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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최근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리얼 프로그램 중, 문명의 혜택이 없는 상당히 동떨어진 오지의 장소를 선택하여, 그곳에서 눈물겨운 생존의 현장을 보여주는, 예능형식의 방송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한때는 설정에 의한 조작이니 하는 문제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것이야 어찌됐던 이 프로그램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 강하게 어필되었던 주된 이유는, 자연의 상태에 가장 가까운 야만적인 환경에서, 과연 문명인이 살아간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에 관한, 궁금함과 호기심이 비롯된 때문은 아닐까 싶다. 또한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모험 항해를 떠나, 난파로 인해 표류하다 우연하게 무인도에서 생활을 하게 되는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가, 여전히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것도 아마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방송이나 소설적인 이야기에 불과하지,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이와 같이 믿기지 않는 일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어보기를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도, 이 작품이 비록 겉으로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리기는 했으나, 작품 속에 전개된 전반적인 줄거리의 내용이, 상상 속의 허구적인 것이 아닌, 한 남자가 실제로 경험했던 실화가 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 작품은 오늘날 호주가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19세기 중반 무렵을 배경으로, 발견될 당시 흰둥이 야만인으로 명명된 나르시스 펠티에라는 한남자의 이야기를 사실감 있고도 흥미롭게 담아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은 불과 15살의 어린 나이에 견습생 선원이 되어 일하게 되면서, 어느 날 항해도중 심한 풍랑을 만나 동료 선원들과 부족한 식수를 구하기 위해 잠시 머물게 되었던, 지금의 호주 북부 퀸즈랜드 부근에 홀로 남겨지고 만다. 이후 그는 실종 처리되어진 상태로 18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그곳의 원주민이었던 이름 모를 부족사람들과 함께 기거하며 생활하게 되면서, 그 동안 익숙했던 자신의 지난 문명의 흔적을 서서히 지워가며, 야만인으로서의 새로운 탈바꿈을 하기에 이른다.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그곳에서, 그는 생존의 몸부림을 치며 마침내는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과거 자신의 기억까지도 송두리 채 빼앗기면서 원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다가, 그가 실종되었던 그때 그 장소에 우연히 정박하게 되었던 영국 선박에 의해 구조된다. 그리고 숙명처럼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면서 이제는 거꾸로 야만의 모습을 벗어야 하는 낮선 문명의 세상에 다시 맞닥트리게 된다.
편지 형식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뚜렷한 두 가지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그 한 가지는 주인공 외에 또 한명의 중요한 인물이 되는 발롬브룅이라는 지리학자를 등장시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야만의 굴레 속에 남겨져야 했고, 어렵게 문명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 펠티에를 위해 새로운 삶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보여줌으로서, 작품 속 휴머니즘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도록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감동의 묘미를 느낄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야만과 문명의 세계를 넘나든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문명의 이기주의에 익숙해져 무덤덤해진 오늘 우리의 비인간적인 행태의 현실을 은연 중 꼬집어 냄과 동시에, 윤리의식과 도덕적 가치관의 부재를 새삼 다시 깨닫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내용의 전개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혀졌던 부분은, 주인공이 겪게 되는 이질적인 환경과 맞물려 점차 변화 되어가는 그의 심리적 묘사 부분이다. 이는 독백과 방백을 통해 현장감 있는 서술을 통해, 마치 독자가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섬세하고 치밀하게 그려져 있어, 한편 공감이 가면서도 이채롭게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 사람의 내면에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해야 하는 상황, 이러한 경험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간혹 생기는 일이다. 이 두 개의 세상은 거의 모든 것이 이질적이며 결코 어느 한쪽으로 흡수되어 온전한 하나의 객체가 될 수 없는 불가피한 영역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숙명처럼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고 그에 알맞게 적응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과정에서, 어느 날 문득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대쪽의 삶을 강요받거나 강제되어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 것인가. 물론 다양한 선택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독하게 걸린 트라우마의 증상이 평생을 두고 쉽게 극복되지 않는 것처럼, 작품 속에 그려지는 주인공의 모습과 우리의 그것은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문명인이라고 해서 혹시 야만인과는 모든 것이 우월하고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착각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러한 생각은 문명의 혜택에 힘입은 우리의 오만과 만용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단순한 소설적 흥미이외에, 인문학적 가치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담은 관점에서 읽혀진다면, 기대 이상의 충분한 만족도를 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