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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에게 기대지 않고 사는 법 - 일본 최고의 명의가 알려주는
아쓰미 가즈히코 지음, 이진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 병원가기가 부담스럽다. 혹시 큰 병일까 걱정되기도 하고, 별 병 아닌데 과잉진료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혹시 오진은? 편하게 자신의 증상에 대하여 이야기 할 시간도 별로 안 되는 진료를 받는 것도 웬지 찜찜하다. 또한 별 것도 아닌 것을 검사의 종류는 얼마나 많으며, 위 내시경, 장 내시경, CT, MRI 등 검사 자체도 부담이 된다. 그래도 아프기는 하고, 걱정은 되고, 의사의 말은 듣지 않을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다. 의사를 무시할 수도 없고, 의사만 의지하고 살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현대인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다. 그런데 마침 “의사에게 기대지 않고 사는 법”이란 책이 나와 반갑다. 어떻게 적당하게 의지하고, 적당하게 스스로를 챙기면서 사는 법을 찾아보자.
의사에게 의존하면 나을 병도 낫지 않는다. 몸은 의학으로 결코 다 밝혀 낼 수 없을 만큼 신비롭다. 의학의 최대의 한계는 1)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찰할 수 없다. 2)몸 전체를 진찰할 수 없다. 이제부터 명심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1)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과 병원에서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2)의사에게 맡길 것과 의사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을 구분하여 3)가능한 한 자기 몸은 자신이 돌본다. 동일한 병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인에게 효과가 있는 병은 치료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유명한 의사 앤드루 와일 박사는 “한 환자에게 효과를 보인 피료법은 그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어서 다른 환자에게는 똑같이 적용해 치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현대 의사는 ‘환자’를 ‘환자분’으로만 대한다. 그 사람의 신체 특징은 어더한지, 지금까지의 병력과 최근에 심리 상태는 어떠한지, 인생 가치관이 무엇인지 등등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적합한 치료법을 찾는 데 애쓸 여유가 없다. 이 때문에 문진표나 검사결과를 토대로 치료법을 기계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몸’만 생각해도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닌데 여기에 정신과 혼을 더하게 되면 더욱 많은 변수가 작용하게 된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몸의 치료’와 함께 반드시 ‘마음의 치유’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장기를 제거하거나 화학물질을 투여해 몸을 치료하려는 지금의 의료는 특이한 형태의 ‘의(醫)’라 할 수 있다. 최근 반세기 동안, 의료는 철저하게 ‘신체’측면에 서서 질병과 사우며 비약적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으며 그 사실을 우리 의사보다 환자들이 먼저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요즘 의료는 ‘환자 구원’보다 ‘질병 치료’를 우선하는 의료다. 병은 치료했는데 환자는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 의료가 환자가 아닌 의료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폐암 수술 1년에 600건’하는 말은 의사의 실적을 말하는데 과연 진짜 의사의 ‘실적’이란 무엇일까? 요즘 의사는 몸 전체를 치료하지 않는다. 병원 중에서도 특히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 같은 큰 병원은 시체 기관별로 진료과가 세분화되어 있으며 과마다 전문의가 있다. 다른 분야는 모르는 절름발이 의사다. 환자가 몸의 이상을 호소해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이와 같이 균형을 잃은 의사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학도는 지식보다 신체 감각을 익혀야 한다. 환자가 어떻게 느끼는지 자신의 신체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아파하고 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환자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는 자질은 의사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다. 의사가 이러해야 하는데 가족은 어떠하겠는가? 가족의 건강은 가족들이 먼저 챙겨야 한다. 저자는 의사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재능은 ‘직감’이라고 한다. 지금의 의사들은 숫자나 영상 등 눈에 보이는 것을 우선 하게 된다. 지나치게 과학적인 것에 무게를 두고 있는 현재의 의료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위기감이 느껴진다고 한다.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한다. 그러나 정작 ‘사람을 사랑하는 의사’는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일이 돈을 벌기 위한 일이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환자 개개인은 ‘명의’보다는 ‘내게 맞는 의사’가 좋다. ‘만인에게 좋은 명의는 없다’라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결국, 의사와 환자라는 것도 하나의 인간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무엇이든 상담할 수 있는 나만의 ‘주치의’를 찾아야 한다. 평소에 조금씩 나타나는 증상도 말할 수 있는 의사,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my doctor'와 좋은 관계를 유지 하다가 정말로 심각한 증상이 발견되면 그때 종합병원에 대한 소개장으로 가 보는 것이 좋다. 따라서 대대로 이어온 동네 병원이 좋다. 의사도 만능이 아닌 이상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겨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될 수 있으면 스스로 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몸이 안 좋은지, 어떻게 하면 예방할 수 있는지, 어떤 증상에는 어떻게 대처하면 회복되는지 등등. 이러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정확히 파악해 두면 된다. 나는 몸이 이상 증상이 있을 때 수주 쉬면서 회복되는 경험을 했다. 나만의 노하우라 할 수 있다. '서드 오피니언'을 추천한다. 즉 첫 번째 의사, 두 번째 의사, 그리고 마지막 의사, 즉 서드 오피니언을 줄 의사를 통해 다수의 의견을 종합하는 것이 좋다. 첫 번째 의사가 싫어해도 할 수 없다.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진정한 의사라면 좋게 받아들일 것이다. 티베트 의학에서는 병을 세 가지 무지와 세 종류의 체액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인간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체액(호흡, 담즙, 점액)의 균형이 깨져 ‘탐욕’, ‘분노’, ‘집착’의 세 가지 무지가 나타났을 때, 혹은 세 가지 무지가 생겨 체액의 균형이 흐트러졌을 때 병에 걸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번뇌를 끊고, 무지를 깨텨 정신적 안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부분의 병은 병명을 모른다. 어떤 명의도, 어떤 신약도 환자의 자연치유력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병원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진단’으로, 의사가 문진이나 검사를 통해 증상을 진찰하고 병명을 알아낸다. 다른 하나는 그 진단을 토대로 병을 치료하거나 증상을 완화시키는 ‘치료’이다. 의료를 적절히 활용하려면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단’과 ‘치료’를 나누어 생각하면 어디까지 의사에게 맡기고, 어디부터는 의사의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는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뭉뚱그려 생각하면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모두 의존하게 된다. 가능하면 병원 신세를 지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알아서 하고, 자기 몸은 자신이 돌봐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를 잘 생각해야 한다. 의료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병을 백퍼센트 고칠 수는 없다. 인간의 ‘자연치유력’만이 치료할 수 있다. 요컨대 환자 자신이 치료하는 것이다. 동종요법은 2000년 전에 독일인 의사 사무엘 하네만이 체계화한 치료법으로, 식물이나 광물에서 추출한 약을 이용해 치료한다. 이른바 ‘검사피로’란 말이 있다. 각종 내시경은 환자에게 부담을 많이 주며, MRI는 강력한 자장이 발생하여 심장에 부담을 준다. 특히 CT는 1회 검사만으로도 방사선 피폭량이 상당하다. 이렇게 위험 검사는 왜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권유하는 것일까? 일본, 한국, 미국은 일인당 가지고 있는 기계의 수가 월등히 많다. 수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채우려니 당연히 권하게 되는 것이다. 을의 입장인 환자는 울며 겨자먹기로 검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내버려 둬도 낫는 병이 많다. 자연 치유력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떤 의사도, 신약도 인간의 자연치유력 없이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따라서 먼저 자연치유력을 확보해야 한다. 한방 치유가 바로 몸을 회복시켜 자연 치유력으로 치료하는 것이다. 급한 치료, 수술 같은 긴급을 요하는 환자 외에는 한방의 기를 회복하는 치료와 병행하는 것이 좋다. ‘부정수소 증후군’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왠지 몸이 무겁다’, ‘두통이 있다’등 증상이 있지만 특별히 심각하지 않은 경우다. 너무 쉽게 병원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병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증상들을 최근에는 ‘갱년기장애’, ‘자율신경 실조증’, ‘우울증’등으로 진단하고 있지만 병명이 붙여졌다고 해서 병세가 호전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병명이 붙은 증상도 전체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즉 조금 나타나는 증상을 가지고 이런 저런 병명을 너무 쉽게 붙인다는 것이다. 일단 병명을 붙여 놓고 약을 과다하게 쓰다보면 더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다. 최근에 약을 팔기 위해 병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는 없던 병명이 만들어진 것도 있다. 소아정신과에서 아이들에게 병명을 만들어 약을 과다하게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병명을 모르는 이상 증세의 대부분은 몸 전체의 균형이 깨져서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체의 특정 기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나 기후 변화, 몸에 부담을 주는 생활습관 등 여러 요인이 겹쳐 전체적인 순환이 악화되거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고갈된 것이다. 그것이 사람마다 가장 약한 부분, 쉽게 나올 수 있는 부위로 ‘도통’, ‘피부질환’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따라서 약으로 하나의 증상을 억제해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형태를 바꾸어 다른 증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에 비유할 수 있다. 현대 의학의 100년 남짓 발전으로 몇천 년을 이어온 전통의학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전통의학에는 현대의학이 모방할 수 없는 깊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몸에 가장 안 좋은 것은 스트레스다. 약은 될 수 있으면 처방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현대의 약들은 한 가지 증세를 해결하면 다른 부작용을 유발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다른 부분의 증상을 또 해결하다 보면 악순환이 일어난다. 특히 스테로이제는 가급적이면 쓰면 안 된다. 다양한 증세에 직효약이라 의사들이 처방하는 경우가 있는데 반드시 부작용을 심각하게 유발하는 약이다. 오직 긴급한 경우만 사용한다. 전통의학 혹은 한약 등을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무렴 화학적인 약, 인공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인 것이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의학도 과학이라는 입장에서 진정한 과학자적인 자세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사물 혹은 현상을 진지하게 마주하는 자세라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사실 인간의 몸은 매우 불안전한 존재다. 다른 사람에게만 맡겨 두면 어느새 병 쪽으로 끌려가버린다. 아무리 뒤쫓아 가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건강’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이 불안한 상태를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 유지해 나갈 것인가, 이것이 의사나 병원의 신세를 지지 않고 무사히 나날을 보내고 천수를 다하는 열쇠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두통’, ‘몸무게’, ‘손 발 절임’을 주의하라. 몸무게가 1개월 동안 10%이상 빠졌을 경우는 의사를 찾는 것이 좋다. 이런 상태를 미병이라 하는데 평소에 미병을 잘 파악해 두면 병원신세를 그 때 그 때 지지 않아도 된다. 완전히 낫는 것은 드문 일이다. 완화되었다면 ‘운이 좋았다’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안티 에이징 사고로 살지 말고, 헬시 에이징 사고로 살라. 즉 노화에 대해 거부하지 말고, 즐겁게 받아들이며 살면 편하다. 뇌는 유일하게 젊어지는 기관이니 늘 적극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라. 뇌는 옹고집, 마이동풍을 싫어한다. 항상 자극을 받고, 미지의 대상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접하여 놀라고, 경이로움을 즐겨야 한다. 이런 것들을 뇌는 좋아 한다. 암을 불행한 병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암과 같이 살라야 한다. 그러면 어차피 인생을 얼마를 사느냐 문제지 암이 완치 된다고 죽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암은 인간의 한계를 알고, 인생을 생각하고 돌아보라는 신이 준 선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암 세포는 인생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경각세포, 경고세포, 생각세포라고 칭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일본 최고의 명의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기적의 물을 먹고 낳았다는 것은 환자가 기도를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밖에도 난치병 환자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우주 안에 살고 있는 작은 존재임을 깨닫자 곧 병이 치유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 인간은 혼자 힘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가 과연 신인지, 우주인지, 사회인지는 그 사람의 신앙이나 신조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 이외의 의지적 힘을 느꼈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과거 이 같은 체험을 했었다. 18년 전 러시아에서 열린 국제 레이저 의학회에 참가 했을 때, 하늘에 레이저가 쏘아 올려질 때, 필자는 자신이 이렇게 광활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그 때 사막의 모래알처럼 작은 존재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때 이런 깨달음이 없었다면 이런 의학의 열정을 불태울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현재의 일본은 그것을 깨달을 기회가 지나치게 희박한 상태에 빠져 있다. 단순히 혼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비하면 훨씬 풍요로워진 탓일 것이다. 재독학자 한병철은 현대인들이 활동을 위한 시간으로만 생각하는 시간 개념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시간은 사색을 해야 향기가 나고, 사색 속에 신적 존재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야 혼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인간은 위로와 치료를 받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때 뇌 속에서는 무언가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때 몸 전체에 영향을 주어 평소에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 가령 면역계가 활성화되는 상채를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나의 추측이며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직접적인 경험과 세계적으로 보고 되는 사례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추측을 일본의 명의가 하는 것, 그 추측을 책에 쓴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어서 확증할 수는 없지만 확신은 하고 있다는 증거다. 저자재‘를 믿는 힘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늘어난 탓에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착각한 나머지 보이지 않는 존재를 잊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의사인 동시에 과학자이므로 보통 사람보다 훨씬 ’과학적인 것‘에 집착하여 살아 왔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수치화할 수 있는가, 인과관계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가 등등 이런 것에 다른 사람보다 배는 더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 온 것이다. 그런 나 조차도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여러 차례 맞닥뜨렸다. 인공심장을 연구하던 중 세계 신기록을 세워지려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도와주는 것을 깨달았다. 성스러운 에너지가 발산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 몸이 떨릴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이 아니라면 세계신기록은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을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 것은 매우 빈약한 발상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인지를 초월한 가능성이 나타나는 법이다.
일본의 최고의 명의는 의사의 기득권적인 입장에서가 아닌 환자의 입장에서 솔직하게 쓰고 있다. 양심도 명인이라 생각된다. 의사, 의료 종사자, 병원들의 이득을 위한 것들, 의사들이 잘 모르는 것들을 솔직하게 털어 놓고 환자들도 공부할 것을 권하고 있다. 사실 의사 앞에 서면 주눅이 든다. 일단 챠트에 알아먹지 못하는 영어로, 그것도 약자로 기록하며 자기들만의 암호를 쓰고 있다. 물어보지도 않지만 물어도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환자는 을의 입장에서 속만 탈 뿐이다. 의사에게 의지해야 함을 분명하지만 진료를 받았으면 치료는 취사선택할 용기와 능력, 정보와 경험을 가져야 한다. 나도 50대로서 이런 저런 증세를 겪고 있는 입장에서 너무나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솔직하게, 명의답게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환자의 입장에서 안내해 줘서 위안이 된다. 이 책을 통해 의사나, 병원을 불신하는 쪽으로 가서도 안 되지만 이제부터 똑똑하고 당당한 환자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