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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그마 ㅣ 세계 2차 대전 3부작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에니그마라는 말은 단순히 독일어로 수수께끼라는 의미를 가진 암호기계의 한 종류라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 이 단어가 생성되었던 그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그리 간단하게 받아들여지는 낱말은 아니다. 에니그마는 1920년 중반 시기에 상업적 목적으로 독일에서 처음 제작되었지만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크게 각광을 받지 못하다가, 2차 대전 시기에 독일 나치의 군사용으로 도입되면서 암호체계가 풀리기 전까지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을 궁지에 몰아넣게 되는 비밀통신수단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때 에니그마와 관련한 몇몇의 전쟁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최근 미국에서 개봉되어 관객들에게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국내에도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영화에서도 에니그마의 직접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에니그마에 대한 실체와 당시의 시대적 위기의 상황에 대해 모르고 있는 독자들도 의외로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독일의 나치 군대가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암암리에 웅용해왔던 에니그마의 암호체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참혹한 전쟁의 일면을 비판적 시각에서 사실적으로 그려낸 역사팩션이라고 할 수 있을듯하다. 특히 작품 소개에서 작가 로버트 해리스가 밝혔듯이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통해 전쟁 중에 강제로 징집되어 보안유지를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며 이방인처럼 살아가야만 했던 암호해독가의 쓸쓸한 애환의 삶과, 당시 소련군에 의해 2만 여명의 폴란드인들이 무참히 학살되었던 카틴 숲 사건의 참상의 단면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작품 속 주인공 토마스 제리코는 수학이라는 학문에 남다른 열정과 관심은 물론이고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한편으로 소심하면서도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이제 갓 서른 살의 청년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영국과 독일이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돌입하게 되자, 독일군의 암호를 수집하여 분석하고 그 내용을 알아내는 곳인 블레츨리파크에 소환되어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구도 풀어내지 못해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에니그마를 해독하여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을 역전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클레어라는 여인에게서 뜻하지 않은 이별을 통보받으면서 한동안 그곳에서 벗어나 그리움에 사무친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편 독일군은 자신들의 암호체계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돌연 암호체계를 바꾸게 되는데, 이에 혼란을 느낀 영국군은 제리코를 다시 불러들인다. 그곳에서 그는 상관으로부터 독일 해군이 운용하는 잠수함 유보트가 미국의 대규모 보급품 호송 선단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건네받게 되고 하루빨리 독일군의 암호를 파해하라는 암묵적인 요청을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암호를 풀어 군수물자와 수많은 인명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일을 하는 와중에도, 마음 한쪽에 사랑하는 여인 클레어의 모습을 잊지 못해 결국 그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돌연 행방불명이 되어버리고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집에 몰래 숨겨진 독일군의 암호내용이 발견되면서 그는 그녀가 혹시 독일군의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장르작품을 접해본 독자들을 알겠지만 사실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의 경우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작가가 전쟁의 실전적인 상황을 사실적으로 치밀하게 그려낸다고 하더라도 영상에 비교할 만큼의 직접적인 효과를 거두기에는 아무래도 힘든 까닭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 역시도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그려내고 있지만 실제 다루고 있는 부분은 영화에서처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아비귀환의 긴박한 장면은 거의 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선입관을 갖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막상 독자들이 작품의 내용을 읽어보면 그에 버금가는 긴장감과 스릴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소설은 전쟁이라는 혼란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수학이라는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되어 보통의 일반적인 삶과는 조금 동 떨어지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우연하게 알게 된 여자와 깊은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한 스토리를 이어가다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전쟁이 남긴 참혹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등의, 작품 속 곳곳에 흥미를 느낄만한 다양한 장르적 요소들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탄탄하고 짜임새 있는 스토리의 전개로 인해 독자들이 작품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는 기대이상의 재미를 안겨다주지 않을까 싶다. 다만 줄거리의 흐름이 간혹 끈기는 부분이 없지 않아서 작품 속으로의 지속적 몰입에 방해를 받는 것 같아 조금 아쉽게 여겨진다. 이 소설은 첩보와 로맨스 그리고 역사에 이르는 폭넓은 장르의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데다가, 작품 이면에 전쟁의 상처가 남긴 지나간 우리의 과오를 새삼 돌아볼 수 있어서, 독자들이 한번 주목할 만하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