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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인간은 그 내면에 근원적으로 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어, 누군가의 말 한마디나 사소한 몸짓 하나가 때로는 우리 자신을 규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의미로 남을 수 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느낀 것은 분명 소설을 읽은 것은 맞는데, 내가 한편의 시를 읽을 것인지 아니며 에세이를 본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로, 작품에서 풍겨지는 뉘앙스가 딱히 무엇이라고 고정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책의 전개 내용이 현실에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남녀 간에 터부시될 만큼 금기에 가까운 이야기임에도, 그것이 생각만큼 외설적이지 않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어찌 보면 내게 있어서 등장인물들을 통해 연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서 오는 슬프고도 애틋한 분위기를 공감할 수 있었듯이, 문학이 주는 폭넓은 감상의 지면을 넓혀주는 기회를 제공해 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에 더하여 작품 속 줄거리의 내용이 어떻게 보면 다소 껄끄러울 수도 있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형용하기 힘든 어떤 괴리감이 지배적으로 다가오는 그런 느낌보다는, 제목에서처럼 어디에선가 문득 바라본 소소한 풍경의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감정의 전이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그의 작품 은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이야기의 흐름이 왠지 위태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에 마음을 움츠리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말부분에 들어서면 혹시나 했던 그런 우려감은 어디로 사라지고,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의식이 어느새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독자들도 이 작품을 그러한 관점에서 접근해간다면 기대했던 것 이상의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작품 속 이야기는 소설가로 등장하는 주인공이 그의 제자 ‘ㄱ’ 에게 자신의 집 우물터에서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전개된다. 'ㄱ‘ 은 한때 자신의 첫사랑인 남자와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꿈꾸었지만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자의 모습에 실망을 느끼고 이혼을 결심한 후, 자신의 부모가 거주했던 도시의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는 ’소소‘ 라는 마을로 내려와, 가시를 곧추세운 선인장에 흠뻑 빠져 이를 키우며 정적인 생활을 즐기며 홀로 지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자신의 집 근처 다세대 주택에서 쫓겨난 유랑자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ㄴ' 남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얼마지 지나지 않아 탈북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ㄷ’ 이라는 여성과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ㄱ'의 집에서 살아가는 게기를 마련한다. 그런데 이들 모두에게는 저마다 자신의 가족사에 관하여 기구한 과거의 슬픈 사연을 안고 있다. 그리고 누구도 그러한 과거사를 겉으로 드러내놓고 있지 않았음에도 그것이 일종의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모티브가 되었을까, 세 명의 남녀는 서로 사랑을 나누는 묘한 관계에까지 이른다. 그럼에도 이들은 상대방에게 결코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며, 보통의 남녀 간에서 보이는 사랑으로 인한 질투나 집착 같은 점을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사랑의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ㄴ' 죽음으로 깨어져 버리면서 기존의 어떤 감정도 허락하지 않은 채, 애초 각자 자신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이질적인 존재이면서도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는 세 남녀의 특별한 이야기가 마치 서정적인 풍경처럼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안에 사랑과 이별, 욕망과 고독, 삶과 죽음이라는 서로 대비되는 소재를 흥미롭게 엮어져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문학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인간이 지닌 내면적 본능의 세계를 문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예리한 시각으로 파헤쳐 이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독자들에게 마련해 주는 것이, 어쩌면 작가로서 가져야할 하나의 역할이자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같은 내용을 두고도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할 것인가에 따라 나타나는 그 간극의 차이는 좁힐 수 없을 만큼 너무 크기 때문인데, 특히 겉으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 성에 관한 문제의 경우는 누구에게나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소재여서 그 정도가 더욱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매년 파격적인 사회 문제의식의 내용을 담은 굵직굵직한 작품을 발표한 작가에 대한 고착화된 기억때문인지 몰라도, 개인적으로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이 작품에도 무언가 무거운 주제를 담아내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크게 빗나가지 않은듯하다. 작가는 은교라는 작품에서 인간의 본능에 기인한 욕망의 일면을 적나라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주목받은 바 있는데, 이 작품 역시도 줄거리는 다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그와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사실 이 작품도 그 내용면에서만 판단해 본다면, 은교라는 작품이 그랬듯이 적잖은 논란의 소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먼저 고려하고 판단해야 할 것은, 작품 속 인물들의 표피적인 행동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들이 안고 있는 내면의 심상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새로이 인식하고 깨달을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남녀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사랑이라는 통상적인 감정에서 조금 벗어난, 도덕적인 가치의 문제와 상충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부분이 작가에 의해 얼마든지 문학화 되어 새로운 관점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독자들이 살펴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