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꽃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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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4월 29일에 남쪽 바다에 다녀왔다. 바다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일찍 도착하여 줄을 서는데 한 스님도 함께 줄을 섰다. 젊으신 여스님이 시주함을 준비하여 줄을 서고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는데 스님이 시주를 받고 있었고, 내려 올 때 역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스님의 손에는 곡식이 있었고, 연신 스님을 닮은 조그맣고 예쁜 새들이 스님의 손에서 모이를 쪼고 있었다. 그 스님을 보면서 “무슨 사연이 있길래”라는 노래 가삿말이 생각이 났다. 아마 들어보았으면 이 녹주와 비슷한 사연이 있을까를 연상하며 불의 꽃을 읽게 되었다.

 

요즘 남자들의 농에 애인 없으면 6급 장애인이란 말이 있다. 시체말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멘스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사랑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 없이 살수도 없고, 사랑 없이 살아서도 안된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사랑이며, 어디까지가 불경인가? 참으로 애매하고, 개인적이며,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아름답다.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과 인륜, 사랑과 규율, 사랑과 사회 통념, 사랑과 가족, 사랑과 질서 연관지어야 할 일들이 사랑에는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럼에도 사랑은 해야 한다. 사랑은 소중하다. 너무나 복잡다단하지만 그럼에도 정리해야 한다. 사랑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도 하지만 골치아픈만큼 소중하기에 적절히 정리해야 한다. 사랑은 너무나 변화무쌍해서 쉽게 정리, 정의될 수 없다. 가볍게 처리해서도 안된다. 신중하고, 소중하게 사람을, 관계를 보아주어야 한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1423년) 9월 25일의 첫 번째 기사로부터 이야기를 유추하고 있다.

[정사를 보았다. 대사헌 하연이 말하기를, “비밀히 계할 일이 있사오니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의정 이원만을 남게 하시기를 청합니다.” 아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나가니 하연이 계하기를, “전 관찰사 이귀산의 아내 유(柳)씨가 지신사 조서로와 통간하였으니 이를 국문하기를 청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라 유씨를 옥에 가두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작가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조선시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승화시켰다. 여성의 특유한 감성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 그야말로 소설을 썼다. 이게 소설의 맛이 아닌가.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시대의 역사를 근간으로 한 고려와 조선의 아픈 역사, 개성을 뒤로 하고 평양의 등극과 주인공들의 갈림길, 한 나라의 국호가 무너지고 신세대를 열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시들어지는 집안에서 노비로 전락할 수 밖에 없던 시대상과 이귀산의 아내 유씨를 맺어주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시대가 아름다운 사랑을 얼마나 많이 분륜, 치기, 치열한 삶을 우습게 여기는 무지한 생각 정도로 매몰시키는지 모른다. 서로와 녹주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하고, 고귀한가? 서로의 부모, 녹주의 주변 인물들이 그 사랑을 사는게 뭔지도 모르는 무지한 소치로 짓밟았는가를 생각해 본다. 나도 젊었을 때 청춘 남녀의 집안과 학력이 어울리지 않는 사랑에 얼마나 강력하게 말렸는가를 생각하며 지금에서야 많은 후회를 한다. 용기와 격려는 못했을망정, 모른척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막급이다. 지금이라도 다시는 후회할 일을 하지 말아야 겠다.

 

사랑은 남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치열한 싸움으로 얻어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꼭 이뤄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만큼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는 부모의 반대나, 개인의 출세의 영욕을 뒤로 하고 먼저 사랑을 이루고 나중에 매진했어도 얼마든지 가능했을텐데 시대를, 부모를, 개인의 영욕을 뛰어넘지 못한 것 같다. 사랑은 이런 투쟁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녹주 또한 서로의 어머님의 매몰찬 호미걸이와 불가에 귀의하라는 밀어내기에 당당히 맞서야 했다. 사랑은 핑계만으로 합리화 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회적 통념이나 지금의 수많은 돌팔매질을 뚫고 지나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는 결승점인 것이 사랑이다. 지금도 사랑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랑할 용기가 있는가? 그 어떤 것보다 사랑이 더 숭고하다는 철학이 없이는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이다. 사랑의 용광로에서 용기를 분출하라. 그러면 행복이 생산될 것이니라.

 

서로와 녹주의 사랑은 불행했다. 불행한 만큼 사랑을 누렸다고 주장해도 할 수 없다. 조서로는 유배의 길을 떠나 자신은 불행한 인생의 마감의 길을 들어섰고, 녹주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을 씻지 못하면서 평생을 수치심의 굴레를 쓰고 살았다. 녹주는 능지처참이라는 불운한 죽음을 사랑의 결과물로 얻고 말았다. 그래도 사랑했으니, 한 때나마 행복할 수 있었으니 후회는 없다고 해도 누가 뭐라할 수 있는가? 그런 말을 하면 두 사람을 한 번 더 유배와 처참을 시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타이밍을 놓친 결과가 이토록 아프고 저리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용기 있게 처음 타이밍을 놓쳤다면 마음으로 사랑과 추억으로 담아두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러나 타이밍을 잃은 사랑이 결국 두 사람의 출세의 타이밍, 죽음의 타이밍마저 뒤틀리게 만들지 않았을까? 사랑은 타이밍이다. 때를 놓치지 말라. 사랑의 타이밍을 잡으라. 타이밍에 맞는 사랑을 하라. 첫 사랑은 과감하고, 분명하고, 열정적으로, 다음 사랑은 깊고도, 가슴으로, 추억으로 사랑해야 한다. 어찌하던지 사랑은 무죄요, 사랑은 숭고하다. 누가 당신의 사랑을 막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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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예수님처럼 질문하라 - 질문식 전도법을 통해 배우는 전도의 NEW 패러다임
랜디 뉴먼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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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라는 말은 부담스럽다. 아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억지로 사람을 교회로 데려 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영혼구원, 생명살리기로 명명하고 있다. 전도를 하다보면 제일 난감한 경우가 대상자들이 도전적이며, 반박적인 경우이다. 이럴 때 전도자들이 같이 흥분하여 논쟁을 하거나 같이 강압적으로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라는 식으로 복음을 집어 던지면서 끝낸다. 논쟁하겠다는 사람을 전도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논쟁으로 흐르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게 참 힘이 든다. 이런 어려움을 전도 경험자라면 누구라도 있을텐데 이 책은 이런 경험자들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책인 것 같다. 이런 공격적인 전도 대상자를 어떻게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복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까? 그 지혜를 얻어 보자.

 

파트 1. 예수님처럼 초대하라.

1. 예수님은 전도의 대상을 결단시키기보다 초청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전도의 열매를 맺으려면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들어야 하고, 결단을 요구하기보다는 초청해야 한다. 아마도 이런 전도 방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기보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셨고, 랍비셨다. 지금도 유대인, 랍비들은 늘 질문에 익숙하다. 부자청년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는 질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막10:18)로 질문으로 답하셨다. 가이사 세금 문제도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마22:20) 안식일에도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마12:11) 온갖 곳에 질문,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질문으로 답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어디도 직답으로 하신 경우가 드물다. 직답에 믿음 쪽으로 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신을 더 굳혀 주었다. 직답이 복음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단골 질문을 자주 받는다. ”다른 종교를 믿는 진실한 신자들은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인가?“ 이 때 질문으로 답은 ”당신은 지옥을 믿습니까?“ 질문으로 답하면 적대감이 다소 줄어든다. 또한 다른 주제로 이어지게 만든다. 즉 지옥을 믿습니까?라고 물어봄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개념에 길을 닦게 된다. ”예수님을 선한 스승 이상으로 구원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당신은 예수님을 왜 선한 스승으로 생각하는가? 그분의 가르침을 읽어보았는가?”라고 질문으로 답하면 자신이 정확히 알지 못하고 반박만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돌아가서라도 진지하게 임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을 잘 찾아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약을 올리는 것이라 오해할 수 있다. 행17:2-3절에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강론했다는 말이 나온다. 강론은 ‘논증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즉 바울은 회당 교사들에게 구약 성경을 근거로 하여 질문식으로 논증한 것이다. 거기에 그들이 인정하는 구약으로 논증하고, 질문으로 답할 때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질문식 전도를 적용한다면 “그냥 살아도 충분히 만족한가? 다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이대로 생을 마쳐도 후회함이 없는가? 여기서 예, 혹은 아니오. 아니오. 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해야 하는가? 뒤로 미뤄야 하는가? 지금이라면 뭘 결단해야 하는가? 여기서 예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가? 그런데 당신이 추구하는 것을 다 얻은 헤밍웨이, 최진실, 장국영 등은 왜 자살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그 자리에 가기 전에 뭘 생각해야 하는가? 질문은 수도 없이 나올 수 있고 전도 대상자들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초청이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은 전도의 조건으로 지혜와 긍휼을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말은 치유와 연합을 가져다주지만 모욕과 빈정대는 말은 분열과 고통을 낳는다. 지혜는 사람을 얻는다.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11:36) 데일 카네기의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9가지가 많은 도움을 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비판, 비난, 불평 삼가고, 진심과 솔직하고 인정하라. 상대방이 원하게 만들라.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라. 미소, 이름을 불러주라. 경청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하라. 관심사를 끌어내고, 상대방이 중요한 사람임을 느끼게 하라. 참으로 전도에 유익한 내용이다.

 

3. 예수님은 전도의 방법으로 대결이 아닌 대화를 원하신다.

깨우침 보다는 깨어나는게 먼저다. 많은 사람들은 잠들어 버린 비논리적인 내용을 믿고 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오류임을 깨워야 한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것들이 참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모든 종교는 참이다’같은 경우이다. “모든 종교가 참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잘 모르고 주장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억지 주장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일부만 옳은 것일 수 있다. 불교나 마호메트교가 옳은 수 있지만 “그래서요?” 그 종교에 대해서 공부해 보셨습니까? 스스로 억지임을 증명하게 된다.

 

2. 경청하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다.

경청하려면 외적인 기술의 연습보다 상대방에 대한 내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왜 듣지 않는가?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서 이다. 엄연히 우리에게는 진리가 있다! 중생하지도, 깨어나지도 못한 전도 대상자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이런 자세로는 진정한 경청이 일어날 수 없다. 경청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개시’하는 질문이 경청의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영적인 주제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습니까?” 경청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경청하지 않는 법을 알고 진정한 경청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전도 대상자의 관심사를 묵살하는 태도다. 그러면서 전도한답시고 장광설을 늘어 놓을 때 그들의 심정이 어떤지 이해해야 한다.

좋은 경청의 자세는 이런 추임새를 많이 넣으면 된다. “나도 그런데!, 말도 마세요!, 에이, 그럴리가!” 또한 너무 많은 말이나, 너무 적은 말은 경청의 금물이다. 자칫하면 전도를 통해 회심자를 내는 일련의 ‘기술’로 읽기 쉽다. 오히려 은혜로운 경청은 은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낮아지고 잠잠해지고 변화된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경청은 단순히 섬김의 한 형태이며, 빌립보서 2장의 간곡한 권고대로 상대방을 나보다 앞세우는 일이다. 반사 경청이 되어야 한다. 즉 “제가 정확히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말은...” 감정의 반사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서 당신의 감정이 북받치는 것 같군요” 공통분모를 찾으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경청이 일어난다.

나는 나의 전도 대상자가 부동산업을 한다. 그래서 부동산 경기에 대해서 자주 묻는다. 또한 계약이 잘 되기를 축복한다. 부동산 물건이 있으면 적극 추천한다. 그러면 나에 대해 너무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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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恨 대마도 1 천년한 대마도 1
이원호 지음 / (주)맥스퍼블리싱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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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가 속해 있는 모임에서 대마도 관광을 가자고 추천을 하였다. 나는 일본도 가 보았고, 부산까지 갔다가, 다시 일본을 배를 타고 사는 것이 고생이 될 것 같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전체 회원들이 동의하지 않아 대마도 여행을 무산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산된 것이 아쉽기도 하고, 잘되었다는 생각되 했다. 아쉽기는 미리 가보고 읽었더라면 더 실감이 났을 텐데. 잘되었다는 생각은 이 책을 읽고 가니 자료도 더 찾아보고 가면 단순 여행이 아닌 역사기행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미 있는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 모임에서 추천이 들어오면 이 책 이야기를 하면서 자료도 첨부해서 적극적으로 추천할 예정이다.

 

수 십년 전에 정광태로 기억되는 가수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불러 독도 사수에 사기를 충만케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

 

앞부분 생략 후반부 끝부분에 “하와이는 미국 땅 대마도는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

바뀐 가사(하와이는 미국 땅 대마도는 조선 땅 독도는 우리 땅)

 

어떤 분이 개사를 이렇게 제안했다.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는 부분을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의 가장 큰 섬인 "본도(혼토우)는 일본 땅" 이라고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관련기사를 정리해 보자.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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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우리땅, 역사적 근거 충분하다”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

 

시민단체 활빈단(단장 홍성식)이 한 일본 극우단체의 독도상륙 시도에 반발, 8월 중 일본 대마도까지 열기구를 타고가 ‘대마도=한국땅’이라는 선언을 하기로 한 가운데 국내 역사학자가 이 주장을 뒷받침 할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해 새삼 주목을 끌고 있다.

 

원광대 나종우 교수(원광대 사학과·한일관계사)는 6일 KBS 라디오 시사 플러스에 출연해 “대마도는 삼국시대부터 임진왜란 전 까지 우리 땅 이었다는 사료가 광범위 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나 교수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 땅이었다며 임란 전 까지 조선시대 때 변방에 파견하는 관리였던 경차관, 채찰사등이 대마도를 통치했다”고 설명했다.

 

나 교수는 “세종원년(1419년) 대마도 정벌 때 근거로 삼은 것은 ‘대마도는 본래 우리땅’이라는 태종의 교유문이었다는 게 세종실록에 기록 돼 있다” 며 “일본의 역사 자료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나 교수는 “13세기 일본의 사서 ‘진대’ 에 신라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을 비롯해 “1723년 대마도의 대학자 등정방이 편찬한 ‘대주편련락’이라는 책에도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행정구역)이다는 대목이 있다”고 설명했다.

 

나 교수는 또 동아닷컴과의 통화에서 일본 고사기에서 대마도를 지칭하는 진도(쓰시마)는 ‘한반도에 가는 배가 머무는 곳’,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향지도는 ‘한국의 섬’ 이란 뜻이라고 추가 설명했다.

 

그렇다면 대마도는 언제부터 일본 땅에 편입 됐을까.

나 교수는 그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꼽았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이나 일본 모두에게 척박한 땅인 대마도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조선에서는 대마도 주민에게 식량을 대 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 곳 통치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본이 임란 때 대마도를 한국 침략의 거점으로 이용하며 가치를 알아보고 자기네 영토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마도가 확실하게 일본 영토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점은 1950년대 초 라는게 정설.

 

나 교수에 따르면 임란 이후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 대마도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싹튼 민족의식은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18일 대마도 반환을 최초로 주장하게 만들었고 일본이 이에 즉각 반박하면서 대마도에 대한 양국의 관심이 본격화 됐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에서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3년동안 학자들에게 ‘대마도 연구’를 집대성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 ‘대마도=일본땅’ 이라는 논리적 근거를 완성했다는 것.

 

나 교수는 “1965년 한일협정때는 다른 중대사안에 밀려 거론조차 하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느라 한국정부는 대마도 문제는 거론조차 못했다”며 아쉬워 했다.

 

나 교수는 “일본은 시끄러울때 마다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들과 똑같이 한다면 감정적 대응밖에 안 된다. 하지만 대마도는 부산에서 불과 5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리땅이다(대마도~후쿠오카는 147km). 우리는 만주만 잃어 버린 게 아니라 대마도도 잃었다”며 “대마도는 언젠가는 되 찾아야 할 땅이라는 생각을 갖고 정부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작가는 대마도가 한국 땅인 것을 역사적 자료를 증거로 하여 재구성하고 있다. 더군다나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점, 즉 대한민국과 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시점을 연결하여 남, 북이 연합전선을 펴서 대마도를 수복하듯이, 당시 고려와 조선의 주축세력들이 공조하여 일본으로부터 대마도를 수복하는 거국적 연합전선으로 한민족의 자긍심을 불어 넣고 있다.

 

또한 현대의 자료, 즉 한국 사람들이 관광객으로 많이 방문하고 있는 것, 대마도 땅을 사들이고 있는 부분 등, 관광객이 북한 및 남한의 특수부대가 위장한 전투부대라는 것 등등의 상상력이 아주 풍부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북한의 김정은과 남한의 박근혜가 한반도의 하나된 힘을 합쳐 대마도 수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현실성에 희박할지 모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한 조선 당시 일본의 해적단들이 대마도를 점령하고 전진기지로 삼고 있던 땅을 조선의 정예부대가 비밀 작전을 펴서 정벌한다는 것과 한국과 북한의 정예부대가 비밀리에 침투한다는 가상의 작전 또한 흥미진진하였다. 거기에도 현재의 자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언적 내용의 편지, 있을만한 인물 마쓰노(한국명 김성진)을 등장시키는 치밀함도 보인다.

 

나는 역사에 무식했다. 대마도가 당연히 일본 땅으로만 알고 있었다. 독도는 우리 땅에서 하도 들어서 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의 역사적 근거와 소설적 픽션을 가미한 작품 <대마도>를 통해 언젠가는 다시 찾아올 대마도를 민족의 가슴에 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에게 민족혼을, 대마도를 다시 찾을 꿈을 갖게 해 줘서 다시 한 번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 다음 세대들이 많이 읽고 같이 대마도를 품었을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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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의 책 - 잠들기 전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
윤성근 지음 / 마카롱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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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책은 수면제였다. 왜 그리 책만 손에 들면 잠이 쏟아지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그러니 글을 쓴다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있고, 시를 쓰고 있다. 물론 나 혼자, 아직은 누가 알아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쓴다는 것이 나에게는 기적이다. 50평생에 나의 독서 경력은 8년이다. 왜?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열면서 일주일에 한 권 읽고 독후감을 그 때부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때는 친구들과 마음이 맞아 무작정 아무 책이나 읽기로 했다. 그래서 베스트셀러, 인문학, 소설, 과학, 경제, 음악, 미술, 건축, 심지어 만화, 동화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물론 일주일에 한 권이니 참으로 빈약한 독서였다. 그러던 중 책 중에 책은 수 백년에 걸쳐 공인된 인문학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가능하면 영양가 있는 책, 인문학을 읽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뜬금없는 제목 <침대 밑의 책>이란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제목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게 하는 그런 책인줄 알았다. 다소나마 편안안 자세로 이 책을 집어 들고 처음 장을 읽어내려 가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주제, 논지, 전개 방법은 나를 당혹하게 했다. 서바이벌 게임에 암호 이야기까지 애들 SF소설을 읽는 느낌도 들기도 했다. 그래서 약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나의 습성상 어떤 것이든 설렁설렁이라도 끝까지 읽는 습관 덕택에 다음 장, 다음 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이 작가의 개성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작가의 글의 내용과 장르에서 그의 하는 직업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헌 책방을 운영하고 책읽기를 신처럼 여겼다는 말에서 그의 책읽기 편력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직업상, 특성상 이런 주제들이 나올 수 있었구나 하는 공감을 하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한 느낌, 작가에 대한 기분을 적어보면서 내 속을 보이고자 한다.

 

먼저, 기발한 인쇄를 보고 놀라고 즐거웠다. 우리 어렸을 때 해보던 책에 그림을 그려 손끝으로 책을 넘기면서 그림이 동영상처럼 보이게 하는 것을 실제로 책에 실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삽화가 그려졌구나. 그림의 변화도 별로 없길래 그냥 똑같은 삽화가 곁들여진 정도로 생각했는데 많은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많이 달라진 삽화에 의아해하며 책을 넘겨보니 내가 침대 밑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그려 놓았음을 알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저자의 유머스러움, 재미있게 하는 사람으로 충분했고, 신선함이 성공적이라 생각했다. 또한 저자가 언급한 책들의 대부분은 내가 접해보지 못한 책들, 아니 듣도 보도 못한 책들이 많았다. 과연 헌 책방 장사가 맞구나, 아니 중고서점 사장님의 어드벤테이지를 충분히 이용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일반 독자가 이런 책들을 쉽게 손에 들고 섭렵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저자의 책읽기 편력은 다양성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는 저자를 독서의 이단아, 책 읽기의 외인구단이라 명명하고 싶다. 어쩌면 이렇게 독특한 책에 취미가 있으며, 그런 책들에서 그런 좋은 면들을 발견해낸단 말인가. 이 책과 저자를 보면서 외계에서 온 책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책의 별천지에 온 느낌이었다. 저자의 책읽기의 다양성을 보면서 식습관으로 말하면 잡식성이라 할 수 있다. 인용문들이 듣도 보도 못한 책들임을 보면서 온갖 공구들이 가득찬 작업실에 들어온 느낌이다. 따라서 이 책은 제목이 <침대 밑의 책> 보다는 <작업실의 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책이라 생각된다. 이 주제의 느낌 또한 잠자리에서 읽다가 잠들기에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주제들이기도 하다.

 

책은 그야말로 좋은 것, 좋은 말을 해주고, 깊은 의미를 주고, 감동을 주는 것만으로 생각했는데, 기상천외한 삶과 기록, 사상과 관점들을 통해서 일반적이면서도, 일상적인 행복, 사는 즐거움을 주는 책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저자가 그런 삶을 추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운영하는 중고서점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중고서점이 청계천에 있었는데, 옛날 청계천 8가에 가면 중고품 만물상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참 재미있고, 신기하고, 내가 꼭 찾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중고서점과 중고품 만물상이 불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까?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마치 중고 만물상에서 보물을 수도 없이 찾아낸 느낌이었다. 의외로 중고책에는 보물이 이렇게도 많았었구나 하는 생각에 많이 놀랐다. 그 보물들 중 몇 가지만 적어보도록 하자.

 

사진 하나 없는 4년간의 피크닉,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도보 4년 여행 중 사진기를 가져갔고 사진도 찍었건만 책에는 사진 한 장 실지 않고 오직 1,500장의 글로만 채운, 이 책일 과연 팔릴까 했지만 그냥 발로 밟으면서 느낀 그 느낌 그대로가 독자들을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다. 뛰어가는 사람에겐 행복이 보이지 않는다. 베르나르에겐 여행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연금생활자가 새로운 삶을 발견한 자기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걷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듣기’라는 것도 깨달았다. 올리비아의 경우 3개월 동안 걷기 여행의 경비가 400달러 밖에는 안되었다는 말에 경제성도 있는 최고의 여행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승리자는 없다. 어떤 의미의 성공도 결국은 들에 핀 꽃처럼 허무하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시스템이 바로 좀비다. 우리에겐 피 튀기는 경쟁만 남았다. 그럼에도 바이러스에 감염되기를 거부하고 이 사회와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어딘가에서 오래 전부터 활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진정 바로 ‘전설’이 될 것이다. 흐르는 물에서 수영하기가 쉽기는 하지만 재미는 없듯이, 거스르는 수영이 힘들기는 하지만 느낌과 즐거움이 있는 것처럼 세상을 좀 거꾸로 볼 필요도 있고, 그 곳에 재미도 솔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한 책들의 ‘리스트’ 우리 모두의 로망이다. 해외에 다녀온 나라의 숫자를 꼽들이 읽은 책들이 몇권 무슨 책에 집착하시 쉽다. 저자는 “이렇게 환상적인 리스트는 아직 없었다”고 한다. 나는 “리스트에 환상은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카피처럼, 읽은 책의 리스트는 리스트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걷고, 느끼고, 새기는 것처럼, 담고, 쓰고, 나누고, 그렇게 사는 것만이 남는 것이다. 군대에서 자주 쓰는 말 “먹는게 남는 거다”, “느끼고, 그렇게 사는 게 남는 거다”

 

저자의 책 읽고 싶은 간절함은 “왜 신은 잠을 만들어서 책을 읽을 수 없게 하느냐”는 푸념이 말해주고 있다. 다빈치는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4시간마다 15분씩 잠을 잦다고 한다. 인간이 빛을 만들면서 세상에는 24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이 생겼고,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저자는 이 글을 쓰는 시간이 새벽 3시라고 한다. 책이 이렇게도 좋을까. 책읽기의 기인으로, 아니 달인으로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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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Yes -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거룩한 예스
스탠리 존스 지음, 배응준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주 복음을 전했다. 나 나름대로 강하게 말하였고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정작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실망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 내가 했구나. 내 말을 했구나. 아니 주님의 말이라도 내 힘, 내 혈기, 내 의지, 의사가 너무 강하게 작용했구나하고 알게 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예스가 되어야 내가 제대로 쓰임 받을 수 있는데 아직 훈련이 덜 되었나보다. 아니 아직 부족한 게 당연할 것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예스가 되도록 해야겠다.

 

하나님의 예스는 1907년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67년 동안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 ‘가장 신뢰받는 선교학 전문가’,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선교사’등으로 존경받는 분이다. 1971년 12월 8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온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그가 평생 전했던 말씀을 육성으로 써내려간 영적 유언장이 바로 이 책이다. 그 주제는 ‘하나님의 예스’이다. 즉 ‘하나님의 예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어떤 이론도, 학설도, 사람도, 능력도 아닌 그냥 예수 그리스도, 인격적이신 그 분이다. 그분이 답이다. 그분이 전부다. 그분만이 모든 것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일평생 알았고, 뇌졸중에 걸려서 모든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19)‘하나님의 예스’가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긍정하는 ‘예스’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모펫의 번역본)

스코틀랜드 성경학자 모펫의 번역본의 표현에 매료된 스탠리 존스는 이 구절을 기점으로 모든 것을 풀어나간다. 하나님의 예스이신 예수님의 ‘예스’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를 얻을 것이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복자와 승리자로 이 땅 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예스라고 긍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자체가 죄임을 증명하는 것이요, 예스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즉시 순종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예수님의 임재의 증거가 된다. 주님께 순종할 마음을 가져야할 것이며, 순종하면 임재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나는 오늘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된다. “예수님의 예스되심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내가 예수님의 예스됨으로 내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내일 치유수양회 가운데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전해져서 주님의 순종이 참여자 모든 사람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12가지 의문점들은 예수님의 예스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12가지는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실까?” “하나님은 공동체에도 나타내 보이실까?” “올바로 사는 법이 있을까?” “영적으로 굶주릴 때,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인생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임재는 지속성을 갖고 있을까?” “성령의 은사는 꼭 받아야 하는가?” “기독교 신앙은 믿을 만한 신앙인가?” “모든 질문에 ”하나님의 예스“가 답이 될까?” “고난의 돌파는 어떻게 하나?” 매우 포괄적이며 궁금한 질문들이다. 불신자나 신자들에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질문들이다. 스텐리 존스는 수많은 체험과 간증을 통해 증명해 주고 있다. 물론 논리적인 부분도 다소 포함하고 있지만 대부분 마음에 와 닫는 실증들이다.

 

몇 가지만 언급해 보면, 공동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설명할 때 “우리가 어떤 두드러진 인물이 되지 않더라도 예수님 안에 구체화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따르고, 전하고 선포하는 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말할 수 없이 귀한 가치를 지닌 매우 종요한 사람들이 된다”고 했다. 즉 공동체에서 주님의 따르는 삶을 살기만 하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올바로 사는 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리스도의 길이 어렵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 그리스도의 멍에가 당신의 열망이요, 짐이 당신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당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의 존재를 지배하는 법은 그리스도의 길의 법이다.“ 나의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리고 고통이요,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스도를 모시고 ‘예수님 예스”가 된다면 너무나 쉬운 일이다. 우리가 받는 훈련, 사명의 길은 쉬운 길이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요, 인간의 참된 본성이다. 그러나 죄가 인간을 부패시켰다. 죄는 인간이 형성한 습관일 뿐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인간의 본성에 침입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선설이 맞는가? 적어도 본래적인 관점에서는 그렇다. 그런 본래적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예수님 예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스텐리 존스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중풍병자인 나는 과연 불행할까?” 그는 대답한다. “나는 행복하다. 나의 행복이 외면적인 환경과 현상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원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예스”라고 말할 때, 우주 전체가 당신에게 “예스”라고 말할 것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국의 교계 지도자가 미국 교회에 멧시지를 전하러 왔다가 자신에게 들러 “저는 세계적인 영적 각성이 곡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비관적인 입장입니다. 그것이 그냥 말로만 끝나버릴까 적이 우려됩니다” 고 했을 때, 스텐리는 “아뇨,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교계 일각에서 일고 있는 세계적인 영적 각성 운동 그 이면에 세상의 움직임, 즉 이 세상의 절박함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영적 각성을 먼저 갖지 않으면,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낳을 수 있는 새로운 자녀들을 낳지 못하면 세상은 회복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운동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스탠리는 긍정적으로 보았고, 내가 먼저 “예수님의 예스”가 되면, 또 예수님의 예스의 사람을 낳으면 가능하다고 희망적으로 보았다. 그렇다. 긍정해야 긍정의 예수님이 역사하신다. 내가 긍정할 때 긍정의 영이신 예수님이 역사하신다. 나도 오래 전에 친구와의 대화에서 이 시대의 절망적인 대답을 한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젠 내가 먼저 “예수님의 예스”가 되기를 결심한다. 이 순간 내가 “예수님의 예스”가 된 줄 믿는다. 이미 내 안에 예수님의 예스의 영이 일하시기 시작했다. 치유수양회 가운데 1)예수님이 참석자 전원에게 임하신다. 2)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3)삶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4)스텝들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5)찬양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6)나눔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7)간식, 분위기를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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