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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 - 임동확 시인의 시 읽기, 희망 읽기
임동확 지음 / 연암서가 / 2013년 3월
평점 :
시는 나에게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시를 읽을 줄도, 감동을 받을 줄도, 더군다나 쓸 줄은 몰랐던 나다. 내가 시에 관심을 갖고 습작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8년간의 독서모임, 매주 한 권 이상씩 읽어오던 독서습관이 어느 날 최치원 선집을 읽던 중 이런게 시로구나 생각이 되어 끄적거리던 것이 미숙하나마 시란 것을 150편 이상 쓰고 있다. 참으로 놀랍고 기적이라 싶다. 그러던 중 임동확 시인이 시에 대한 글을 썼다하려 정말 읽고 싶어 구하여 읽게 되었다. 참으로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시를 읽는 법을 잘 몰랐던 나에게 시를 읽는 법, 감상하는 법, 더 나아가서 쓰는 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책과 같다.
저자의 몇 가지 탁월함이 보인다. 다양하면서도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주제의 시를 골랐다고 생각된다. 시를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생각된다. 시를 읽거나 쓰다보면 내 취향에 빠지기 쉬운데 이런 시도 있구나 생각되면서 이런 주제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미숙한 나라 이런 깊은 사색을 하는 시를 짓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정말 감사한다.
저자는 또한 시를 어떻게 그렇게도 깊으면서도 통찰력 있게 분석하고 이해시켜주는지 놀랍고도 놀랍다. 정말 시를 제대로 연구하는 시의 전문가, 시박사라고 생각이 든다. 내가 그냥 읽을 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시도 설명을 들으면 정말 공감이 되고, 그 시와 시인에 대한 재평가가 저절로 된다. 어떤 시는 시인 보다도 더 깊이, 더 큰 의미를 불어 넣어주는 시에 영감을 불어 넣는 영성가라는 생각이 든다. 임동확 시인의 소개에 ‘특히 시를 쓰고, 읽어주고, 가르치는 모든 과정을 일종의 종교적 제의로 받아들이며 문학과 학문을 병행하는 점에서 당대에 보기 드문 인문주의적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내가 감동받은 몇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p19에서 그러므로 “살아 있다”는 것은 “흔들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불가피하게 “흔들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살찌운다. 참으로 공감한다. 나도 “흔들리는 나무”라는 시를 쓰면서 흔들리면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는 느낌을 적어 페이스북에 올렸었다. 어떤 분이 그 글을 보고 “요즘 흔들리고 있나봐”하면서 답글을 올린적이 있다. 조금은 씁쓸했다.
정지용의 장수산이란 시에서
p53에 ‘“맹아리”와 “고요”, 정지와 흔들림과 같은 절대적으로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서로 절대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영속적인 패러독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절대적 시공간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집중할 때, ’장수산‘은 한낱 우리에게 죽은 기계의 소음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상호 유대적인 결속이 창조하는 생명의 화음을 들려주는 장소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라고 했다.
영국의 유명한 영성가 C. S. 루이스도 신의 음성을 듣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면 라디오, 음악, 드라마, 신문 등의 소리를 계속 들리게 하라고 하고 있다. 장수산 같은 절대적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김현승 시인은 그의 시 <절대 고독>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는‘라고 한다. 그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직시함으로써 나의 시는 그 생명력을 얻는 역설에 직면한다. 시적 언어의 무기력 내지 한계를 느끼는 데서 오는 절망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과 마주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으로 뒤바뀐다. 침묵의 희열, 침묵의 영광, 침묵의 환희를 볼 수 있었다.
김정환의 시 ‘독수리’에서
p177에서 “고독한 천상과 무한한 지상 사이의 중간 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시인으로서 ”나“는 ”내 무게보다 더 무거운 어떤 / 떠받침“, 또는 ”숭배보다 더한 그 무엇“에 대한 깨달음 혹은 그 어떤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문득 세속의 시간으로 임재하는 신으로서 ‘독수리’를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작가 이중텐은 영감 중에는 끝없이 질문을 하는 철학적 영감과 맹종을 요구하는 종교적 영감이 있는데 둘을 이어주는 것이 시인의 영감이라 했다. 김정환의 시인의 영감으로 두 영감을 이어주는 시로 이해된다.
윤중호의 <시>에서
p316-321에서 서정시가 “엄니”의 삶으로 대변되는, 제대로 된 보호막조차 없는 작고 초라한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 "행상으로 어렵게 살다 간 시인 자신의 “엄니”에 대한 회상은, 바로 그와 같이 힘없고 가난한 삶과 세계가 서정시가 태어나는 자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 한낱 “행상”으로서 “한 달에 한 켤레씩 신발”이 닳도록 “걸얻”니며 겪어야 했던 “엄니”의 내면에 스쳐갔을 가뭇없는 “막막”함이나, 명확한 의미로 규정지을 수 없는 “질수심”과 같은 마음의 세계가 서정시의 근원이자 출발지임을 의미한다. ...... 서정시가 단순히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낙원에 대한 향수와 동경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 간신히 정하는 소리 없는 주변성의 소리, 하지만 그 속에 내재한 생명의 원초적 리듬 또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 때문에 서정시인들은 “이른 봄 새벽부터” 길도 얼어버린 겨울 그믐밤까지“ ”눈물겹게 아름다운“삶의 길 또는 사랑을 마치 ”행상“처럼 노래하면서 스스로를 주변자 또는 생의 변방으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정시인들의 시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시를 통하여 대변하는 것 같다. 아니 그 시를 저자가 대변해주는 대변인 같은 느낌이다. 나도 시감이 짧아 자연을 통해 먼저 느끼고, 그 느낌의 의미를 새겨보는 정도로 적어보고 있다. 이렇게들 깊은 것까지 느끼고, 지면에 옮기는 것은 아직 나에게는 먼 길인 것 같다. 그러나 저자와 같은 책들을 많이 읽고 습작하다보면 언젠가는 산마루에 오를 날이 오리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