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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인가, 세상인가 - 미처 몰랐던 내 안의 우상 버리기
피트 윌슨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드폰테스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 교회 자매 한 분은 자신이 목표한 대학, 직장, 수입을 이루고도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보았다. 공허하고, 살고 싶지 않다는 고백을 했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삶의 의욕을 갖고 적극적으로 직장 동료를 전도하고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훈련을 받고 있다. 무엇이 그를 공허하게 만들었는가? 결국 세상의 것들로는 결코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증명을 한 셈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공이란 곳에 행복이 만족이 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 같다. 이 현상은 결코 세상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도, 심지어 목회자들에게도 있는 것이다. 미국의 떠오르는 목회자 피트 윌슨 목사님이 이런 것들을 아주 정곡을 찔러주고 있다. 미국 크로스포인트 교회를 이끌며 자신 스스로 교회 안에서의 성공지상주의 젖어 성취해야만 행복하다는 세상을 쥐고 살아왔던 것들을 돌아보며 세상인가, 하나님인가를 정확하게 분별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세상이고, 어느 것이 하나님이가 알아보자
이 책의 원제는 Empty Promise이다. 번역하기를 헛된 약속'이라고 하고 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 내는 우상 공장이다”고 했다. 즉 이걸 갖는다면, 그걸 이루면, 승진한다면, 좀더 수입이 있으면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하면 행복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내 속에 이런 마음으로 늘 채운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마음에 이것이 빨리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다림, 느림은 죄악이라 생각한다. 요즘 “패스트, 인스턴트”의 시대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빠름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내명에 공허함을 잘 아신다. 목적과 가치, 의미와 용납, 안정, 사랑,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우리 몸 구석구석에 고동치고 있으며,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금송아지 제작은 물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아신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망은 갈증과 고통만 남긴 헛된 약속에 불과하다. 욕망을 채운 자나, 채우지 못한 자나 모든 사람들은 피로감에 빠져있다. 이런 욕망의 채움으로는 절대로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생의 인도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고, 불안 대신 평안을 주시고, 내면의 공허함을 기쁨으로 채우신다. 모든 인간은 헛된 약속을 성취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시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알도록 도와달라고 하는데 있을 것이다. 즉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 헛된 약속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해 달라는 기도이다. 왜 사람들이 타이거우즈의 성적과 사생활에 관심이 있는가? 나도 그처럼 되고 싶다는 간접표현인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을 채움으로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헛된 약속을 대표하는 몇 가지 우상이 있다.
첫째, 성취우상: 스스로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사람들은 성공에 목매어 산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헌신하는 자원봉사자조차도 그 일을 성공해서 성취욕을 얻고자 함이다. 성경을 이런 성취욕을 죄라고 한다. 즉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을 다른 데서 얻기 위해 성공과 성취로 눈을 돌리는 것이 곧 죄인 것이다. 남들에게 헌신하는 것을 통해 겉으로는 겸손하게 보여서 나를 더 돋보이게 하고 싶은 성취욕망이 있는 것이다. 성취 우상에 빠진 사람들은 1)주변에 미칠 영향을 아랑곳하지 않고 성공만 바란다. 2)남의 인정에 목을 맨다. 3)내가 이룬 업적을 나 자신인 양 착각한다. 4)늘 한 계단 더 높이 올라야 한다. 5)항상 남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의 성공에 배가 아프다.
둘째 인정 우상: 사랑과 용납을 관계에서 찾는다. 인정 중독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사랑과 용납과 확인을 사람이나 관계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 야곱은 부모 형제를 떠나서 곤고한 심정을 라헬이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얻어 사랑을 받고자 하는 인정 중독에 뼈져 있어 결국 14년이란 기간을 오직 한 여인에게 바친 것이다. 인정중독에 빠진 사람은 세 가지 운명이 기다린다. 1)평범하게 될 운명: 늘 대중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현세의 일만 하게 되고, 사람만 만족시키고 만다. 2)탈진하게 될 운명: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이미지 관리에 전력을 하다보니 채울 수 없는 인간을 만족시키는 일에 결국 탈진하고 마는 것이다. 3)실망과 거절을 경험할 운명: 자신의 가치를 창조주에게서 찾지 않고 사람에게 맡기기 때문에 타인을 끝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또한 능력은 늙으면서 한계를 드러내고 유행도 바뀌기 때문에 결국 거절감만 남게 된다. 오직 하나님 만에 우리가 간절히 찾던 사랑과 용납이요. 인정 중독의 치료제이시다.
셋째 권력우상: 통제의 환상에 사로잡히다. 저자는 목회를 하면서 당회원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 주지 않는데서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나도 가끔 그런 느낌을 받는데 이것이 권력우상이란 사실에 사늘한 느낌이 든다. 성경의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된다. 즉 잠자리에 들면서 잠든 사이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나의 모습이고 그런 약한 나를 보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란 것이다. 이분만이 나를 제대로 통치하실 수 있는 분이다. 내가 사람을 통제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다.
넷째, 돈 우상: 돈으로 못 하는 게 없다고 믿는다. 인도의 슬럼가에서 진흙쿠키를 먹는 가족들이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평안과 행복이 그 속에 있음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돈에 대한 환상이 있다. 1)돈이 많으면 안정감이 생긴다. 2)돈이 많으면 안심이 되고 행복하다. 3)돈이 많으면 넉넉히 베풀수 있다. 부자 청년이 주님의 구원의 초청에 근심하며 떠나게 된 것은 돈을 자기의 원동력으로 믿었기에 예수님의 명령대로 자신의 재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자신이 돈 대신 정말로 믿었어야 할 대상이 주는 안정감과 만족과 자유를 놓치고 말았다.
다섯째, 종교우상: 복음 외에 무엇을 더하려 한다. 우리는 영적 런닝 머신을 타고 있다. 우리 마음 한 구석에 하나님께 더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한다. 그래서 헌금을, 봉사를, 기도를, 전도를, 찬양을 더 많이 하면 사랑받으리라는 종교심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 ( )= 구원이란 공식을 가지고 있다. 종교 우상은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회의가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하나님의 목적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돌보시는 건지, 아시기나 하는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오직 하나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인정하신다.
여섯째, 외모 우상: 미모를 최고의 무기로 여긴다. 우리는 거짓말에 속고 있다. 1)아름다우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외모는 만족을 모른다. 결국 파괴적인 길로 이끈다. 2)외모가 나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우리를 독특하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요즘 쌍수는 기본, 코, 가슴, 심지어 양악수술까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외모 우상주의에서 온 현상들이다. 우리 자녀들이 성형을 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일곱 째, 꿈 우상: 나의 꿈과 하나님의 꿈을 혼동한다. 성도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우상이다. 그것도 믿음이 좋다는 성도들 속에서 나타나는 우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예상하는 ‘등식’을 만들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신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 드러나는 핵심 주제는, 하나님은 정의로우시지만 전혀 안전하지도, 예측 가능하지도, 않으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바라는 등식으로 축소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 단어를 두셨다. 그것은 ‘내가...할 것이다.’였다.
이제 우리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해야 한다. 세상의 각종 우상을 버려야 한다.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 신앙 안에서의 성취우상, 꿈 우상까지도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 인격적인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 우상 숭배를 끊어내려면 ‘돌이켜야’할 뿐 아니라 제대로 된 곳을 ‘바라봐야’한다. 특정 우상에 대한 경배를 그냥 ‘멈춰서는’안 된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해야’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면, 인생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그분의’ 목적이고,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그분의’영광이다. 예배드릴 때마다, 나는 나를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이끄시는 무한하신 하나님, 전능하고도 한량이 없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깨닫는다. 그분의 임재 가운데 그분의 영원하신 은혜가 나를 빚으셔서 나는 끊임없이 그분을 닮아간다. 영적 훈련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영적 훈련은 하나님에게서 어떤 ‘신임’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 금식, 성경 읽기, 묵상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헛된 약속의 우상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영혼의 만족을 누려야 한다. 다니엘의 경우에서 보면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행복은 헛된 약속이 아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쫓기는 삶에서 헌신하는 삶으로, 궁핍한 삶에서 보장된 삶으로, 통제하는 삶에서 굴복하는 삶으로, 탐욕스런 삶에서 나는 사람으로, 종교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삶으로, 외모에 집착하는 삶에서 진정 아름다운 삶으로, 과거 때문에 좌절하는 삶에서 미래를 의탁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최근 기독교 안에서도 영웅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사람이 영웅이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주님은 어디에 버려두었나 생각이 든다. 사람이 아닌 주님이 영웅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훌륭한 인물은 주님이 그 사람에게 임재하여 그 사람을 사용하였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영어를 잘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를 가르치고, 그분이 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또한 진정한 행복은 그분 한분만으로,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더욱 경험하고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