험이 상충될 때 어떻게 해야할까?   

 

참 평점을 주기가 애매하다. 책을 보진 않았지만 내용만으로는 별 다섯이 줘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난 책과 저자는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으므로 적어도 나 개인으로는 둘을 결합해서 별 셋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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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고력을 키우는 수업만들기
도리야마 다케오.마쓰모토 미치타카 엮음, 이봉숙 옮김 / 역사넷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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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 위주, 지식 전달 중심의 역사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에게 역사적 사고력을 길러주기 위한 일본 역사교사들의 고민과 실천 사례가 담긴 책. 역사책은 넘치지만 정작 역사의식은 실종된 오늘 한국 사회에서 교사 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역사 공부를 위한 좋은 안내서, 입문서가 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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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해설 징비록 - 한국의 고전에서 동아시아의 고전으로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5
류성룡 지음, 김시덕 옮김 / 아카넷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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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가 충실하고, 일본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하고 있는 연구자 답게 일본측 자료를 비교적 풍부하게 이용하여 징비록의 내용을 보충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장마다 붙어 있는 해설에 역해자의 주관이 많이 개입하여 번역을 읽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선입관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지 않나 염려가 된다.


번역은 일단 번역에 충실하고 독자가 번역을 읽을 때 이해를 돕는 주를 달거나 단순히 자료를 제시하는데 충실하는 게 우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역해본은 역해자의 주관적 견해가 장 마다 해설 속에 들어가 있는데 이런 식의 역해가 과연 바람직 한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역해자의 역사를 보는 시각도 내가 보기엔 문제가 있다. 당시 민중들의 분노나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들 보다는 무책임했던 지배층들, 가해자들의 변호인 역할을 주해자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역해본을 읽으며 줄곧 생각했다.   


예를들면 우복룡이 하양병사들이 자기 앞에서 말을 내리지 않고 가는데 앙심을 품고 보복으로 죽인데 대한 부분에서 역해자는 조선군 내부의 갈등, 인물 간의 대결 구도, 이후 역사에서 고착된 선악구도화의 문제를 언급하며 그 사실 자체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158쪽) 우복룡과 하양군사들은 경쟁관계도 대립관계도 아니다. 다만 강자와 약자의 관계일 뿐이고 우복룡은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이 품은 앙심과 그 보복을 위해 권한을 사용했을 뿐이다. 후에 관군과 의병장과의 관계라면 또 모를까 우복룡과 하양군사의 사례를 조선군 내부의 갈등구조의 예로 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후대의 그에 대한 긍정 부정적 기사를 제공하는 것으로 끝났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또 경복궁을 누가 불질렀나 보다 일본군의 광범위한 방화가 더 중요한 것으로 느껴진다고 했는데(217쪽), 과연 그럴까? 일본군의 방화에 분노하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그러나 전쟁 중 침략자들의 파괴적 행위는 늘 있어온 일이다. 그러나 만약 전쟁 중에 백성이 자국 왕의 궁궐을 방화했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거기서 표출된 당시의 민심에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또 신각의 공을 세우고도 잘못된 보고로 참수된 부분(226쪽)에서도 그 판단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전쟁발발 직후의 정보 유통의 혼란을 내세우며 변호하는 듯한 해설을 하고 있다. 그리고 조정이나 김명원이 처음에 신각이 핑계를 대고 달아난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정작 김명원 자신이 원수로서 일본군이 도성에 들어오자 도망을 쳤으면서도 신각이 이양원을 따라가자 자신의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역해자는 신각의 처형을 전시의 엄격한 군법 적용 차원에서 신각의 적진 후퇴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는데 임란 초기 도망을 친 수령이나 군지휘관이 한둘인가? 그들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되었는가?  


징비록에는 결과적으로 억울한 죽음들이 너무나 쉽게 참수되는 사례가 다수 나온다. 이에 비해 실제로 큰 책임있는 자들이 처형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이게 유성룡의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 아니었을까?  


역해자는 해설에서 당시 지배층들의 무책임이나 뻔번함에 대해서는 그것을 비판하는 별다른 해설을 붙이지 않는 반면 그 행위를 이해할 수도 있지않나 하는혹은 변호하는 혹은  상대주의적 관점을 내세우는 것을 자신의 견해로 다시 볼려고 하는 해설을 붙이고 있다.


문득 그런 모습에서 나는 오늘날 친일파나 반민주행위자들이 가혹하고 철저한 자기반성 보다는 뻔번한 자기변호를 일삼는 모습과 그를 두둔하는 일부 학자들의 모습이 떠올려졌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고 한다. 과거 역사에 대한 해석은 오늘 역사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충실한 번역과 풍부한 보충자료에도 불구하고 이 역해본을 내가 높이 평가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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