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불 - 존재에서 기억으로
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삶의 과정들이 존재하지만, 유일하게 똑같은 형태를 이루는 것은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그것은 명예나 권력, 그리고 부에 상관없이 누구든 한번은 맞이해야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며 변하지 않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죽음은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라고 한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두 번 쯤은 자신의 한때 실수로 저질러진 죄의식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되거나, 혹은 고통과 아픔으로 인한 무력감을 느끼면서 스스로 관조적인 자세를 취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는 잠시일 뿐이며, 특히 자신의 정신적 성찰의 계기로 삼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듯하다. 오히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이전부터 지속해오던 이전투구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가, 결국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삶의 덧없음을 슬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조부를 실제 모델로 하여 실화와 픽션을 조화롭게 혼합하여, 삶과 죽음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존재로 인식되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물음과 사색을 탐미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인생을 깊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의미 있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에구치 미노루는 외딴 섬마을인 오오노지마의 칼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당시 시대배경으로 보면 군국주의가 팽배하던 일본은, 황국의 신민들이라는 이름하에 조국에 대한 충성은 거스를 수 없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인식되고 있었을 때다. 따라서 남자라면 누구나 군인이 되어 전장에 나선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로 간주되던 시기였는데, 어린 미노루는 그런 혼란스런 과정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자신에게는 평생 잊지 못하게 되는 여러 가지의 일을 겪게 된다. 강물에 빠져 익사하게 된 자신에 형의 죽음과,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던 오토와라는 여성과의 첫사랑, 그리고 군인으로 자원하여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적군을 살상해야 했던 일까지, 결국 예기치 않았던 이러한 단편적인 새로운 사실들은,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는 철학적 과제로 남게 된다. 그리고는 그러한 과거의 기억들로 인해 사랑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이며, 죽음을 통해 이미 세상에서는 사라져버린 그의 형과 친구들의 존재는, 왜 망각되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 속에 오래 각인되어 머물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한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수없는 번뇌의 시간 끝에 모든 사람들은 위도 아래도 없는 똑같이 평등하다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되면서,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에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묻혀 있던 섬사람들의 뼈를 한곳에 모아 불상을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회피할 수 없으며, 삶의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일부 정치가들의 선동에 의한 전쟁으로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과거 사실에 대한 깊은 회한과,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삶의 고통의 과정이 결국 덧없음을 작품의 내용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인문학적 통찰의 필요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작품의 결말에서 보듯, 인생의 여정에서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삶과 죽음, 사랑과 연민,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게 되는 죄의식 등을 이야기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뼈로 만들어진 백불이라는 매개체를 동원하여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고, 그 접점에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통하여, 또 다른 측면에서의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조망해보고자 하지 않았나 싶다. 작품 속에는 주인공 미노루의 70년에 걸친 굴곡적인 일생이 숙연하게 느껴질 만큼, 그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 주변 인물들의 죽음과 사랑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그러한 자신의 조부의 삶을 통해 그가 삶의 마지막 지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타적인 삶의 인식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오늘 이기적이고 배타적으로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인식도 이제 조금은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한 인물의 기구한 운명의 삶이 바탕이 되어 전쟁과 살생, 기억과 사랑,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소설치고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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