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와 비밀의 부채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국내에도 개봉되어 한동안 우리에게 인기를 끌었던 영화 중 델마와 루이스란 영화가 있다. 로드 무비의 전형이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여러 면으로 보아 잘 맞을 것 같지 않은 두 여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당시 남성중심의 사회 체계 속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사회에 대한 저항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눈여겨 볼 것은 운명적인 관계 속에 나타난 두 여성의 모습에서 우리가 적잖은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겠으나 궁극적인 점에서 본다면 공동체적인 운명이라는 틀 안에서 험난하고 고통스런 역경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고 포용하며 아름답게 펼쳐가는 우정의 과정은 아마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우정이라는 테마와 관련하여 소설이나 영화에 대한 여러 작품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여성들의 내용을 다룬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생각해보면 아마도 우리가 주로 우정을 이야기함에 있어 의리와 연관 지어 마치 그것이 남성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간주되는 것은 혹시 우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은연 중 배어있는 선입관이나 편협한 인식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보다 진하고 운명보다 질긴 두 여인의 고귀한 우정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저자의 치밀한 구성과 상상력에 의해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그 내용 속으로 깊게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는데다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중국의 전통 풍습에 얽힌 남성위주의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에 의해 철저하게 가려진 여성들의 가슴 아픈 삶의 애환이 우리의 정서에 맞게 매끄럽게 잘 표현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은 물론이고 우리의 코끝을 찡하게 그리고 마음을 뭉클하게 감동시키는데 충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이 작품에 조금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인 전족과 라오통 그리고 누슈라는 풍습에 대한 것을 조금 알아야 할듯하다. 중국 명나라 전족 미인 반금련은 여자가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발이 크고 뚱뚱하면 반쪽미인 이라고 말했듯 전족은 천 년간 이어져 온 중국 미인의 절대 조건 중 하나였으며, 전족을 하지 않은 여인은 천민으로 취급 받을 정도로 여성에게는 목숨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또한 누슈는 한자와 달리 600여개의 음절문자로 이루어진 여성들끼리만 쓰는 비밀스런 언어의 일종이었으며, 라오통이란 여자들끼리 맺는 일종의 인위적 혈연관계인데 한번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그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묵시적 법칙이 따르는 여인들만의 독특한 풍습이었다.

책 속에는 두 주인공 설화와 나리가 등장하는데 나리는 가난한 소작농 집안의 딸이며 설화는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지만 이들은 어려서부터 라오통을 맺고 함께 전족을 하며 누슈를 통해 정신적인 동일체를 이루며 커가게 된다. 보통 라오퉁은 비슷한 가문끼리 맺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지만 이들의 라오퉁이 가능했던 것은 설화의 집안에 피치 못할 상황 때문이다. 이후 성인이 되어 그녀들은 각자 결혼을 하게 되는데 나리는 권위 있는 부잣집으로 설화는 아편과 도박에 빠진 아버지에 의해 몰락한 집안이라는 이유로 백정의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태어날 때와의 상황과는 정반대로 바뀌었지만 이 두 사람은 라오통의 인연을 토대로 누슈를 통해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어 간다. 그러나 남편의 폭력과 매일같이 시어머니의 학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설화의 고단한 인생과 남부럽지 않은 부귀한 삶을 살아가는 나리와의 현실에서 두 사람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고, 급기야는 두 사람이 주고받던 누슈의 서신 내용을 서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커다란 오해가 생겨 그 동안 이어져 오던 두 여인의 라오통의 관계는 결국 단절되기에 이른다. 시간이 흘러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설화를 찾아간 나리는 지난날 오해로 빚어진 누슈 속에 나타난 설화의 진심을 뒤늦게 알게 되고 속죄의 눈물을 흘리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는 걸 깨닫고 그것이 마침내 비수가 되어 자신이 죽을 때까지 결코 씻을 수 없는 뼈아픈 마음의 통한으로 남게 된다.

과거 우리나라 조선시대와 비슷하게 19세기까지 중국에서 여자의 삶은 유교의 삼종지도나 4덕의 같은 가르침처럼 자신의 의지나 생각과는 상관없는 남자에게 종속되고 강요된 삶이 마치 가치 있는 것처럼 받아 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평생 동안 자신의 삶을 오로지 남편과 집안을 위해 살아야 하고 그것을 당연시 되어야 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했던 상황에서 스스로의 감정과 생각을 마음대로 표출 할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아마 누슈는 당시 여자들만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고 감정이나 욕구불만 해소의 배출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라오통과 누슈 그리고 전족이라는 독특한 풍습을 매개체로 한 이 작품은 당시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고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고달픈 삶의 애환을 사실적이고도 드라마틱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사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좀 의아스러웠던 건 동양적인 정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거부감이 있지 않나 싶은 저자에 있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양의 정서를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도 낭만적으로 표현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은 작가가 독자들에 대한 감정 이입의 전달에서부터 당시 시대상황을 생생하고도 섬세하게 묘사함은 물론, 두 여인의 성장과정에서부터 점차 변하게 되는 미묘한 심리적인 부분들까지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어 작품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만족시키는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많은 독자들이 기묘한 운명의 굴레를 쓴 두 여인의 애틋하고도 가슴 아픈 우정의 이야기를 통해 진한 감동의 여운을 오래 느껴보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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