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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꽃 ㅣ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3년 4월
평점 :
지난 번 4월 29일에 남쪽 바다에 다녀왔다. 바다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일찍 도착하여 줄을 서는데 한 스님도 함께 줄을 섰다. 젊으신 여스님이 시주함을 준비하여 줄을 서고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는데 스님이 시주를 받고 있었고, 내려 올 때 역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스님의 손에는 곡식이 있었고, 연신 스님을 닮은 조그맣고 예쁜 새들이 스님의 손에서 모이를 쪼고 있었다. 그 스님을 보면서 “무슨 사연이 있길래”라는 노래 가삿말이 생각이 났다. 아마 들어보았으면 이 녹주와 비슷한 사연이 있을까를 연상하며 불의 꽃을 읽게 되었다.
요즘 남자들의 농에 애인 없으면 6급 장애인이란 말이 있다. 시체말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멘스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사랑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 없이 살수도 없고, 사랑 없이 살아서도 안된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사랑이며, 어디까지가 불경인가? 참으로 애매하고, 개인적이며,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아름답다.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과 인륜, 사랑과 규율, 사랑과 사회 통념, 사랑과 가족, 사랑과 질서 연관지어야 할 일들이 사랑에는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럼에도 사랑은 해야 한다. 사랑은 소중하다. 너무나 복잡다단하지만 그럼에도 정리해야 한다. 사랑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도 하지만 골치아픈만큼 소중하기에 적절히 정리해야 한다. 사랑은 너무나 변화무쌍해서 쉽게 정리, 정의될 수 없다. 가볍게 처리해서도 안된다. 신중하고, 소중하게 사람을, 관계를 보아주어야 한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1423년) 9월 25일의 첫 번째 기사로부터 이야기를 유추하고 있다.
[정사를 보았다. 대사헌 하연이 말하기를, “비밀히 계할 일이 있사오니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의정 이원만을 남게 하시기를 청합니다.” 아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나가니 하연이 계하기를, “전 관찰사 이귀산의 아내 유(柳)씨가 지신사 조서로와 통간하였으니 이를 국문하기를 청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라 유씨를 옥에 가두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작가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조선시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승화시켰다. 여성의 특유한 감성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 그야말로 소설을 썼다. 이게 소설의 맛이 아닌가.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시대의 역사를 근간으로 한 고려와 조선의 아픈 역사, 개성을 뒤로 하고 평양의 등극과 주인공들의 갈림길, 한 나라의 국호가 무너지고 신세대를 열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시들어지는 집안에서 노비로 전락할 수 밖에 없던 시대상과 이귀산의 아내 유씨를 맺어주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시대가 아름다운 사랑을 얼마나 많이 분륜, 치기, 치열한 삶을 우습게 여기는 무지한 생각 정도로 매몰시키는지 모른다. 서로와 녹주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하고, 고귀한가? 서로의 부모, 녹주의 주변 인물들이 그 사랑을 사는게 뭔지도 모르는 무지한 소치로 짓밟았는가를 생각해 본다. 나도 젊었을 때 청춘 남녀의 집안과 학력이 어울리지 않는 사랑에 얼마나 강력하게 말렸는가를 생각하며 지금에서야 많은 후회를 한다. 용기와 격려는 못했을망정, 모른척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막급이다. 지금이라도 다시는 후회할 일을 하지 말아야 겠다.
사랑은 남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치열한 싸움으로 얻어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꼭 이뤄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만큼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는 부모의 반대나, 개인의 출세의 영욕을 뒤로 하고 먼저 사랑을 이루고 나중에 매진했어도 얼마든지 가능했을텐데 시대를, 부모를, 개인의 영욕을 뛰어넘지 못한 것 같다. 사랑은 이런 투쟁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녹주 또한 서로의 어머님의 매몰찬 호미걸이와 불가에 귀의하라는 밀어내기에 당당히 맞서야 했다. 사랑은 핑계만으로 합리화 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회적 통념이나 지금의 수많은 돌팔매질을 뚫고 지나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는 결승점인 것이 사랑이다. 지금도 사랑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랑할 용기가 있는가? 그 어떤 것보다 사랑이 더 숭고하다는 철학이 없이는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이다. 사랑의 용광로에서 용기를 분출하라. 그러면 행복이 생산될 것이니라.
서로와 녹주의 사랑은 불행했다. 불행한 만큼 사랑을 누렸다고 주장해도 할 수 없다. 조서로는 유배의 길을 떠나 자신은 불행한 인생의 마감의 길을 들어섰고, 녹주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을 씻지 못하면서 평생을 수치심의 굴레를 쓰고 살았다. 녹주는 능지처참이라는 불운한 죽음을 사랑의 결과물로 얻고 말았다. 그래도 사랑했으니, 한 때나마 행복할 수 있었으니 후회는 없다고 해도 누가 뭐라할 수 있는가? 그런 말을 하면 두 사람을 한 번 더 유배와 처참을 시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타이밍을 놓친 결과가 이토록 아프고 저리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용기 있게 처음 타이밍을 놓쳤다면 마음으로 사랑과 추억으로 담아두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러나 타이밍을 잃은 사랑이 결국 두 사람의 출세의 타이밍, 죽음의 타이밍마저 뒤틀리게 만들지 않았을까? 사랑은 타이밍이다. 때를 놓치지 말라. 사랑의 타이밍을 잡으라. 타이밍에 맞는 사랑을 하라. 첫 사랑은 과감하고, 분명하고, 열정적으로, 다음 사랑은 깊고도, 가슴으로, 추억으로 사랑해야 한다. 어찌하던지 사랑은 무죄요, 사랑은 숭고하다. 누가 당신의 사랑을 막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