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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레시피 - 희망과 행복을 만드는
김병태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누구나 행복해 질 권리가 있고, 행복해지는 방법 또한 반드시 있다. 그 길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저자는 이 행복을 찾는 방법을 음식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뜻의 레시피를 쓰고 있다. 즉 모든 행복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행복을 만드는 법에 있어서 믿음, 예배, 말씀, 기도, 사명, 소망, 자아, 열정, 습관 생각, 관계, 11가지로 말하고 있다.

 모세의 손에 있는 마른 지팡이가 있기에, 삼손의 손에 잡힌 나귀턱뼈가 있기에, 지금도 당신을 위해 작동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멈추지 않기에, 하나님의 사람들만 있으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일하신다. 문제는 회복을 갈망하는 당신의 마음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다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어떻게 회복 마인드로 나를 바꿔나갈 것인가?그 지혜를 얻고자 한다. 자, 이제부터 11가지의 회복 메뉴 레시피를 알아보자.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유산을 물려받아야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이다. 저주와 불행의 DNA를 끊어야 하며, 축복의 DNA를 소유하는 방법만이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새 세포를 이식받아야 한다. 그 살리는 행복의 세포는 오직 주님이 주시는 믿음의 세포이다. 믿음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그분과 함께 인생의 모든 일을 믿음으로 달려가는 길이다. 믿음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게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성령님의 은총을 구해야 얻어질 수 있다. 베드로처럼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은 “‘나’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믿음에는 자신을 넘어서는 체험이 뒤따른다.

 

교회 안에 예배 없는 봉사자들이 있다. 교사로 봉사하는 자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교역자로 섬기다 보면 예배를 드리지 않고 사역만하는 경우가 있다. 예배는 안 드리고 안내, 서빙만 한다. 예배를 점검해 봐야 한다. 어렷을 때는 교회를 재미로 다닌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 더 재미있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된다. 교회는 재미로 다녀서는 안된다. 교회는 재미있게 해서 잡아둬서는 안된다. 초대 교회는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 애경사, 친구 관계, 학업을 위한 학원, 계모임 때문에 예배를 포기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 것과 같다. 예배를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서 디자인되어서는 안된다. 성령님이 운행하시는, 성령님이 도우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결코 사람들의 북적거림이 아니다. 예배의 홍수시대에 진정한 예배는 없다. 직분 때문에, 인도라자, 의무감에, 자리만 채우는 예배는 안된다. 화려한 퍼포먼스로 감성을 자극하는 흥분제로서의 예배는 바람직하지 않다. 예배는 공연이 아니다. 퍼포먼스 예배를 드리고 나면 뭔가 허전함이 느껴진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더 화려한 퍼포먼스가 있는 예배를 찾아 다닌다.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 예배 쇼핑을 한다. 따라서 더 잘 디자인된 예배를 찾아 모이는 예배 쏠림 현상이 벌어진다. 진정한 예배는 내가 만족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받으려고만 하는가? 예배는 은혜받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말씀의 회복이다. 성경을 마음의 양식을 쌓는 것이 아니다. 강단은 말장난하는 곳으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 포도주에 물을 타듯 성도들이 듣기 좋게 포장하고, 성도들의 입맛에 맞추려고 애쓴다. 성도는 자기 입맛, 취향대로 들으려 한다. 이런 저런 설교를 해 달라고 한다. 설교 품평회까지 열린다. 시44:1절에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고 했다. 포로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들은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그들이 들은 말씀은 희망의 소리, 가슴 뜨거워지게 하는 소리, 심령에 희망의 불을 지피는 소리였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보면 “주님, 제가 오직 당신만을 갈망하며, 오직 거룩하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아시지요? 당신이 저에게 이런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제게 이런 마음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당신밖에 없습니다.” 요즘 내 마음이다. 오직 주님을 묵상함이 즐거움이다. 주님을 묵상함이 능력이다. 주님의 기쁘시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즐거움이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이 모든 것이다. 나의 할 일의 전부이다. 주님이 나의 전부이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의 말씀이 내 입에, 내 말이 곧 주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회복 레시피, 참 쉬우면서도 정확한 진단이다. 그대로 내 인생을 요리해 보고싶은 레시피이다. 많은 것을 얻었으니 이제 본격적인 요리를 해 보자.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 나는 내 핼복한 인생을 요리하는 최고의 쉐프가 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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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 - 임동확 시인의 시 읽기, 희망 읽기
임동확 지음 / 연암서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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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나에게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시를 읽을 줄도, 감동을 받을 줄도, 더군다나 쓸 줄은 몰랐던 나다. 내가 시에 관심을 갖고 습작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8년간의 독서모임, 매주 한 권 이상씩 읽어오던 독서습관이 어느 날 최치원 선집을 읽던 중 이런게 시로구나 생각이 되어 끄적거리던 것이 미숙하나마 시란 것을 150편 이상 쓰고 있다. 참으로 놀랍고 기적이라 싶다. 그러던 중 임동확 시인이 시에 대한 글을 썼다하려 정말 읽고 싶어 구하여 읽게 되었다. 참으로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시를 읽는 법을 잘 몰랐던 나에게 시를 읽는 법, 감상하는 법, 더 나아가서 쓰는 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책과 같다.

 

저자의 몇 가지 탁월함이 보인다. 다양하면서도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주제의 시를 골랐다고 생각된다. 시를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생각된다. 시를 읽거나 쓰다보면 내 취향에 빠지기 쉬운데 이런 시도 있구나 생각되면서 이런 주제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미숙한 나라 이런 깊은 사색을 하는 시를 짓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정말 감사한다.

 

저자는 또한 시를 어떻게 그렇게도 깊으면서도 통찰력 있게 분석하고 이해시켜주는지 놀랍고도 놀랍다. 정말 시를 제대로 연구하는 시의 전문가, 시박사라고 생각이 든다. 내가 그냥 읽을 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시도 설명을 들으면 정말 공감이 되고, 그 시와 시인에 대한 재평가가 저절로 된다. 어떤 시는 시인 보다도 더 깊이, 더 큰 의미를 불어 넣어주는 시에 영감을 불어 넣는 영성가라는 생각이 든다. 임동확 시인의 소개에 ‘특히 시를 쓰고, 읽어주고, 가르치는 모든 과정을 일종의 종교적 제의로 받아들이며 문학과 학문을 병행하는 점에서 당대에 보기 드문 인문주의적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내가 감동받은 몇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p19에서 그러므로 “살아 있다”는 것은 “흔들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불가피하게 “흔들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살찌운다. 참으로 공감한다. 나도 “흔들리는 나무”라는 시를 쓰면서 흔들리면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는 느낌을 적어 페이스북에 올렸었다. 어떤 분이 그 글을 보고 “요즘 흔들리고 있나봐”하면서 답글을 올린적이 있다. 조금은 씁쓸했다.

 

정지용의 장수산이란 시에서

p53에 ‘“맹아리”와 “고요”, 정지와 흔들림과 같은 절대적으로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서로 절대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영속적인 패러독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절대적 시공간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집중할 때, ’장수산‘은 한낱 우리에게 죽은 기계의 소음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상호 유대적인 결속이 창조하는 생명의 화음을 들려주는 장소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라고 했다.

영국의 유명한 영성가 C. S. 루이스도 신의 음성을 듣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면 라디오, 음악, 드라마, 신문 등의 소리를 계속 들리게 하라고 하고 있다. 장수산 같은 절대적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김현승 시인은 그의 시 <절대 고독>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는‘라고 한다. 그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직시함으로써 나의 시는 그 생명력을 얻는 역설에 직면한다. 시적 언어의 무기력 내지 한계를 느끼는 데서 오는 절망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과 마주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으로 뒤바뀐다. 침묵의 희열, 침묵의 영광, 침묵의 환희를 볼 수 있었다.

 

김정환의 시 ‘독수리’에서

p177에서 “고독한 천상과 무한한 지상 사이의 중간 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시인으로서 ”나“는 ”내 무게보다 더 무거운 어떤 / 떠받침“, 또는 ”숭배보다 더한 그 무엇“에 대한 깨달음 혹은 그 어떤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문득 세속의 시간으로 임재하는 신으로서 ‘독수리’를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작가 이중텐은 영감 중에는 끝없이 질문을 하는 철학적 영감과 맹종을 요구하는 종교적 영감이 있는데 둘을 이어주는 것이 시인의 영감이라 했다. 김정환의 시인의 영감으로 두 영감을 이어주는 시로 이해된다.

 

윤중호의 <시>에서

p316-321에서 서정시가 “엄니”의 삶으로 대변되는, 제대로 된 보호막조차 없는 작고 초라한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 "행상으로 어렵게 살다 간 시인 자신의 “엄니”에 대한 회상은, 바로 그와 같이 힘없고 가난한 삶과 세계가 서정시가 태어나는 자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 한낱 “행상”으로서 “한 달에 한 켤레씩 신발”이 닳도록 “걸얻”니며 겪어야 했던 “엄니”의 내면에 스쳐갔을 가뭇없는 “막막”함이나, 명확한 의미로 규정지을 수 없는 “질수심”과 같은 마음의 세계가 서정시의 근원이자 출발지임을 의미한다. ...... 서정시가 단순히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낙원에 대한 향수와 동경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 간신히 정하는 소리 없는 주변성의 소리, 하지만 그 속에 내재한 생명의 원초적 리듬 또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 때문에 서정시인들은 “이른 봄 새벽부터” 길도 얼어버린 겨울 그믐밤까지“ ”눈물겹게 아름다운“삶의 길 또는 사랑을 마치 ”행상“처럼 노래하면서 스스로를 주변자 또는 생의 변방으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정시인들의 시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시를 통하여 대변하는 것 같다. 아니 그 시를 저자가 대변해주는 대변인 같은 느낌이다. 나도 시감이 짧아 자연을 통해 먼저 느끼고, 그 느낌의 의미를 새겨보는 정도로 적어보고 있다. 이렇게들 깊은 것까지 느끼고, 지면에 옮기는 것은 아직 나에게는 먼 길인 것 같다. 그러나 저자와 같은 책들을 많이 읽고 습작하다보면 언젠가는 산마루에 오를 날이 오리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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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퍼틱의 선포 기도 -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선포하라, 개정판
스티븐 퍼틱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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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한 도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도라는 주제만큼 흔한 주제이면서도 새로운 주제는 없을 것이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잘 모르는 것이 기도일 것이다. 기도의 경험과 깊이와 능력은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기도의 종류를 말한다면 그 또한 다양하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알아야 겠다는 강력한 욕구사 생기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도의 거장 앤드류 머레이의 기도의 능력을 읽고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책으로 분류하고 있다. 선포기도는 전에 손기철 장로의 <왕의 기도>를 읽고 도전을 받은 경험이 있다. 이젠 더 구체적인 선포 기도의 능력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이 책장을 열면서 여호수아의 태양을 멈춘 기도에 엄청난 도전을 받았다. 읽은 즉시 심야기도회에 전했고 성도들도 강력한 은혜를 받고 기도를 했다. 이전 부산에서 열린 국제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기도로 준비했는데 어떤 성도는 명단에도 없던 분이 선포하고 나아갔더니 다른 성도가 참가비를 대신 내 주고, 당당하게 참가하여 엄청난 은혜를 받았다. 찬양의 은혜(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핀잔으로 노래를 절대로 부르지 않았음)를 받고 찬양을 목청껏 했고, 통성기도를 싫어하던 성도가 예배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보았고, 남성 셀 및 사역팀을 변화시키를 기도하고 선봉장이 되어 나아가고 있다. 선포기도의 응답이 이 책을 읽은 즉시 나타난 것이다.

 

저자는 짐 심발라의 <새바람 강한 불길>을 읽고 p23의 “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망감이 밀려왔다.”는 문장에 충격을 받고, 거대한 비전으로 달려가고, 인생을 바꾼 궤적이 되었다고 한다. 나도 이 문장에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컨퍼런스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이 글을 들려 주었다. 한 청년도 공감하면서 자신도 그럴까봐 두렵다고 하면서 휴직계를 내고 영혼구원의 사명으로 나아가겠다고 했다.

 

위대한 크리스천들이 대담한 믿음으로 세상을 바꾼 것은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완벽한 본성과 목적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따를 만한 분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어떤 믿음의 유산을 남기고 하나님의 영과아을 위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결정된다.

 

요즘에는 말씀을 선포하는 크리스천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대부분은 성경에서 ‘정보’만 얻을 뿐이다. 그러나 정보만으로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말씀을 듣는 것이 자동차 키를 돌려 시동을 거는 것이라면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담대한 믿음이 실패 없는 인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는 위기의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안다. 태양이 질 때도, 아니 그럴 때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환하게 빛난다. 하나님이 필요할 만큼 큰 적을 만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할 수 없다. 반대가 없는 곳에는 기회도 없다. 당장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믿음을 타협하거나 버리지 마라. 예수님은 포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와 대신 싸우러 오신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빛나게 하시려고 태양을 지게 하신다. 상황이 어두울수록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은혜로우신 빛이 만천하에 더 환하게 빛난다.

 

대담한 믿음은 수동적인 믿음이 아니다. 단순히 대담한 기도만도 아니다. 기도에는 언제나 행동이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를 감당해 주신다. 소망은 바람이다. 반면, 믿음은 행동이다. 믿음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sfur하고, 그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기적을 이루시는 데 한 몫을 했다. 선포기도의 응답을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몫을 해내라.

 

요나단은 삼상14:6절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고 했다. 하지만 이상할 게 없다. 원래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한편으론 하나님이 못하실 일이 없는 줄로 알지만 한편으론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실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대담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대담한 믿음이라고 해서 불안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담한 믿음은 불안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태양이 멈추는 땅은 ‘약속’과 ‘혹시’가 공존하는 땅이다. 아무리 대담한 믿음을 품어도 의심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담한 믿음으로 한 발씩 나아갈 때마다 의심과 두려움의 힘은 조금씩 줄어든다. 100%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늦는다. 사람들의 오케이 사인을 기다려서도 안된다. 남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게 어떤가? 하나님께는 ‘혹시’가 없다. 당신의 걱정과 불안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솔직히 고백하라. 겸손한 확신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꼭 붙어 있으라. 그분이 당신을 꼭 붙들고 계심을 믿어 의심치 마라. 그리고 두려움이나 의심의 파도가 밀려오거든...뛰어넘으라.

 

구원은 공짜다. 그러나 순종은 공짜가 아니다. 이 두 사실은 모순적이지 않다. 아니, 이 둘 사이의 긴장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인내오ㅘ 기도, 순종, 희생의 토양 위에서 자란다. 다시 말해, 밭을 일구고 가지를 쳐야 한다. 채소나 비전, 뭐든 잘 가꿔야 자라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스티븐 퍼틱 목사님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엘리베이션 교회에 역사하신 것들이 가슴에 새겨진다. 나도 내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심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경험하도록 선포할 것이다. 또한 우리 교회 성도들이 선포기도로 그 역사의 주인공이 되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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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중의 중국 이야기 1 - 떠오르는 용, 중국 김하중의 중국 이야기 1
김하중 지음 / 비전과리더십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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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국을 두 번 갔다 왔다. 전에는 선교목적으로 다녀왔고, 또한 얼마 전 두 번째 중국을 다녀와서 저 큰 나라, 많은 인구, 큰 땅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정말로 궁금했다. 특히 김하중 대사님의 독실한 신앙을 기초로 하여 본 관점은 더욱 영적으로 볼 수도 있을 기회 같아 이 책이 더 기대된다. 특히 중국책(사서삼독, 사기본기, 관자, 삼국지, 등소평 평전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간접적으로 책으로만 접하는 중국은 한계가 있었는데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았다. 특히 현대의 중국, 최근의 소식까지 들을 수 있으니 더욱 기대감을 가지고 이 책을 대하게 되었다.

 

사실 먼저 김하중 대사님의 <하나님의 대사>에 큰 감동을 받았다. 어린양 같이 작은 것까지 기도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저도 그 이후로 더욱 구체적이고, 작은 것까지 기도하는 것을 본받고 있다. 또한 국가적 대사까지 기도로 풀어가는 모습은 너무나 본이 되었다. 사스로 중국과의 관계가 어려워질 위기 가운데서 기도로 풀어감으로 중국의 신뢰를 얻게 되는 것은 대사로서 그 역할을 십분 발휘했다고 본다. 이런 신실한 분이 중국을 설명하는 것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새겨지는 시간들이었다.

 

이 책은 그 넓은 중국을, 그 많은 중국 사람을, 그 오랜 역사를 그렇게 쉽고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말로 중국을 잘 아시는 분이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섭렵하고 쉬운 말로, 알아보기 쉽게, 아주 편안하게 기록하고 있음이 감탄스럽다. 사실 잘 모르면 그대로 옮겨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는데 누구라도 중국을 잘 알 수 있도록 기록함이 훌륭하고 감사하다.

 

특히 외교관이 되기 위하여 어려서부터 준비했고, 특히 중국 대사가 되기 위하여 철저히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중국어를 했고, 중국 책을 읽고, 중국 대사가 되기 위해 미국이나 좋은 근무처를 뒤로하고 오직 중국에 집중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중국과 수교가 될 것을 믿고 철저히 준비하여 수교를 성립시키고, 중국 최장수 중국대사를 거쳐 통일부장관까지 역임한 중국을 위해 준비된 분이시다. 지금 중국과 대단히 민감한 때에 일본과는 소원해진 중국이 한국과 친밀함을 보이는 것은 다 저자의 수고 때문이라 확신한다. 연세는 드셨지만 앞으로도 좋은 활약을 기대하며 찬사는 보낸다.

 

중국 바로 알아가기에서는 중국을 한 쪽으로 편협되이 기록하지 않고 다양하게 있는 그대로를 쓰고 있다. 서양에서 보는 중국, 한국에서 보는 중국, 중국 스스로 보는 중국을 다양하게 기록함으로 편견 없이 보게 되는 장점이 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은 내용들이 상반되게 나오는 것 같지만 그 긴 역사와 지역의 차이, 경제력의 차이, 특히 최근에 급속한 발전에 의한 사회 및 문화 발전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중국을 더 확실하게 아는 법이고, 그래야 진정 중국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에 대한 책이 자존심 강한 중국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다는 것에 저자의 지혜를 보게 된다. 특히 중국의 지도층과 지식층에 인정을 받는 것은 중국을 잘 알면서도 잘 표현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실제로 읽어보면 중국의 장점만을 중국인들이 듣기 좋게 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즉 중국의 장점은 화합하는 기질,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공명정대를 표방하고, 예를 배우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예를 중시하고(관자는 국가는 법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예로 통치한다고까지 했다.), 유토피아는 천하가 인(인이란 효, 의, 충, 지, 용을 포함함)안에 귀속되는 것, 덕이 후한 자는 빛이 흐른다고 하여 덕을 강조하고, 화평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국가관을 가지고 있으며, 선을 쌓으면 선을 만나다 하여 선을 베풀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또한 관용을 통하여 거대한 응집력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을 삼고 있으며, 절조, 즉 비굴하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고, 검약한 사람은 항상 마음이 부유함으로 사치하지 않고, 과감성, 즉 먼저 예를 지키고 안 될 때는 무력을 행사한다. 애국, 국가의 임무를 행함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 하여 개인보다는 가정, 가정 보다는 집안, 집안 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는 애국애족의 민족이다. 이렇게 좋은 면을 다양하게 칭찬하였지만 반면에 단점도 과감하게 지적하고 있다. 지나친 원숙함으로 안정지향적 성향과 노인을 공경하는 생각이 발전과 개혁을 뒤처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중용을 강조함으로 늘 중립만을 지향하여 우유부단함도 보인다. 족함을 알면 항상 즐거워 더 이상 발전하려 하지 않는다. 과거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이 교만으로 보이게 한다. 자기 집 앞 눈은 치워도 다른 집 기와의 서리는 상관하지 말라는 말 속에 나타나듯 세계와 인류의 평화와 빈국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부족하여 세계를 존경받고 주도하는 국가가 될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현대 중국을 이야기 하자면 등소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등소평의 개인의 개혁은 아니지만 중대한 갈림길에서 많은 반대를 무릎 쓰고 개혁개방, 즉 흑묘백묘(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를 주창함으로 지금의 중국을 이룩하였다. 여기서 중국의 다양성을 보게 된다. 개혁을 반대하는 모택동을 중심으로 문화혁명을 일으킨 쇄국정책의 세력에 대항하여 관자와 같은 실용주의의 영향이 등소평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법보다는 유연한 행정력, 청렴보다는 실무능력, 원칙보다는 사회의 예와 분위기를 중시하는 것은 유연한 중국을 대표하고, 그 사상이 맞는 인물들이 때를 만나 빛을 보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등소평인 것이라 생각된다.

 

중국하면 앞으로 한국과의 관계, 일본, 미국과의 경쟁 및 동반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까 하는 문제이다. 최근에는 대동아전쟁이 일어날 때와 같은 동북아 정세라고 까지 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중국이 어떻게 나와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한국의 자세라는 것이 귀추가 주목된다. 먼저 중국은 대국으로서 특히 최근 발전된 나라로서 교만하지 말고 동북아를 품고,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와 민족의 이미지를 잘 펼쳐가야 한다고 본다. 한국은 수천년의 역사 속에서 절대로 중국의 수차례의 변방으로 삼으려는 정책에 밀리지 않고 물리쳤던 것처럼 5000년 찬란한 역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당당하게 교류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북한은 우리나라가 삼국시대에서 이국시대를 겪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중에 한 나라인 북한이 어디와 협력하여 국민들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할지를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또한 이국 중에 하나인 북한을 한 국가로 인식하고 넓은 아량으로 품고, 돕고, 덮고, 존중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대한민국이 중국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일본을 품고, 세워서 한중일 세 나라가 하나의 공동체, 한 공생과 사랑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나라와 인구는 작지만 대국적 기질을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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