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에 칼 구스타프 융의 무의식의 분석이란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생소한 전문용어들이 많은데다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인간의 내면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우리의 정신적 문제점에 대한 다양한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던 책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문득 떠올랐던 것은, 바로 융이 말했던 무의식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이렇다 저렇다고 표현하는 의식적인 부분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크기에 비해 빙산의 일부처럼 여겨질 만큼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것만이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듯 무지의 상태로 살아간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은 우리의 감각적 경험에서 얻어진 수 없이 많은 파편들로 나열된 기억의 모음과, 그로 인해 파생된 감정의 에너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 우리가 가볍게 넘기지 말고 깊이 생각해 봐야할 것은, 사람들은 저마다 아픔이나 상처, 죄의식, 원망과 같은 가급적 기억하고 싶지 않는 부정적인 것들을 자신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 가두어 놓는 반면에, 이를 해소하지 않고 억압함으로써 스스로를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미스터리에 근접한 추리물이라는 외적인 장르에서 오는 흥미로운 부분도 인상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개되는 줄거리의 내용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인생을 향유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내면에 의식적인 부분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기도 해서 주목할 만하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해본다. 아울러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장르와 순문학이 결합된 신선하면서도 색다른 묘미를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작품 속 이야기는 주요등장인물이 되는 신견이라는 남자가 어린 시절 자신의 내면에 굳게 자리를 잡고 있던 R이라는 새로운 자아가 돌출되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는 과거를 회상하면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그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던 중에, 한때 중학교 동창이기도 했던 사나에라는 여자를 우연히 만나 호기심에 이끌려 뜻하지 않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그녀의 학교생활이 너무 짧았던 탓에 형식상 동창생일 뿐이기도 했고 특별한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는 더 이상의 만남을 지속할 생각은 갖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온 어느 사설탐정으로부터 그녀가 살고 있는 베란다를 잠시 조사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녀가 오래전 도심에서 발생한 미궁에 빠진 밀실살인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는 그녀가 겪었던 과거의 사건에 대해 그 세부적인 내용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그 사건으로 그가 알게 된 것은, 사나에를 제외하고 그녀의 가족 모두가 의문의 살인을 당한 것이었으며, 외부의 어떤 침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뚜렷한 증거나 목격자가 없는 관계로 지금까지도 미제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그녀는 그가 당시의 사건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베일에 가려진 충격적인 사건의 전모를 상세히 알려주게 된다. 결국 이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경험했던 과거의 아픈 상처로 인해 현실에서 극히 부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서로가 이해하고 공유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모색하게 된다.


이 작품은 작가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장르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미스터리적인 재미와, 한편으로 예술적 가치와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순문학이 조화롭게 어울린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대개 이와 같은 형식의 작품들은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기는 하지만 그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 생각 외로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중적인 측면이나 작품성과 관련해서도 호감적인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지 않나 싶다. 특히 이 소설은 미궁에 빠진 밀실사건을 중심으로 사건의 중요인물이 되는 당사자와 우연한 인연으로 그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는 두 남녀를 매치시키면서 장르가 주는 흥미의 요소를 바탕으로, 중반 이후 인간의 내면적인 부분을 깊이 파헤쳐가는 대단원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는데, 독자의 입장에서 작가가 구성적인 면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과거 한두 가지의 잊지 못할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결국에는 훗날 타인과의 관계에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기피하게 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심지어는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다보면 주인공의 심리적 상태를 통해, 인간이 때로 이해하기 힘든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공감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작품 속의 제목처럼 우리의 내면에는 분명 존재하지만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정신의 세계는 어쩌면 미궁과도 같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풀릴 것 같으면서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그래서 마치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현상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진실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의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있음에도 우리는 이를 무덤덤하게 넘겨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해 많은 독자들이 작품 속 주인공들이 그랬듯이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를 한번쯤 재정비 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