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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예수님처럼 질문하라 - 질문식 전도법을 통해 배우는 전도의 NEW 패러다임
랜디 뉴먼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전도라는 말은 부담스럽다. 아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억지로 사람을 교회로 데려 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영혼구원, 생명살리기로 명명하고 있다. 전도를 하다보면 제일 난감한 경우가 대상자들이 도전적이며, 반박적인 경우이다. 이럴 때 전도자들이 같이 흥분하여 논쟁을 하거나 같이 강압적으로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라는 식으로 복음을 집어 던지면서 끝낸다. 논쟁하겠다는 사람을 전도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논쟁으로 흐르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게 참 힘이 든다. 이런 어려움을 전도 경험자라면 누구라도 있을텐데 이 책은 이런 경험자들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책인 것 같다. 이런 공격적인 전도 대상자를 어떻게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복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까? 그 지혜를 얻어 보자.
파트 1. 예수님처럼 초대하라.
1. 예수님은 전도의 대상을 결단시키기보다 초청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전도의 열매를 맺으려면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들어야 하고, 결단을 요구하기보다는 초청해야 한다. 아마도 이런 전도 방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기보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셨고, 랍비셨다. 지금도 유대인, 랍비들은 늘 질문에 익숙하다. 부자청년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는 질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막10:18)로 질문으로 답하셨다. 가이사 세금 문제도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마22:20) 안식일에도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마12:11) 온갖 곳에 질문,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질문으로 답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어디도 직답으로 하신 경우가 드물다. 직답에 믿음 쪽으로 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신을 더 굳혀 주었다. 직답이 복음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단골 질문을 자주 받는다. ”다른 종교를 믿는 진실한 신자들은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인가?“ 이 때 질문으로 답은 ”당신은 지옥을 믿습니까?“ 질문으로 답하면 적대감이 다소 줄어든다. 또한 다른 주제로 이어지게 만든다. 즉 지옥을 믿습니까?라고 물어봄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개념에 길을 닦게 된다. ”예수님을 선한 스승 이상으로 구원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당신은 예수님을 왜 선한 스승으로 생각하는가? 그분의 가르침을 읽어보았는가?”라고 질문으로 답하면 자신이 정확히 알지 못하고 반박만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돌아가서라도 진지하게 임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을 잘 찾아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약을 올리는 것이라 오해할 수 있다. 행17:2-3절에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강론했다는 말이 나온다. 강론은 ‘논증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즉 바울은 회당 교사들에게 구약 성경을 근거로 하여 질문식으로 논증한 것이다. 거기에 그들이 인정하는 구약으로 논증하고, 질문으로 답할 때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질문식 전도를 적용한다면 “그냥 살아도 충분히 만족한가? 다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이대로 생을 마쳐도 후회함이 없는가? 여기서 예, 혹은 아니오. 아니오. 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해야 하는가? 뒤로 미뤄야 하는가? 지금이라면 뭘 결단해야 하는가? 여기서 예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가? 그런데 당신이 추구하는 것을 다 얻은 헤밍웨이, 최진실, 장국영 등은 왜 자살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그 자리에 가기 전에 뭘 생각해야 하는가? 질문은 수도 없이 나올 수 있고 전도 대상자들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초청이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은 전도의 조건으로 지혜와 긍휼을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말은 치유와 연합을 가져다주지만 모욕과 빈정대는 말은 분열과 고통을 낳는다. 지혜는 사람을 얻는다.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11:36) 데일 카네기의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9가지가 많은 도움을 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비판, 비난, 불평 삼가고, 진심과 솔직하고 인정하라. 상대방이 원하게 만들라.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라. 미소, 이름을 불러주라. 경청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하라. 관심사를 끌어내고, 상대방이 중요한 사람임을 느끼게 하라. 참으로 전도에 유익한 내용이다.
3. 예수님은 전도의 방법으로 대결이 아닌 대화를 원하신다.
깨우침 보다는 깨어나는게 먼저다. 많은 사람들은 잠들어 버린 비논리적인 내용을 믿고 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오류임을 깨워야 한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것들이 참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모든 종교는 참이다’같은 경우이다. “모든 종교가 참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잘 모르고 주장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억지 주장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일부만 옳은 것일 수 있다. 불교나 마호메트교가 옳은 수 있지만 “그래서요?” 그 종교에 대해서 공부해 보셨습니까? 스스로 억지임을 증명하게 된다.
2. 경청하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다.
경청하려면 외적인 기술의 연습보다 상대방에 대한 내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왜 듣지 않는가?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서 이다. 엄연히 우리에게는 진리가 있다! 중생하지도, 깨어나지도 못한 전도 대상자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이런 자세로는 진정한 경청이 일어날 수 없다. 경청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개시’하는 질문이 경청의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영적인 주제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습니까?” 경청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경청하지 않는 법을 알고 진정한 경청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전도 대상자의 관심사를 묵살하는 태도다. 그러면서 전도한답시고 장광설을 늘어 놓을 때 그들의 심정이 어떤지 이해해야 한다.
좋은 경청의 자세는 이런 추임새를 많이 넣으면 된다. “나도 그런데!, 말도 마세요!, 에이, 그럴리가!” 또한 너무 많은 말이나, 너무 적은 말은 경청의 금물이다. 자칫하면 전도를 통해 회심자를 내는 일련의 ‘기술’로 읽기 쉽다. 오히려 은혜로운 경청은 은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낮아지고 잠잠해지고 변화된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경청은 단순히 섬김의 한 형태이며, 빌립보서 2장의 간곡한 권고대로 상대방을 나보다 앞세우는 일이다. 반사 경청이 되어야 한다. 즉 “제가 정확히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말은...” 감정의 반사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서 당신의 감정이 북받치는 것 같군요” 공통분모를 찾으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경청이 일어난다.
나는 나의 전도 대상자가 부동산업을 한다. 그래서 부동산 경기에 대해서 자주 묻는다. 또한 계약이 잘 되기를 축복한다. 부동산 물건이 있으면 적극 추천한다. 그러면 나에 대해 너무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