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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미스터 갓
핀 지음, 차동엽 옮김 / 위즈앤비즈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어른이 되면서 질문이 없어진다.’ 이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어린이들은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은지 듣고 답해주려면 질릴 정도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질문 상자가 멈춰섰다. 왜 질문이 없을까? 다 알아서일까? 모르는 것이 창피해서일까? 그냥 아는 척하는 것일까? 사실 아이들의 질문 속에 심각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아주 중요한 질문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도 잘 정립되지 않은 탓에 대답해주지 못하고 얼버무린다. 그러면서도 답을 찾기는커녕 또 질문 없이 앞으로만 간다. 또 삶의 현장에 떠넘겨진다. 여기 등장하는 ‘안나’는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읽으면서 과연 그럴까 싶을 정도다. 정확히 안나가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인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작가가 각색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가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영감을 준 아이라면 분명 범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실 알고보면 아이들은 대부분 안나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신없이 살다보니 그냥 무시한 것 뿐일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우리 주위에 수도 없는 ‘안나’가 있다. 아니 우리집 아이가 바로 ‘안나’다. 오늘도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뜨고 우리들의 ‘안나’의 눈을 보자.
‘안나’의 기도다. “사랑하는 미스터 갓, 안나예요.” 어찌나 친근한 말씨로 기도를 했던지 내가 뒤를 돌아다보면 미스터 갓이 정말 내 뒤에 서 있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우리의 기도 소리와 내용은 하나님과 너무 멀리, 아니 계신지도 의심스러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을 느끼자.
핀의 어머니와 안나는 비슷한 것이 많았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공통점은 아마도 미스터 갓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들의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로 미스터 갓의 이름을 들먹거린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도 당연해.’ 혹은 ‘왜 미스터 갓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실까?’ 그러나 어머니와 안나에게는 어려움이나 역경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좋은 기회일 따름이었다. 추한 것은 무엇인가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되고, 슬픔은 기쁨을 위한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미스터 갓의 돌보심 안에서 말이다. 어머니와 안나는 실제로 미스터 갓이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고, 미스터 갓이 그들의 대화에서 소외된 적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계신다고 왜 우리는 믿을까? 그냥 계신데, 믿을게 아니라, 이젠 알아야 한다. 아니 느껴야 한다. 그리고 내 얼굴로, 말로, 표정으로, 마음으로,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게 우리의 할 일, 아니 하게 되는 일이다.
안나는 성경을 초보자들의 입문서 정도로 간주하였다. 성경의 메시지는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어떤 반푼이라도 30분 내에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신앙은 실천하라고 있는 것이지, 행동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한 것을 읽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너는 교회에 왜 안 다니니?” “다 알고 있으니까요” “뭘 다 알고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줄도 알고, 사람들을 사랑할 줄도 알고, 그리고 고양이도, 개미도, 거미도, 꽃도.....“ 그렇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른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안나에게는 의문거리였다. 미스터 갓을 만나기 위해 교회를 간다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었다. 어쨌든 미스터 갓은 어디든지 있지 않다면 미스터 갓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교회에 다니는 것은 메시지를 못 들었던지, 알아듣질 못 했던지, 아니면 ‘단지 폼 잡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그 애는 생각했다. 우리는 꼭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니 문제다. 교회에서만 만나도록 강요하는 것도 문제다. 교회에 와야만 만난다고 강제하는 것은 더 문제다. 그러나 어디어서든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 눈에 보여야 잘 믿는 것 같은 착각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고, 성도들은 어디에서든 잘 만나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그들이 모든 장소에서 다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럼 미스터 갓에 대해서 모르는 게 그렇게 많은데,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알지?”
“올챙이들 있잖아, 그들을 나는 죽을 때까지 사랑할 수 있어. 그치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을 사랑한다는 걸 분명 모를 거야. 그치? 내가 그들보다 백만 배도 더 크잖아. 똑같이 미스터 갓은 나보다 백만 배도 더 크지. 그치? 그러니까 미스터 갓이 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껏해야 3차원이다. 3차원의 세상에서만 살고, 그 차원만 알고 있는 우리가 5차원, 10차원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차원의 하나님을 어찌 알 수 있으며, 그분의 사랑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미스터 갓이 한없이 크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미스터 갓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어떤 크기로도 변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그가 작아질 수 없다면, 어떻게 무당벌레들의 세계를 알 수 있겠어?” 인생의 목적은 바로 이런 미스터 갓을 닮는 데 있다고 해야 마땅할 터다. 단지 착하고 관대하려고만 애쓰고, 기도하려고만 애써봐야 힘만 든다. 먼저 미스터 갓의 마음을 닮으려고만 해 봐라. 일단 미스터 갓의 마음을 닮으면 착해지지 않을 수 없고, 친절해지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미스터 갓과 똑같아진다면 우리는 우리 모습을 잊어버릴 것야.” “무슨 모습?” “착하고 친절하고 사랑에 넘친 모습” 닮아가려고 애써서 되고, 그래서 된 것을 가지고 상급을 받고, 높아지려 한다면 율법주의일 것이고, 하나님을 그저 닮아보려고 애쓴다면 복음주의 일 것이다.
사람들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미스터 갓은 둘도 아니구 하나잖아. 그러니까 비교할 수가 없지.” “사람들은 미스터 갓과 비교하진 않아.”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은 오직 그 사람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비교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자녀들을, 학생들을, 사람들을 비교해 왔던가? 오! 비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용서해 주소서!
‘지금까지 나느 비로소 질문이 먼저 있고 대답은 나중에 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대답이 먼저 정해지고 질문을 나중에 생각해낼 수도 있다니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우리도 행복, 축복, 성공이라는 인생의 답을 정해 놓고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해답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는 내가 과연 성공할 것인가? 행복할 수 있을까?를 끝도 없이 질문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행복하려고 오늘도 더 열심히 달려간다. 그러나 우리 답은 정해졌다. 행복이라고, 그래서 어떤 상황이 돼도, 어떤 문제가 있어도, 어떤 일이 터져도 우리는 이미 행복한 것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3차원의 공간을 차지하는 어떤 물체도 2차원 평면에 빛으로 투영시키면 2차원 그림자를 남기고, 그 그림자를 다시 1차원 무한선 위에 투영시키면 하나의 ’선분‘으로 축소되어 비친다는 사실을 아직 모호한 가운데 안나는 마냥 신기해하고 있었다. 어떤 물체는 3차원에서는 형형색색의 차이를 갖다가도 2차원의 평면에 투영시키면 색깔도, 무게도 없는 그림자 형상만 남는다. 다시 그것을 1차원 직선에 투영시키면 길이의 차이만 다소 드러내는 선만 남고, 그것을 0차원에 투영시키면 만물이 하나같이 점이 되어 나타난다. 이 점은 내 그림자의 그림자일 수도 있고, 버스의 그림자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주, 억경 가지의 물체, 다양한 모양의 그림자들, 길고 짧은 선들, 점, 서로가 잘난 우리들의 삶도 결국 본래 자리로 돌아가 보면 잘나봐야 긴 선, 못나봐야 짧은 것, 더 궁극의 자리로 돌아가 보면 모두가 구분 없이 다만 ’존재‘라는 점이 아니겠는가?
대낮의 밝은 빛은 오관을 숙련시켜주지만, 밤의 어두움은 기지를 계발시켜주고 상상과 환상의 나래를 활짝 펼쳐주며 기억을 촉진시키고 가치 척도를 온통 뒤바꿔놓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밤의 묵상, 최고의 선물이다. 잠 안 오는 밤, 글의 최고의 장터다. 불면의 밤, 사색의 축복이다. 밤, 사색을 하라, 상상을 하라, 글을 쓰라, 시를 쓰라.
‘그 애가 말하는 ’사랑‘은 감상적이거나 달콤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기를 돋우며 용기와 격려를 안겨다주는 말이었다. 상대방의 전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싶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애는 ’사랑‘이라는 말을 썼다.
‘저렇게 그녀는 개별의 상태들로부터
삼라만상의 종과 유들을 추상하고
그것들에 새 옷을 입혀 온갖 이름들과 운명들을 부여하면서
오관을 통하여 마음에 이르는 우리들의 길목을 도둑질한다네‘
안나가 8세에 세상을 떠났다. 안나의 삶은 피지도 못하고 일찍 꺽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안나의 삶은 누구보다도 길었고 깊었고 높았던 것이다.
“그렇군요 미스터 갓! 제가 설복 당했습니다. 좋으신 미스터 갓, 당신의 시간은 가끔 너무 느려서 탈이지만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니 말입니다.“
‘
‘안나는 정말로 고향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안나는 묘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수억경 톤의 대리석으로 무덤을 꾸민다 해도 자연 그대로보다 결코 나을 수가 없었다.’
“대답은 ‘내 마음속에’라우”
“순간 오싹하는 느낌과 함께 안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건 무슨 질문에 대한 답이지, 핀?”
“어렵지 않지. ‘안나는 어디 있게?’가 물음이 아니겠어?”
나는 그 애를 다시 찾았다. 안나는 내 마음속에 있었다.
참 신선한 책이었다. 생각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했다. 내가 너무 세상에 물들어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색을 해야 시간에서 향기가 난다고 한다. 삶을 살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속에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사색을 하자. 아니 어쩌면 더 자연스럽게, 생각조차, 사색조차 내려놓자. 그저 있는 그대로 느끼는 법을 배우자. 너무 좋은 책을 전해준 차동엽신부님에게 감사드린다. 물론 저자에게도 감사드린다.
(마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